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육 정신희유분(第六 正信希有分)◑
◐제6분 바른 믿음은 회유하다
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수보리 백불언 세존 파유중생 득문여시언설장구
生實信不
생실신부
佛 告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後五百歲
불 고수보리 막작시설 여래멸후후오백세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유지계수복자 어자장구 능생신심 이차위실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당지시인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 이종선근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聞是章句
이어무량천만불소 종제선근 문시장구
乃至一念生淨信者
내지일념생정신자
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수보리 여래 실지실견 시제중생 득여시무량복덕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하이고 시제중상 무부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無法相 亦無非法相
무법상 역무비법상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着我人衆生壽者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즉위착아인중생수자
若取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非法相
약취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하이고 약취비법상
卽着我人衆生壽者
즉착아인중생수자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시고 불응취법 불응취비법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이시의고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法尙應捨 何況非法
법상응사 하황비법
우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좋아하여 믿고 따르나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드뭅니다.
더 더욱 이렇게 다양하고 빠르게 변해가는 이 시대에 있어서
올바른 믿음을 갖기란 참으로 힘들고 귀합니다.
부처님께서 진리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드러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어렵고 희유한지도 모릅니다.
모양다리에, 법(法)에, 나아가 법 아닌 것에도 매달리지 않고 무한히 자유롭게
자신의 내면을 꽃피워 가는 보람은 진실로 즐거운 일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저 것은 부처가 아니다. 그러므로 눈앞에 있는 저 모든것 은 다 부처이다."
이와 같은 이치를 바로 알고 바로 믿는 것은 정말로 기쁘고 희유(希有)한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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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가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수보리 백불언 세존 파유중생 득문여시언설장구
生實信不
생실신부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서진실한 믿음을 내오리가?"
이와 같은 말씀이란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제5에서 말한 제일 사구게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若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입니다.
수보리는 그 당시 보통사람들의 의식수준을 대변하여 부처님께 의문나는 점을 여쭈어봅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상이 분명히 있는데 허망하고 덧없다고 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모양다리 너머에 부처가 있다니 그렇게 볼 안목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왜 이런 말을 수보리가 하였느냐 하면 초기 불교 당시에는'있다'즉'상(相)'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괴로움(苦)이 있고,
괴로움의 원인(集)도 있으며,
괴로움의 소멸(滅)도 있으며,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道)도 있습니다.
이렇게 있는 것을 있다고 하는 사상은우리들의 일반적인 상식과 잘 통하여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러한 시대 상황에서 아무리"모든 상이 있는 것은 허망하다.
상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 부처이다."라고 하여도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있다'는 의식을 깨뜨리기 위해 21년간이라는 긴 세월 동안 600권의 반야부를 설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그동안 하도 많이 들어와서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라고 쉽게 말은 하지만 마음 깊이 공감이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버젓이 우리의 육신이 있고 온갖 마음 작용이 다 있는데"형상은 허망하고 없는 것이다." 하는 것을
누가 쉽게 믿으려 들었겠습니까.
그 당시 의식 수준으로 보아서는 혁명과 같은 소리였습니다.
수보리가 부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서가 아니라 다른 제자들을 위해 그 시대의 생각을
대변하여 물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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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 告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後五百歲
불 고수보리 막작시설 여래멸후후오백세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유지계수복자 어자장구 능생신심 이차위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런 말 하지 말아라. 여래가 멸도한 뒤 후오백세에도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가 있어서
이 말씀에 능히 믿는 마음을 내고 이로써 실다움을 삼으리라."
부처님께서는 진지한 구도자로서 문제를 제기하는수보리에게 안심을 시킵니다.
부처님이 생존하셨던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부처님이 열반(涅攀)에 드신 뒤 제 오백년,
즉 25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계(戒)를 지니고 복을 닦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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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말을 듣고 상 너머에 있는 진실을 이해하여 청정한 신심을 내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계(戒)의 기본 원형은 불˙법˙승(佛˙法˙僧)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수행하는 데 있습니다.
"저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을 따르는 스님네들에게 귀의하였으니
다른 종교, 다른 가르침, 다른 무리들은 따르지 않겠습니다."하는 약속입니다.
점점 단체가 커지자 그것이 더욱 세밀해져서5계, 10계,48계,심지어 팔만위의계(八萬威儀戒)로
확대 발전되었습니다마는 사실로 맨 처음에는 부처님을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잘 왔다. 내 제자여(善來 以丘)"라 한 것이 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부처님 열반 후 오백년 단위로 묶어
제 일, 제 이, 제 삼, 제 사, 제 오 오백년이라고 합니다.
제 일 오백년은 해탈(解脫) 견고,
제 이 오백년은 선정(禪定) 견고,
제 삼 오백년은 다문(多聞) 견고,
제 사 오백년은 탑사(塔寺) 견고,
제 오 오백년은 투쟁(鬪爭) 견고 시대로 합니다.
불교 역사를 볼 때 부처님 생존시나 열반 후 오백년까지는 마음의 해탈을 얻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뒤에는 선정에 드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인도의 달마(達磨) 대사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고 우리 나라에도 선풍(禪風)이 들어 왔습니다.
그 다음 오백년 동안에는 학문 불교가 발전하여 불교에 관한 사상이 형성되고,
여러 종파가 생기게 되었으며, 경도 많이 간행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로 치면 통일신라 시대, 고려 시대에 해당 되겠습니다.
사찰에서 간행한 사간 장경(寺刊 藏經)이나 나라에서 대대적으로 힘을 기울여 간행한
국간 장경(國刊 裝經)이 지금도 자랑스럽게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뒤에는 불사(佛事)에 치중하여 절 건물을 크게 짓고 값나가는 것으로 장식을 하고
탑이나 불상도 으리으리하게 많이 주조하였습니다.
마지막 오백년인 후 오백세 즉 우리들이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투쟁 견고 시대라 하는데 타종교아의 갈등,
불교 내부에서의 분규, 불교 사상 논쟁 등 많은 문제가 표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요즈음을 말세(末世)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치문(緇門)」에
'만사무우 일심위도(萬事無憂 一心爲道)'라 하였는데 정말 바른 믿음을 갖고 올바르게 수행하기가
어려운 시대이기도 합니다.
이 구분은 어떤 절대적인 잣대가 아니고 대개 시대별의 주류를 이루는 어떤 특징적인 현상을 말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탑사도 있었고 투쟁도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종제인 제바달다는 부처님을 항상 괴롭히고 당시의 교단을 분열시키는 등 투쟁을 전문으로
하기도 하였습니다.
투쟁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에도 선정을 닦고 해탈을 이루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것을 흔히들 미래세에 대한 부처님의 예언으로도 간주합니다마는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불교를 믿고 공부해 가는 신행(信行)의 과정으로 제 오 오백년에서 제 일 오백년으로
거슬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투쟁 견고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눈앞의 이해 타산과 오감에만 지극히 집착하여
인과 응보의 원리도 모르고 살아가는 이기적인 삶을 말합니다.
그러다가 '이것이 바람직한 나의 삶의 모습일까.
또 다른 인생길은 없을까."하는 인생에 근본 문제에 눈을 뜨게 되어 절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절 짓는 데 보시하면 복(福)받는다'하여 열심히 동참합니다.
기와에 이름을 써올리기도 하고 서까래를 맡기도 하는 등 거금을 기꺼이 보시하고는
복 받을 것이라고 흐뭇해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규모는 작지만 개인에게 있어서 탑사인 것입니다.
이런 기회를 여러 번 갖게 되다 보면 '나도 이제 부처님 말씀을 좀 알아야겠다.
그래 가지고 남에게도 무상 무비(無上 無比)한 좋은 진리를 전해야겠다'하는
생각이 들어 부지런히 법회에 참석하고 법문 녹음 테이프도 구해 들으며
경을 열심히 공부하게 됩니다.
스님도 열심히 친견하러 다닙니다.
이렇게 하여 삼천 년전의 부처님과 직접 대화를 하는 격이 됩니다.
불교에 관한 지식과 이론이 해박해지고 남에게 포교도 잘 합니다.
이것이 다문(多聞)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외부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나와 불법의 진면목을 알고저 하는 결의가 생기면서 투철한 정진력으로 기도, 염불, 참선에 들게 됩니다.
그리하여 '나의 진실 생명이 과연 그 무엇일까.
진정한 우리 인생길이 무엇일까.
온 우주의 근본자리는 무엇일까'하는 근원적인 물음에 침잠하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화두를 쓰고 독송하는 것도 선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기 위해 경을 공부하는 것은 다문(多聞)이지만 그냥 열심히 열심히 경을 서사(書寫),
독송(讀誦)하는 것은 선정(禪定) 차원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는 내 아이의 입학을 위해 기도했지만 이제부터는 내 아이의 성불을 위해
또 내 마음을 닦기 위해 기도하겠다.'고 하는 것도 바로 선정입니다.
또는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을 일심으로 불러 선정에 들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좋습니다.
이러한 선정이 깊어지다 보면 드디어 생사가 두렵지 않게 되고, 모든 문제와 번뇌, 고통에서
시원하게 벗어나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자유자재한
해탈의 경지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스님에게도 적용시켜 볼 수가 있습니다.
투쟁 시대라고 하는 것은 스님네들이 출가하기 전의 세속적인 삶을 말합니다.
출가한 후 맨 처음 하게 되는 일은 행자(行者) 과정에 있으면서 절 집안의 온갖 궂은 일을 다 맡아 합니다.
이러한 탑사 시대를 거치고 나면 강원(講院)에서 경전 공부를 합니다.
바로 다문(多聞)에 해당됩니다.
그 다음은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하여 어느 정도 경전 공부가 끝나면 선방을 다니면서 참선(參禪) 수행을 합니다.
그 다음 해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가 비록 투쟁견고 시대인 제 오 백세라고 하더라도 우리 신도님들인 스님네들이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느야 하는 것은 각자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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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당지시인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 이종선근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聞是章句
이어무량천만불소 종제선근 문시장구
乃至一念生淨信者
내지일념생정신자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나 두 부처나 셋, 넷, 다섯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모든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오랫동안 또는
한 순간만이라도 깨끗한 믿음을 내는 사람이니라."
요즈음 삼천불 혹은 만불을 모셔 놓은 법당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 부처, 두 부처 내지 천만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꼭 조건과 격식을 갖추어 법당 안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이나 경전에 명기되어 있는 부처님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범어로 된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첫머리가 '일체지자(一切智者)에게 귀의합니다.
〔나막 사르바 진야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의 일체지자가 바로 한량 없는 천만 부처님입니다.
소견이 트이고 깨달아서 참된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모두가 부처이고 지자입니다.
우리들 곁에서 우리들 마음의 밭을 일구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분이 바로 나의 선지식(善知識)이고 부처님입니다.
반대로 나 또한 남의 선지식이 되어야 하니 진정한 지혜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소견으로 널리 부처님을 구하는 것이 우리 대승(大乘)학인들의 도리라 할 것입니다.
'모든 선근(善根)을 심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진리와 착한 인연을 맺어 왔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는 훌륭한 스승을 친견하여 공양을 올리고 일상의 여러 가지 잔심부름을 도와드리는 것에서부터
더 깊게는 가르침을 따르고 음미하여 우리들이 지나치게 이상을 쫒게 되거나 아니면 허무주의의
당착에 빠지게 된다든지 또는 현실주의에 집착하여 세속 욕락에 안주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우리의 삶을 바르게 사는 힘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들 인생이 순간순간마다 깨어있는 삶의 길이라면 더욱 더 좋겠지만 '한 순간만이라도
' 올바른 견해에 대하여 바른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것은 모든 선지식(善知識)을 섬긴 공덕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금강경』을 배우고 외우는 공덕도 우리들이 미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과거 어느 순간에 여러 선지식을 극진히 잘 섬겼기 대문입니다.
이렇게 바른 믿음을 만나 이해하고 도반들과 함께 부처님의 깊은 뜻을 음미하는 희유(希有)한 공덕을 얻게 된것은
옛날에 우리들이 지어놓은 공덕의 결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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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수보리 여래 실지실견 시제중생 득여시무량복덕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보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렇게 한량없는 복덕을 얻느니라."
한 부처, 두 부처, 한량없는천만 부처님 처소에 선근(善根)을 심은 모든 사람과 또 이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공덕,
그 인생의 가치와 보람을 부처님께서 다 알고 다 보고 있습니다.
흔히들 정의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외롭고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여기거나 의기소침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여래(如래來)가 다 알아 줍니다.
법당에 앉아 계시는 부처님이나, 3000년 전에 이 땅에 둘도 없는 큰 스승으로 오셨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알아 주시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가까이 있는 바르게 눈뜬 사람은 다 알아 줍니다.
설사 알아 주는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조금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그 가치와 보람을 이미 잘 느끼고 있고, 또 자신이 지어 놓은 공덕이
다른 사람에게 옮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웅장한 산에 빽빽히 들어차 있는 숲에서 나무 한 그루만 배어 내어도 그 영향이 산 전체에 미친다고 합니다.
반대로 묘목 한 그루를 심어도 산 전체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미미한 것 같지마는 한 사물은 다른 사물에 확실하게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거처럼 우리 눈에 선뜻 드러나지느 않겠지만 내가 심어놓은 선근 공덕은 어딘가에 분명히 좋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인시복전(人是福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복밭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심고 일구어 놓은 복에서모든 선(善)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누군가로부터 감사의 마음을 계속하여 받게 됨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달리 누가 알아 주고 알아 주지 않는다고 하여 서러움이나 외로움을 느낄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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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하이고 시제중상 무부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無法相 亦無非法相
무법상 역무비법상
"무슨 까닭인가. 이 모든 중생은 다시 아상, 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으며 법 아니라는 상도 또한 없느니라."
지금까지 우리 모든 중생들이 고쳐야 할 병통으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의 사상(四相)을 이야기해 왔는데
여기서 두 가지의 상이 더 첨가됩니다.
그것은 '법이라는 상〔法相〕'과 '법 아니라는 상〔非相〕'입니다.
나라고 하는 데에 대한 집착과 고정 관념, 남이다 하는 데에 대한 내 나름데로의 인식,
이런 틀에 박힌 생각은 정말 옳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중심으로 판단한 것이지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이 나를 이해하는 것을 비춰 보면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남이 나를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전혀 사실과 같지 않게 나를 보고 있습니다.
왜 그렇느냐 하면 상대방도 또한 자기 중심에서 나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중생들의 고치기 어려운 고질적인 병통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세계에 대한 깨달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상(四相)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고도의 지혜를 얻은 나에 대한 집착, 상대방에 대한 잘못된 소견, 중생이라는 열등 의식,
나이로 인한 한계 의식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깨달았거나 삼라만상에 대한 실상을 보았을 경우 그것이 집착으로 남아 있기 쉽습니다.
진리에 있어서는 그 집착마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진실의 세계에 눈을 바르게 뜬 사람은 '나는 도를 얻었다'하는 생각마저 없습니다.
아직 그것이 남아 있다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떨어졌는지 모르겠으나 법상(法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법(法) 아니라는 상'을 고집하는 것도 법이라는 상에 집착하는 것과 같같습니다.
'~이 아니다'를 고집하는 것은' `~이다에' 집착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법상과 비법상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게 되면 그야말로 『신심명(信心銘)』의 한 구절처럼
"원동태허 무흠무여(圓同太虛 無欠無餘), 원만하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이 없고 남음도 없도다."하는 경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허공처럼 툭 트여서 크고 시원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정말 허공에는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빌딩이라도 세울 수 있고 비행기도 지나가고 태풍도 거침없이 지나갑니다.
또한 허공은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남는다'는 것도 별로 좋은 것이 못됩니다.
본질적으로 남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디에 모자라는 것이 있으니까 또 어딘가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통 하나로만 통해 있는 태허공(太虛空)이 넓은 곳이라고 해서 남고, 좁은 곳이라고 해서 모자라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이와 같이 나라는 집착, 남이라는 의식, 못났다는 열등감, 이나이에 하는 한계 의식, 진리를 체득하였다는 고집,
진리가 아니다 하는 데에 대한 분별심을 다 떨쳐버렸을 때에 넓디 넓은 태허공(太虛空)처럼 하나가 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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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着我人衆生壽者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즉위착아인중생수자
何以故 若取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若取非法相
하이고 약취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약취비법상
卽着我人衆生壽者
즉착아인중생수자
"무슨 까닭인가, 이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게 되나니,
무슨 까닭인가,
만약 법상을 취하더라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며, 만약 법 아닌 상을 취하더라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는니라."
평형(平衡)을 이루고 있는 저울에 파리 한 마리가 앉아도 균형이 깨어져 저울이 기울어집니다.
그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이 어디에 조금이라도 기울면 상을 취하게 되어 편견(偏見)이 생깁니다.
진리가 아니다 하는 의식에 집착하게 되면 바로 그 자리에서 편벽이 생겨 문제를 다발적으로 야기시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중생들이 겪는 아픔이나 상처, 심지어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葛藤)은 집착을 떠나서
생기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자기의 입장에서 고집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도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하여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사물을 바로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집착에서 오는 편벽을 없애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상을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나만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고려해 보면 이해가 생기고 자연스럽게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지닌 가치와 존엄성을 진실로 이해할 수 있고 그 기능과 능력을 힘껏 발휘할 수 있습니다.
『금강경』 은 시종일관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말고 시원스럽게 살것을 가르칩니다.
그야말로 무상(無相)으로 근본을 삼고 무주(無住)가 주체가 되어 무위(無爲)에까지 이르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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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시고 불응취법 불응취비법
"이러한 까닭으로 응당 법을 취하지 말아야 하며 응당 법 아님도 취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옛날, 시집가는 딸에게 흔히 일러주는 말로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 하지 말라."
얼핏 들으면 상식에 맞지 않는 말 같지만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지 말랬으니 좋지 않은 일은 말할 것도 없이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법상도 취하지 말라고 하는데 비법상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불법을 통하여 사상(四相)은 어느 정도 극복이 되어 큼직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예기치 않았던 법상이라는 병통이 생깁니다.
이것은 사상(四相)보다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법이라는 것도, 법 아니라는 것에도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각자의 무궁무진한 본성을 깨달아 신선한 아이디어로 주어진 삶을 바람직하게 열어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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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是義故 如來 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이시의고 여래 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法尙應捨 何況非法
법상응사 하황비법
이런 까닭으로 여래가 항상 말하길,"너희들 비구는 나의 설법을 뗏목으로 바유함과 같음을 알라고 하노니
법도 오히려 은당 버려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법 아님이겠는가."
우리 중생들은 가지가지 집착이 생기는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항상'말씀하십니다.
자신의 기분이 평소와 다르거나 제자가 잘 못 알아들을 때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을 편 뒤에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깨달아 가르치는 말씀을 뗏목처럼 알라는 것입니다.
이 짧은 구절은 불교의 경지와 안목을 여러 가지로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뗏목은 강을 건너는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지만 강을 건너가 버린 뒤에는 필요없는 물건이 됩니다.
강을 건너는 데에 꼭 필요하고 또 너무나 고마웠다고 하여 강을 건너고 난뒤에도 계속하여 소중하다고 무거운 뗏목을
어깨에 메고 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더 없이 크고 높은 부처님의 설법의 중요성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 우리들의 본성(本性)을 바르게 깨달아 우리들 삶을 바람직하게 가꾸어가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법도 뗏목처럼 여기고 우리들 자신이 삶을 주인공 되어 우리들 본바탕을 한껏 꽃피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밥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밥을 먹어서 힘을 내어 나의 생명을 유지하여 살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에서 불교가 얼마나 고도의 지성(知性)을 가진 종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중교는 "나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어라.
나를 길로 알고, 빛으로 알며 진리도 알아라.
나 의외의 것은 결코 신봉해서는 안 된다."하는 권위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부처님 스스로 "내 설법을 뗏목처럼 알아라."는 것입니다.
전혀 상식이나 논리에 맞지 않고 고도의 문명 시대에도 맞지 않지만 "나를 믿어라. 그렇지 않으며 지옥이야."라고 하면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잘 따라하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지성이 높은 사람은 픽 하고 웃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카리스마적인 절대 권위가 대번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런 절대적인 권위로 진리를 무너지게 한 말이 그 어느 경전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불교가 중구 난방이고 결속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개개인 모두가 다 똑같은 부처이니
이렇게 밖에 달리 산 진리를 나타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들은 남보다 조금이라도 지식이 더 있을 것 같으면 자신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려는데 부처님께서는
그 엄청남 깨달음을 남김없이 다 쏟아 놓으시고도 버리라는 말씀을 항상 하셨던 것입니다.
법에대한 집착이 깨달음에 결정적인 장애가 되기 때문에 스스로 항상 뗏목처럼 알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구절 하나에서도 불교의 특색이나 사상, 불교가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진면목을 느낄 수 있고
타종교와 비교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경전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의미깊게 음미할 줄 아는 안목을 경안(經眼)이라고 합니다.
또 왜 부처님께서는 뗏목을 비유로 들었는지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몇십 년 동안의 긴 세월을 갠지스 강 유역을 기점으로 하여 교화 활동을 펴셨읍니다.
그러므로 제자들과 함게 자주 이용한 뗏목을 비유로 들면 제자들이 쉽게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조그만 것에도 세심하게 배려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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