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무비스님의금강경강의] 제구 일상무상분(第九 一相無相分)

qhrwk 2023. 5. 16. 21:35

◐ 제구 일상무상분(第九 一相無相分) ◑

◐제9분 하나의 상도 아님

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수다원  능작시념  아득수다원과부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수다원 

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명위입류  이무소입  불입색성향미촉법  시명수다원

須菩提  於意云何  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사다함  능작시념  아득사다함과부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斯陀含  名一往來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사다함  명일왕래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이실무왕래  시명사다함

須菩提  於意云何  阿那含  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아나함  능작시념  아득아나함과부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阿那含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아나함 

名爲不來  而實無不來  是故  名阿那含
명위불래  이실무불래  시고  명아나함

須菩提  於意云何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수보리  어의운하  아라한  능작시념   아득아라한도부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實無有法 名阿羅漢  世尊  若阿羅漢  作是念
실무유법 명아라한  세존  약아라한  작시념  

我得阿羅漢道  卽爲着我人衆生壽者
아득아라한도  즉위착아인중생수자

世尊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  最爲第一   
세존  불설아득무쟁삼매인중  최위제일

是第一 離欲阿羅漢  世尊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시제일 이욕아라한  세존 아부작시념  아시이욕아라한

世尊  我若作是念  我得阿羅漢道  世尊  則不說須菩提
세존  아약작시념  아득아라한도  세존  즉불설수보리   

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提 實無所行  而名須菩提 
시요아란나행자  이수보리 실무소행  이명수보리

是樂阿蘭那行 
시요아란나행


부처님의 깨달음, 
부처님의 설법,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킨 
『금강경』을 반야의 거울에 비추어 보았더니 
그 무엇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텅 비어 적적(寂迹)하였습니다.

불성의 실다운 모습은 모양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도 무상(無相)이고 저것도 상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수행(修行)의 결과는 
이 실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보살, 부처가 다 
이 실상 반야의 현현(顯現)이라면 
결과의 모양이 있을 수 없으며 
얻었다는 마음의 흔적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도 무상이고 저것도 무상이면 최후에 
'무상이라는 상'은 진실이겠네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마는 
그 '무상 이라는 상'도 끝가지 상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수다원  능작시념  아득수다원과부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수다원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 하는가."

지금까지는 부처님의 깨달음, 설법, 
『금강경』을 반야의 거울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이제는 수행자와 수행의 결과도 그렇게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의 수행의 수준 단계를 
하나하나 반야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소승(小乘)불교에서는 
성자(聖者)가 되는 단계를 대개 네 단게로 구분하였는데 
이 모든 것을 다 부정해 보이면서 
수행에 의해 깨달음을 이루었다 하는 상을 털어 냅니다.

먼저 소승 네 단게의 첫째 단계인 수다원을 살펴 봅니다.

첫째 수행 단계인 수다원을 수행하여 
수다원과를 얻은 사람이 
스스로 "나는 수다원과를 얻었다."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고 부처님께서 물었습니다.

소승 불교에서는 수행의 단계를 네 단계로 보지만, 
대승 불교에서는 오십이 단계로 세밀하게 나눕니다.

『화엄경』을 보면 
우리들이 깨달음을 얻어가는 단계를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오십이위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부처님을 만나서 
부처님을 따르고 믿는 것이 열 단계이고 
그것이 지나면 불법 안에 완전히 정착하게 되는데 
그것도 열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깊어지면 저절로 구체적인 실천이 나옵니다.

나는 보현보살행을 할 것이다. 
나는 관세음보살행을, 
나는 지장보살행을 할것이다.'하는 
서원을 세워 실천해 갑니다.

그러다가 좀 더 경지에 깊어지면 
회소향대(廻小向大)하여 
보다 높고 깊은 세계로 들어가 진실한 회향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는 내 아이의 입학을 위해 기도했지만 
이제부터는 그들의 성불을 위해 기도하겠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큰 다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단계가 더욱 깊어지면 
우주와 삼라만상의 진리와 실상을 바로 보게 되는 
지혜가 뚫리게 됩니다.

이 과정들이 각각 열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 지위가 지나면 거의 성불에 이르른 
등각(等覺)의 단계에 이르게 되고 
드디어 깨달음을 얻어 불지위(佛地位)에 오르는 
묘각(妙覺)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체 오십이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큰 스승 원효대사는 흔히 팔지 보살이라고 합니다.

또, 요즈음 소설이나 영화로도 유명한 
『화엄경』중 「입법게품」에 나오는 
선재(善財)동자가 오십삼 선지식을 찾아가는 과정은 
바로 이 대승 오십이위를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게 되니 
결국에 오십이 선지식을 만나게 되어 
바로 이 대승 오십이위를 실천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한 선지식을 만나게 될 때마다 
한 단계 나아가는 것입니다.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수다원 

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명위입류  이무소입  불입색성향미촉법  시명수다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수다원을 입류라 하지만 
들어간 바가 없으니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이를 이름하여 수다원이라 하옵니다."

수다원은 범어로서 입류(入流)라는 뜻입니다.
또는 성류(聖流), 예류(預流)라고도 합니다.

말 그대로 성자의 무리, 
수행자의 무리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말하자면 불교에 입문했다.
경전 공부에 발심했다. 
기도에 동참했다. 하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안, 이, 비, 설, 신, 의를 통해 인식하는 
색, 성, 향, 미, 촉, 법의 객관에 들어간 
흔적이 있는 것이 아니니 
최초의 수행 단계에 올랐다 하더라도 
그 올랐다 하는 마음의 때가 있으면 
수다원과를 얻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우리들에게 맞추어 이야기할 것 같으면 
진정한 불교에 입문했다하여 
불교인이다 하는 의식이 남아 있으면 
진정한 불교인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불교에 입문했다고 하지만 
무엇이 어디에서 어디로 들어갔다고 하겠습니까.
불교와 세속의 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삼귀의를 했다고 하지만 
그것을 문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불상을 보았으니 눈이 들어갔다고 해야 할지, 
향 냄새를 맡았다고 코가 들어갔다고도 할 수 없고, 
부처님 명호를 불렀다고 입이 들어갔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등신불에 절했다고해서 
신체가 들어갔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들어갔다는 표현이 참으로 애매합니다.

그러므로 입류(入流)는 입류(入流)로되 들어감이 없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사다함  능작시념  아득사다함과부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斯陀含  名一往來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사다함  명일왕래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이실무왕래  시명사다함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사다함을 얻었다.'하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사다함은 일왕래로되 
왕래함이 없으므로 이름을 사다함이라 합니다."

수행의 둘째 단계 사다함은 일왕래(一往來)입니다.

'한번 갔다온다'라는 뜻인데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사다함에 올랐다 하는 것은 
사람이 천상(天上)에 한번 갔다가 
다시 인간으로서 와서 최후에 아라한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천상에서 사다함이 되었다면 
인간으로서 한 번 왔다가 
다시 천상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왕래해야 그 때 비로소 
아라한과를 얻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사다함이라는 
두 번째 수행의 단계에 올랐다 하더라도 
나름대로 '나는 도를 알았다. 
얻은 바가 있다.'라는 상이 남아 있으면 
사다함과에 올랐다 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실로 없기 때문에 사다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한 십 년쯤 불교를 열심히 믿고 
수행을 하였다고 해서 
'나는 불교인이다.'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 년쯤 정진 했어도 그러한 흔적이 없기 때문에 
십 년쯤 다녔다 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阿那含  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아나함  능작시념  아득아나함과부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阿那含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아나함 

名爲不來  而實無不來  是故  名阿那含
명위불래  이실무불래  시고  명아나함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냐. 
아나함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함과를 얻었다.' 하는가."

수보리가 말씀 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아나함은 이름이 오지 않는다 하오나 
실로는 오지 않음이 없으므로 이름을 아나함이라 합니다."

세 번째 단계 아나함의 사전적 의미는 
'오지 않는다'라고 하는 불래(不來)입니다.

여기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하는 것은 
천상으로 가든지 다른 세상으로 가서 
다시는 여기로 올 필요가 없이 
거기서 아라한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천상에서 아나함과를 얻어 다시는 
천상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오지 않는다.'라는 의미에 맞습니다.

그러나 실로 오지 않음이 없다고 하니 
오지 않는 그런 이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30년 동안 불교를 닦았다 해서 
이제는 불교인이라 해도 되겠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진하면 할수록 얻은바가 더 없어야 하고 
더 흔적이 남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가 되면 진실로 불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님네들 사이에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저 사람은 중물이 안 들었다." 
같은 불문(佛問)에서 호흡을 같이하고 
뜻을 함게 세우려면 수행자의 면모가 나타나야 하는데 
중물이 안 들었다는 것은 아직도 세속의 생활 모습을 
다 일소시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면 
"아직도 중물이 안 빠졌다."라고 의미있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수행자의 무리에서 뛰어나와 
속인이 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중물이 빠졌다는 것은 수행의 연륜이 쌓이고 쌓였지만 
상이 없고 흔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중물이 안 드는 것이 문제이지만 
나중에는 중물이 안 빠지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제대로 중물이 잘 들고 잘 빠져야만 
완숙한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수보리  어의운하  아라한  능작시념   아득아라한도부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實無有法名阿羅漢  世尊  若阿羅漢  作是念
실무유법명아라한  세존  약아라한  작시념  

我得阿羅漢道  卽爲着我人衆生壽者
아득아라한도  즉위착아인중생수자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하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실로 아라한이라 할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입니다."

아라한은 수양을 많이 하여 도가 가장 높은 경지로 흔히 
응공(應供), 무쟁(無諍), 이악(離惡), 
무학(無學)이라고 합니다. 

말그대로 수양을 많이 쌓아 남으로부터 공양을 받을 만하고, 
마음속의 번뇌와 탐진치 망상, 악을 다 떠나보내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성인을 말합니다. 

가끔은 살적(殺賊)이라고도 하는데 
육근을 통하여 우리들의 진성(眞性)을 도둑질해 가서 
우리의 본 마음자리를 흐트려 놓는 것을 
주긴다 하는 뜻입니다.

더 이상의 흔들림이 없어 안팎이 고요하고 
마음과 경계가 함께 텅 빈 상태가 되었으니 
부처가 되었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수행자가 
스스로 내가 바로 아라한도를 얻었다. 

나는 바로 깨달은 부처이다 라고 하다면 즉
각 상에 떨어져 아라한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물질과 삼라만상, 
나타난 현상들, 우리들의 몸과 마음, 
온갖 지식곽 감정들이 다 텅텅비어 공한데 
깨달음이나 수행도 말할 것도 없이 공한 것입니다. 

수행은 그래도 뭔가 있지 않겠는가 한다면 
그 순간 즉각적으로 본래로 있지도 않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에서는 권선징악(券善懲惡)을 강조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손해를 끼치는 
일반적인 여러가지 죄, 악, 업이 
모두 없고 무상하다는 것은 좋은데, 
우리들이 힘들게 노력하여 얻은 
수행이나 지혜 복까지도 없다는 것은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마는 
반야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수행을 하여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 하는 상도 철저하게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초기 불교의 
네 단계 수행 결과를 다 털어 내었습니다. 

수다원,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 모든 가설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행의 상태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없다고 하는 가운데에서도 분명히 수행이 되어 
마음의 눈이 열려 한단계 한 단계 향상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단계뿐만 아니라 
더 세분하여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행은 
'수행'이라는 한 낱말로만 나타내기 송구하여 
십단계로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수행하실 때를 보살이라 하여 
'보살 십지'라 합니다. 

이것이 더 세밀해지면 앞에서 살펴 본 대로 
대승 오십이위가 되겠습니다.

소승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의 네 단계인 이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용어는 인도의 전통 종교인 바라문교의 
수행 용어를 불교에서 빌어 왔다고 하겠습니다.

바라문교에서는 아들이 7,8세 쯤 되면 
출가를 시켜 스승을 만나게 합니다. 
그리하여 바라문교의 기초를 다지게 합니다. 

이것이 수다원, 즉 수행자의 무리에 드는 입류(立流)입니다. 

그 다음의 사다함은 일왕래(一往來)입니다. 

즉 20세 전후가 되면 천상과 같은 출가한 무리에서 
세속의 집으로 한번 돌아 옵니다. 

그래 가지고서는 약 20여 년 동안 환속하여 
생업에 종사하여 재산을 불리고, 
결혼을 하여 자식도 낳아 집안의 대를 잇습니다.

이런 세속적인 삶을 20여 년간 살다가 
40세 전후가 되면 재차 출가를 하여 
다시는 인간 세상으로 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래(不來),아나함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속과는 철저하게 담을 쌓고 
수행을 열심히 해서 아라한의 도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야 
바라문 종족과 종교가 대를 이어갈 수가 있고 
또 개인적으로는, 깨달음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헤르만 헷세는 바로 이 모델에 따라 
소설 '싯다르타'를 썼습니다 


世尊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  最爲第一   
세존  불설아득무쟁삼매인중  최위제일

是第一離欲阿羅漢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시제일이욕아라한  아부작시념  아시이욕아라한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저를 무쟁 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에서 제일이라 하시니,
이는 욕심을 떠난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하심이나 
저는 제가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모든 일반적인 수행자의 문제를 
참된 지혜에 비추어 보았는데 
이번에는 수보리가 자기자신의 예를 
직접 들어 보충 설명을 합니다.

무쟁 삼매(無諍 三昧)란 
우리들 마음 속에 일어나는 온갖 
번뇌와 투쟁, 갈등, 욕망이 일체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가 경(經)을 독송할 때 처음에 외우는 
개법장 진언의 
'옴 아라남 아라다'에서 아라남이 무쟁 삼매입니다.

경을 읽을 때 마음이 고요하고 동요하지 않아야 
경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그대로 들어올 것입니다.

그래서 경을 읽기전에 
'옴 아라남 아라다'하여 
마음 정지 작업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무쟁 삼매를 얻은 수행자들도 각자 단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 수행자들 중에서 
수보리가 제일이라고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수보리 자신은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고 
수보리가 기뻐하였다면 즉각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떨어져을 것입니다.

끝가지 철저하게 하나의 상도 내지 않았을 때 
비로소 무쟁삼매를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욕심을 떠났다는 것은 바로 무쟁과 통합니다.

욕심을 떠나 보내면 마음 속에서 
쓸 데 없는 번민이나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어른으로서 대접받고 싶은 욕망, 
칭찬 받고 싶은 욕망, 
잘 살고 싶은 욕망에 벗어나면 
그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다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삼귀의를 할 때 
'귀의법 이욕존(歸依法 離欲尊)'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법에 귀의하여 욕망과 다툼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해탈을 얻는 것입니다.


世尊  我若作是念  我得阿羅漢道  世尊  則不說 須菩提
세존  아약작시념  아득아라한도  세존  즉불설 수보리   

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提 實無所行  而名須菩提 
시요아란나행자  이수보리 실무소행  이명수보리

是樂阿蘭那行 
시요아란나행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하면
세존께서는 곧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려니와 
수보리가 실로 행하는 바가 없으므로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이름하셨습니다.

아란나(阿蘭那-Aranya)는 
적정처(寂靜處), 무쟁처(無諍處)라는 뜻으로 
수행하기에 좋은 조용한 곳을 말합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고요한 숲이나 들, 
모래밭 같은 곳을 말하는데 
그 곳에서 일체의 경계를 끊어 버리는 
무쟁 삼매의 수행을 하는 것을 
아란나행(阿蘭那行)이라고 합니다.

수보리는 부처님으로부터 
무쟁 삼매를 얻은 사람 중에서 제일이라는 인정과 
또, 욕심을 여윈 아라한 중에서도 
제일간다는 칭찬을 받았습니다만 실로 
그 칭찬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또 아무런 상이 없기 때문에 진실로 아란나행, 
즉 무쟁 삼매행을 즐기는 자라고 할 만합니다.

지금까지 부처님의 깨달음과 설법, 
『금강경』, 수행의 결과, 수보리의 수행까지를
다 궁극적인 지혜의 안목에서 들추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일관되게 맥락이 통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찬탄하는 
그 위대한 것들도 반야의 광명에서보면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적적하여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절에 다니면 절에 다니는 대로의 상, 
또 절에 다닌 연한에 대한 상, 
절 예절을 알면 아는 대로의 상, 
수행을 하면 수행을 했다는 상 등 
온갖 상 투성이에 꽁꽁 매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만 여유를 두고 보면 실존적인 내가 무상인데 
이런 나를 근거로 하여 생긴 것에 
과연 무엇이 참답게 있겠습니까. 

잠깐의 인연에 의해 나타났다가 
다시 흩어지고 말터인데 거기에 집착하여 
상처받으며 한정적으로 살아갈 것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부정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들이 얻고자 하는 복이나 
수행의 열매, 지혜에 대한 기대감. 
이 모든 것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있다'라고 생각하여 끈적끈적하게 매여지낼게 정녕코 없습니다.

도를 깨달은 분들의 소감을 시로 표현한 
오도송(悟道頌)을 보면 
대개가 평상시의 평범한 도리이지 
제대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서산 스님의 시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작야송담풍우악 어생일각학삼성
昨夜松潭風雨惡 魚生一角鶴三聲

간밤에 소나무 푸르른 못에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니
고기들은 한 모퉁이에 살고 있고, 
학이 세 번 울며 날아가도다

이렇게 해석하면 그대로 평상 도리입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비가 심하게 몰아치니 물고기들이 
한 귀퉁이에 몰려 붙어 있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입니다.

또 다음날 날이 새면 
학이 울면서 날아가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생일각(魚生一角)'을 
'고기에 뿔이 하나 생겼다'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깨달음에 대하여 뭔가 기특한 생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못 된다 라고 보아집니다.

그러나 비바람이 몰아치니 고기들이 한데 몰려 
살고 있다는 것은 그대로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평상심이 진정한 깨달음 이라고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