불교공부

[무비스님의금강경강의] 제삼 대승정종분(第三 大乘正宗分)

qhrwk 2023. 5. 14. 08:30

 

◐제삼 대승정종분(第三 大乘正宗分)◑

◐제3분 대승의 바른 종지

佛 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불 고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소유일체중생지류  약난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
약유색  약무색,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비무상
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득멸도자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 '대승(大承-Mahayana)'이란     '소승(小承-Hlnayana)'의 상대적인 말로서 
    큰 수레라는 뜻입니다. 

자기 혼자만의 해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한꺼번에 태우고 

지혜와 자비가 넘치는 저 언덕으로 실어 나르는 일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큰 '대(大)'는 단순히 크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다', '훌륭하다', '위대하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또한 '승(承)'의 의미도 '탄다'라는 뜻을 뛰어넘어 법(法)이나 가르침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대승(大承)'은 바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종지(宗旨)'란 가장 으뜸이 되는 취지와 원리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지혜와 자비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바르고 으뜸이 되는 위대한 

가르침이 바로 이 '대승 정종(大承 正宗)'인 것입니다. 

과연 어떤 원리가 여기에 담겨 있기에 이 짧은 구절을 보고 『금강경』에서 아니 많고 많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가운데에서 가장 바르고 으뜸이 되는 가르침이라고 하였는지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불교의 모든 것이고, 또한 불교의 참생명일 것입니다.

◐佛 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불 고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을 응당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지니라."
여기서 '보살'은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 등 어떠한 위신력이 있는 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베풂을 나누고 살아가는 사람, 깨달음에 눈이 열려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야말로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것도 마하살이니 큰 마음을 내어 시원하게 삶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는 큰 중생입니다.
사람이 가장 사람답게 사는 길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항복받는 일입니다. 
잘난 마음 못난 마음, 선한 마음 악한 마음, 교만한 마음 열등한 마음, 
우쭐한 마음 비굴한 마음 등 모든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합니다.

매일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일으키는 우리들의 마음은 모두 항복받아야 할 마음들입니다. 
왜냐하면, 한쪽으로 치우친 마음이요, 어딘가에 집착하고 안주하고 빠져있는 마음이요, 
그래서 편협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 이러한 분별에 의하여 집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났을 때, 인생과 우주, 그리고 
삼라만상의 실상(實相)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지닌 무한의 가치를 비로소 발휘할 수 있습니다. 
무한의 지혜와 능력이 드러나며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그 마음을 항복받는 일을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니다.
수보리가 안주하는 문제와 마음을 항복받는 문제에 대해 설법을 정하였는데 
마음을 항복받는 일을 먼저 말씁하십니다. 

우리들이 회의를 할 때 의제로 나온 것들 중에서 나중에 나온 의제부터 처리를 한

어느 것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렇게 경전은 세심하게 배려되어 있어서 요즈음의 

안목으로 보아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소유일체중생지류  약난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
  약유색  약무색,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비무상
  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세상에 있는 일체중생의 종류인, 
알에서 태어난 것,
태에서 태어난 것, 
습기에서 태어난 것, 
변화로 태어난 것, 
형색이 있는 것, 
형색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들로 
내가 무여열반에 들게 하고 제도하리라."
생명을 가진 모든 중생들의 종류를 아홉 가지로 보아 구류중생(九類衆生)이라고 합니다.

알에서 태어난 생명, 
태로 태어난 중생, 
습기에서 생겨난 중생, 
변화하여 생긴 중생(예를들어 
벌레에서 번데기가 되었다가 나비가 되는 그런 중생), 
생각이 있는 중생, 
생각이 없는 중생, 
생각이 있기도 하고 생각이 없기도 하는 중생,
이렇게 하여 아홉 가지가 됩니다.

우리 사람들은 태생과 유색, 유상에 다 걸쳐 있습니다.
이렇게 큰 덩어리로 중생을 구분하였지만 사람 사람에 따라서 살아가는 모습은

정말 무궁무진합니다.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서가 아니고 주위에서 늘 대하는 

사람 사람이 다 천차만별입니다.

부처인 내가 이렇게 각양각색의 형태로 살아가는 중생들을 다 제도하며, 
또한 각각의 종류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많은 중생들을 다 제도하고, 
깨닫고 성불(成佛)하게 하며, 차별을 두지 않고 모두 다 저 무여 열반(無餘 涅槃)에 들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여 열반(無餘 涅槃-Anupadhisesa-nirvana)'이란
일체의 미혹과 번뇌를 다 끊고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도리를 증득한 해탈의 경지를 뜻합니다.
불교는 지혜(智慧)와 자비(慈悲)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가르침으로서 차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신분의 사람이던지, 어떤 사상에 젖은 사람이던지 분별하지 않고 
평등한 자비로써 가르칩니다.최고의 가치인 진리의 가르침으로 이끌어 갑니다.
왜냐하면 사람 사람의 본성이 평등(平等)하고 그 본성을 일깨우는 법이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득멸도자

"이와 같이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중생들을 제도하되 
실은 제도를 받은 중생은 없느니라." 이 무슨 청천 벽력 같은 소리입니까.
불교는 끊임없이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하며 중생을 다 제도하겠다는 것입나다.
또 실제에 있어서도 부처님께서 무량 무수한 구류중생을 다 제도(濟度)하였습니다.

또 불교 삼천 년의 역사가 내려오면서 얼마나 많은 아픔과 고통을 
부처님 덕분에 벗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실에 있어서는 제도를 받은 중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밀이 진실입니다.
줄래야 줄 수가 없고, 받을래야 받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도(濟度), 즉 성불(成佛)과 깨달음이란 사람 사람들이 본래로 갖추고 있는 것이며 
개개인이 완전 무결한 상태입니다.
누구의 첨삭(添朔)이나 가감(加減)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털끝만큼도 보태주거나 덜어내어 줄 수 없습니다.
또한 중생들을 제도한다고 하나, 본래 중생이란 없습니다.
오직 우리들 안에는 부처만 있을 뿐입니다.

설사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부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제도할 뿐입니다.
다른 사람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본성(本性)은 언제나 청정(淸淨)하며 적적(寂寂)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번뇌 망상(煩惱 妄想)을 제거하여 청정하게 할 일이 없으며, 동요하는 

것을 붙들어 새로이 적적하게 할 것이 아닙니다.


◐육조 혜능(六祖 慧能) 스님은  일체 만법이 자신 안에 있음을 깨닫고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그동안 중생으로서 번뇌에 물들고 더럽혀진 것으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정말 훌륭하고 청정한 것이구나, 나는 태어나고 죽고 하는 고통의 존재인 줄 알았는데 
실은 태어난 적이 없으며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영원불멸(永遠不滅)한 존재구나.
나는 가난하고 무식하고 지지리 못난 사람으로 알았는데 
사실은 모든 학식과 지위와 명예와 부귀를 다 구족하고 있구나.
그리고 나는 누구의 힘에 의하여 만들어진 존재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創造)한 바로 그 사람이구나."

임제(臨濟?-876) 스님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행자들이여, 다른 곳에서는 '도를 닦는다'고 하며 '법을 닦는다'고 한다.
여러분들에게 말하노니, 무슨 법을 깨달으며 무슨 도를 닦는단 말인가? 
여러분들이 지금 쓰고 있는 데서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후배인 못난 중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하고 중생은 부처님께 제도를 받는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나는 부처니 비굴한 생각 열등한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남들 또한 부처니 부처로 인정해 주고 
존경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대승에 있어서 가장 바르고 으뜸이 되는 '대승정종'인 것입니다.

대승(大昇)의 바른 종지(宗旨), 즉 불교에 있어서 가장 큰 가르침이고 가장 으뜸이 되는 가르침이며 
가장 바른 가르침이라는 칭송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다름아닌 '실무(實無)' 라는 바로 

이 대목에서 길이길이 빛나고  정종(正宗)이라고 받들어질 숙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 사람들의 참다운 생명이자 불교의 생명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참 생명을 망각하는 일입니다.

실무(實無)라는 이 대목이야 말로 불교의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이해하고 
자신의 참 생명의 가치를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잘 지녀야 합니다.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상(相)'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소견이나 인식, 또는 번뇌가 '생각 상(相)'의 상태를 지나 

어떠한 고정된 형상처럼 너무나 견고하게 우리 내부에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반야의 보검으로써 과감히 잘라버려야 할 네 가지의 전도(顚到)된 소견입니다.

'아상(我相)'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것, 또 나라고 하는 집착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와 사건을 말합니다. 
그 나름의 자만 의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자기에 대한 자존심을 건드리면 발끈하는 것이 보통 우리들 수준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그것을 참지 못합니다. 
그게 자만심입니다. 
근본은 있는 것이 아닌데 마음 속에 생긴 병인것 입니다.

'이상(我相)'은 나 외의 '남이다' 하는 차별에서 생기는 배타 의식이나 차별 의식을 말합니다. 
내 것만 좋고 내 소견만 옳다 하며 남의 의견, 남의 종교 다 물리칩니다.
'중생상(衆生相)'은 우리는 못난 존재라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힌것을 말합니다. 
이것도 큰 문제입니다. 
어디 우리가 중생이기만합니까. 
방금 배운 것처럼 우리는 부처의 바탕을 가진 중생인 것 입니다. 

겉포장은 중생인지 몰라도 속은 고스란히 부처인 것입다. 
그러니 열등의식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들이 다 부처다 우리들 내부에 있는 불성을 찾아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수자상(壽者相)'은 
나이에 대해 편협된 집착 즉 나는 지금 몇살이다. 
젊었다 늙었다 또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는 존재이다. 하는 한계의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자신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장애(障隘)가 됩니다.

아상의 번뇌를 통해 인상이 나오고 또한 중생상, 수자상이 차례로 나오게 됩니다. 
사실 아상은 매우 미세한 번뇌로서 끊임없이 노력을 해도 완전히 떨쳐버리기가 참으로 어렵니다. 
어느 순간에는 떨쳐버렸는 줄 알았다가도어느새 또 나에 대한 집착, 
상대에 대한 고정관념이 자리잡게 됩니다. 
그러나 중생상, 수자상으로 갈수록 갈수록 거친 번뇌라 비교적 상에서 벗어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불자라면 적어도 중생상, 수자상은 떼어놓고 적극적으로 살아가길 권합니다.

우리들은 참생명에 대한 신념(信念)과 이해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못난.중생이라고 

낮추어 생각합니다. 
우리들 자체는 불성인간(佛性人間) 그대로이고, 그렇게도 내 생명은 부처님의 
무량공덕생명(無量功德生命) 그대로이며, 우리들 내부에 온갖 만행만덕(萬行萬德)을 
다 갖추고 있다 하여도 흔히들 '나는 업보(業報) 가 많고 업장(業障)이 두터워 무엇이 안돼.'하고 
부정적인 생각즉 중생상에 빠져 있기 쉽습니다.

요즈음, 대기업의 입사 시험에서는 지능지수보다는 의욕지수(意慾指數)를 더 중요시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실력은 좀 떨어지더라도 의욕이 크면 그 사람은 성공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의욕은 바로 원력(源力)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불성 인간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원력을 갖고 무한히 나의 참 생명력과 가능성을 
남김없이 활용하여 성취해가는 것입니다.

서양의 심리학자들이 말하길"20세기의 심릭학에서 최대의 발견은 우리들 잠재의식(潛在意識)의 

발견이다"라고 하는데 그 설명을 보면 그대로 불성의 설명이고 우리들 마음의 무한한 힘과 가능성, 
우리들의 진실 생명의 위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믿고 활용하여 바라는 것을 성취해 가야 합니다.

업(業)타령은 진정한 불교인이 절대로 할 것이 못됩니다. 
업을 극복해 가야하고 팔자도 극복해야 하고 인연조차도 힘차게 극복해가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중생이라고 생각하면 중생 행동밖에 못하는 것이고 
부처라고 생각하면 저절로 부처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본질적으로 나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마음자리가 진실한 삶이라면 마음은 나이를 먹지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마음자리에는 
"천지보다 먼저 되었으되 그 비롯함이 없고, 천지보다 뒤에까지 있으되 그 마침이 없다.
(先天地而無基始 後天地而無基終)"라고 하였으니 어디를 도막내어 몇살이다 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생(生)만을 기준으로 해서 '젊다', '늙다', '몇 살이다'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10세 소년이 전생(前生)의 나이까지 합쳐 60세 노임보다 더 나이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에 어디 나이가 있겠습니까?
그게 우리의 참모습입니다.
옛날 '구자불성(拘子佛性)'으로 유명한 조주 스님은 120세 까지 살았습니다.


제자들이 여쭈어 보았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어떻게 그토록 오래 사실 수가 있으십니까?"
"나는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하루 24시간에 부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24시간을 부린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나이나 시간에 부림을 당하지 않으면 늙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영원히 젊게 살고 무엇에든지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좀 돕자."고 하면"이 나이에 무얼 해. 젊은 사람들이나 하도록 내버려 두지."
하며 뒤로 물러나고 안으로 숨으려 듭니다.
젊은 아이들만 봉사 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남을 위해 무엇인가 도움이 되고 작은 한모퉁이라도 비추는 

등불이 되고저 노력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당장 시간과 정성을 쏟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좀 주책없다 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용기를 내어 열심히 작은 한 모퉁이를 비추다 보면

 차츰차츰 더 넓은 곳,더 많은 사람을 비추게 됩니다.
적어도 불교인이고 보살이라면 최소한 나이에 대한 고정 관념을 떨쳐내고 
적극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의상대사께서는 법성게(法性揭)에서 '파식망상필부득(파息妄想必不得)'즉

"망상을 쉬지 않을래야 쉬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처럼 불교를 통해서 우리의 참생명을 바르게 이해하면 본래로 없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을 낼래야 낼 수가 없고 번뇌도 저절로 쉬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력(願力)과 생명력(生命力)이 넘치는 반야의 삶을 펼쳐 보이는 보살의 인생, 
부처의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