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무비스님의금강경강의] 제십사 이상적멸분(第十四 離相寂滅分)-1

qhrwk 2023. 5. 20. 07:46

 

◐제십사 이상적멸분(第十四 離相寂滅分)◑

◐제14분 상을 떠나서 적멸함

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이시  수보리  문설시경  심해의취  체루비읍
而白佛言  希有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 所得慧眼
이백불언  희유세존  불설여시심심경전  아종석래 소득혜안 
未曾得聞如是之經
미증득문여시지경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則生實相
세존  약부유인  득문시경  신심청정  즉생실상
當知 是人  成就第一希有功德
당지 시인  성취제일희유공덕
世尊  是實相者  則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세존  시실상자  즉시비상  시고  여래설명실상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세존  아금득문여시경전  신해수지  부족위난 
若當來世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약당래세후오백세  기유중생  득문시경  신해수지
是人  則爲第一希有
시인  즉위제일희유
何以故  此人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하이고  차인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無壽者相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무주자상  소이지하  아상  즉시비상 
人相衆生相壽者相  卽是非相
인상중생상수자상  즉시비상
何以故  離一切諸相  則名諸佛
하이고  이일체제상  즉명제불  
佛告須菩提  如是如是
불고수보리  여시여시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不怖不畏  當知是人  甚爲希有
약부유인  득문시경  불경불포불외  당지시인  심위희유
何以故  須菩提  如來設第一波羅蜜  
하이고  수보리  여래설제일바라밀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즉비제일바라밀  시명제일바라밀
須菩提  忍辱波羅蜜  如來說非忍辱波羅蜜
수보리  인욕바라밀  여래설비인욕바라밀    
是名忍辱波羅蜜
시명인욕바라밀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하이고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왕  할절신체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아어이시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주자상
何以故  我於往昔節節支解時  
하이고  아어왕석절절지해시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應生嗔恨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응생진한
須菩提  又念過去 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에 
수보리  우념과거 어오백세  작인욕선인  어이소세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發阿縟多羅三?三菩提이니
시고  수보리  보살  응리일체상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不應住色 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 生心  應生無所住心
불응주색 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 생심  응생무소주심
若心有住  則爲非住  是故  佛說菩薩心  不應住色布施
약심유주  즉위비주  시고  불설보살심  불응주색보시


상은 허망하고 무상하고 영원성이 없어 진실이 아닙니다.
상을 떠난다는 것은 상에서 도피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 무상항 상을 추월하여 꿰뚫어 보면 바로 그 자리에 영원토록 변치 않는 
고요한 적멸의 자리가 있습니다.
일체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의 실상은 적멸할 뿐입니다.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바로 그 자리,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 그 자리가 바로 실상의 자리입니다.
생기지 않으니 소멸해도 하나도 슬플 게 없고, 내려 가지 않으니 올라가도 
기뻐할 것이 없이 일체가 다 평등할 뿐입니다.
본래로 기뻐하거나 슬퍼할 것이 없는 텅 빈 그 곳이야말로 진정으로 즐거운 자리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고 했습니다.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이라는 역대 부처님의 게송을 듣기 위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시절 즉 설산 동자였을때 야차에게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경전에 있습니다.
그만큼 이 게송에 부처님의 진리가 오롯이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이시  수보리  문설시경  심해의취  체루비읍
而白佛言  希有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所得慧眼
이백불언  희유세존  불설여시심심경전  아종석래소득혜안 
未曾得聞如是之經
미증득문여시지경

그때에 수보리가 이 경 설하심을 듣고 깊이 그 뜻을 깨달아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게 사뢰었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게서 이렇게 심히 깊은 경전을 설하심은 
제가 예로붙 얻은 바 혜안으로 일찍이 이와 같은 경은 얻어 듣지 못하였습니다.
오랫 동안 철학과 종교 교리를 다 섭렵하여 학덕이 높고 연세도 많아 장로로 추앙받는 수보리가 
너무나도 감동을 받아 울기까지 합니다.

그동안 눈에 보이는 현상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얄팍한 삶을 살았는데 
이처럼 간단명료하고 시원한 실상의 가르침을 받아 참 모양에 눈을 뜨게 되어 점잖은 수보리가 
희유하다고 하며 눈물을 보이는 것입니다.

오죽 마음에 희열로 차올랐으면 울기까지 했겠습니까.
기쁨이 넘치면 오히려 눈물이 나오는 법입니다.
우리 같은 중생은 부처님의 참뜻을 잘 이해하지 못해 경을 보더라도 잘 울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도하는 우리들의 태도를 한 번 점검해 보도록 합시다.
과연 우리들은 불교를 알기 위해, 부처님의 진실한 뜻을 알기위해 
절실한 기도를 얼마나 올렸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들은 사람 때문에, 명예나 지위 때문에, 돈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에는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정작 절실하게 울어야 할 때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빨래를 하고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느라 바쁘다 하더라도, 안방에서 아기가 "아앙"하고 갑자기 울면 
달려가지 않을 어머니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어머니라도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까짓 밥이 타고 국이 넘는게 중요하겠습니까. 
어머니는 아기가 큰 소리로 울기만 하면 뱀이 나타났는지,불이 났는지 하고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처럼 불교라는 것, 진리라는것,마하반야바라밀이라는 것, 부처님, 관세음보살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절실하게 울기만 하면 순식간에 우리 곁에 와닿습니다.
부처님이 누군지 알기 위해 가슴이 복받치도록 울기만 하면 부처님이 누군지 알기 위해, 
마하반야바라밀을 알기 위해, 내 인생을 알기 위해, 기도를 성취하기 위해 가슴이 복받치도록 울기만 하면 
부처님이, 관세음보살이 무엇을 하고 있다가도 만사 제쳐놓고 달려와 우리의 기도를 이루어 주십니다.
기도 성취 아주 간단합니다.
절실하게 울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제대로 울어 보지도 않고 소원 성취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則生實相
세존  약부유인  득문시경  신심청정  즉생실상
當知是人  成就第一希有功德
당지시인  성취제일희유공덕

"세존이시여,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을 깨달으니, 
마땅히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사람임을 알겠습니다."
수보리는 과거에 사제(四諦), 십이인연(十二因緣)의 복잡한 성문(聲聞), 연각(緣覺)의 도리를 다 섭렴한 후에 
얻어 듣게 된 시원한 『금강경』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습니다.

수보리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이 금강경의 도리를 알아차려 믿는 마음이 훌륭하게 용솟음친다면 그 사람은 곧 
진실한 모습을 보게 되는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희유한 공덕을 성취하게 됩니다.
변화 무상하여 허망하게 흘러가고 그리하여 결국 없어지는 허상에 울거나 웃지 말고,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도리를 제대로 믿으면 정말 변화지 않는 불생 불멸한 진실 생명, 실상(實相)을 깨우치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사물을 바로 보게 되면 바로 판단하게 되고 판단을 바르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실상은 일체 만법의 진실한 상태를 말합니다.생긴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유상하면 유상한 대로, 무상하면 무상한 대로, 항상하면 항상한 대로, 무상하면서 항상하면 무상하면서 
항상한 대로, 항상하면서 무상하면, 또 그런 대로 본래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그러면서도 온 우주에 걸쳐 
평등하게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실상은 천지보다 먼저 있으되 시작이 없고 우주만유보다도 더 뒤에가지 있으되 그 마침표도 없습니다.
그래서 실상은 바로 여기 나이고, 거기 너이며, 그대로 우리들입니다.모든 것의 모든 것입니다.
이 도리를 알아차린 사람이 바로 희유한 공덕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고, 이 자리에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과는 다른 삶의 가치가 확연하게 거듭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世尊  是實相者  則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세존  시실상자  즉시비상  시고  여래설명실상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란 곧 이 상이 아님이니, 이 까닭에 여래께서 실상이란 말씀하셨다."
이 경을 설하는 자리에 부처님과 수보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많은 대중이 함께하였습니다.
함께한 많은 대중이 이 자리에서 실상을 낸다고 하니 또 실상이라는 상을 그릴까 봐 
그 이름이 실상이다 라고 하여 실상에 대한 의식이나 감각까지도 또 날려 버립니다.
그래서 마음에 실상이란 것을 얻었다는 바가 있으면 실상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세존  아금득문여시경전  신해수지  부족위난 
若當來世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약당래세후오백세  기유중생  득문시경  신해수지
是人  則爲第一希有
시인  즉위제일희유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믿어 알고 받아지니기는 족히 어렵지 않거니와 
만약 오는 세상 후 오백세에 그 어떤 중생이 이 경을 얻어 듣고서 믿어 알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함이 되겠습니다.

부처님 생존 당시에는 부처님이 직접 가름침을 펴시니까 모든 제자들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받아 지니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마지막 오백세, 즉 요즈음 시대에도 이 도리를 얻어 제대로 이해하고 믿고 자기 것으로 하여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것은 제일가는 희유한 공덕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각 방면으로 지식이 발달해지므로 각종주의 주장이나 교설이 많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아무리 신심이 청정하게 용솟음친다고 해도 부처님으로부터 긴 세월이 지날수록 
부처님이 본 뜻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수 천 년 듣고서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이 상을 떠나라는 『금강경』의 도리를 듣고서 환희심을 내고 
바르게 이해하여 그 가르침 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제일로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何以故  此人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하이고  차인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無壽者相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무주자상  소이지하  아상  즉시비상  
人相衆生相壽者相  卽是非相
인상중생상수자상  즉시비상
何以故  離一切諸相  則名諸佛
하이고  이일체제상  즉명제불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이 없으며 중생상이 없으며 수자상도 없기 때문입니다.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아상은 곧 이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 수자상도 곧 이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이름하여 모든 부처님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하여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고, 마음 속에 잡히고 생각으로 이해되는 모든 것에서 떠나라고 합니다.
나라는 자존심, 남이라는 차별 의식, 못났다는 열등 의식, 나이에 사로잡힌 한계 의식은 실상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현실에 발판을 딛고 살아가면서 우리 불자들이 수자상 하나만 떼어 버려도 우리들의 삶의 양이 훨신 
많아지고 넓어집니다.
예를 들어 정년 퇴직을 했다 해서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 더 이상 할 게 없다'라고 하면 
진짜로 할 것이 없어지고 보람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정말 내 인생을 살겠다 하는 각오로 다시 청년으로 돌아가 열심히 뭔가를 배우고 
가슴 속을 열의로 채워 보십시오. 몇 곱절의 인생이 될 것입니다.

육체의 연령은 육십대이므로 육십대의 인생은 당연히 사는 것이 아니고, 정신은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로 
폭넓게 넘나들 수 있으니 몇 배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니 '이 나이에 무엇을 하겠느냐'하고 제한적인 생각을 하기 쉽지만, 
참 생명은 나이를 먹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참생명인 마음자리는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입니다.
없앨래야 없앨 수도 없고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마음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없음을 거듭 강조 하겠습니다.
나이가 없으므로 수자상이 날 리가 없습니다.
이토록 우리는 한량없는 존재인데 거기에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분별심을 가질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참생명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가건물(假健物)일 뿐입니다.
알고보면 모두가 평등한 존재입니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는 '무불무중생(無佛無衆生)'인 그 자리에 또 '나다', '너다'하는 차별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사실 '나다', 너다'하는 집착에서 벗어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석해 들어가면 아무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육신이나 물질은 말할 것도 벗고 감정이나 지식, 
인격도 시시각각 변하여 흘러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보금자리인 집도 지붕이나 기둥으로, 문짝이나 마루로 떼어 정리해 버리면 집이랄 것도 없습니다.
또 떼어낸 나무 한 도막도 나무라 할 수도 없습니다.

나무 한 도막은 무수하게 많은 미세한 나무 분자로 되어 있고 그 작은 분자 사이의 공간에는 
다른 물질의 분자가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물질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눈으로 보기에 너무나도 확실한 실체로 자리잡은 물체도 하나하나 분해해보면 
그 무엇도 고정 분변한 것이 아닙니다.

텅 비어 있습니다.텅 비어 있을 뿐인 것인데도 어디에 마음을 붙여 그것밖에 보지 못하고 상처받아 아파할 
까닭이 없습니다.그러므로 우리의 눈에 보이고 마음에 잡히는 모든 상을 떠나는 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이라는 것이 납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간단하지만 정말 그대로 진실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이 보았을 때 이렇게 밖에  나타낼 길이 없는 것입니다.
상에 매여 있거나 빠져 있으면 행동을 보면 아주 파격적인 데가 많습니다.
자장 율사가 문수보살을 뵙고 싶어서 오대산에서 정성을 들여 일보 일배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 노인이 와서는 "자장이 있나. 자장이 있나."하고 산문 밖에서 큰 소리로 
불러 대었습니다.
시자가 아무리 말려도 "나는 꼭 자장을 한 번 보고 가겠다."하길래 자장 스님에게 가서 물어 보았더니 
자장 스님도 "쫓;아 버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노인은"자장이 그런 말을 했다면 할 수 없지."하며 망태기에서 썩은 개를 꺼내 허공으로 던지니 
그 개가 사자로 변하고 그 노인은 문수보살이 되어 사자를 타고 날아갔습니다.

시자의 말을 전해 들은 자장 스님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달려갔지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국 자장 스님은 문수보살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문수보살이라는 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상을 떼어 버려야 제대로 된 보살행이 나옵니다.
상을 갖고 알고 있으면 당장은 어렵더라도 언젠가는 될 때가 있는 법입니다.
여기까지 수보리가 부처님의 진실하신 말씀을 깊이 잘 알아듣고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사는 대목입니다.


佛  告須菩提  如是如是
불  고수보리  여시여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렇다. 그렇다."점잖은 장로 수보리가 감동을 참을 길 없어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 보이자 부처님께서도 
"수보리 네말이 정말 내 말과 생각을 잘 드러내었다."하시며 거듭하여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가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웠겠습니까.정말『금강경』은은 부처님과 수보리가 한마음이 되어 
혼신을다해 진실만을 우리 눈 앞에 열어 보이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시간과 온 우주 공간에 편재(遍在)된 진실을, 그리하여 우리들이 세세생생 먹고 의지하여 
살아갈 수 있는 넘치는 힘을 펼쳐 주시는 것입니다.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不怖不畏  當知是人  甚爲希有
약부유인  득문시경  불경불포불외  당지시인  심위희유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래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심히 희유함이 되는니라."
우리들은 마음 속에 부처님은 상당한 위신력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큰 신통력이 있고 대자비와 지혜가 우리들 중생과 다르게 구족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금강경』에서는 부처님을 그렇게 나타내지 않습니다.간단합니다.
단지 허망하고 변화무상한 상을 떠나는 것이 부처라는 것입니다.
즉, '이일체상 즉명제불(離一切相 卽名諸佛)'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동안 관습이나 제도, 학식과 인간적인 체면 때문에 상이 형성되어 우리의 의식 속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지마는 본질적으로는 참으로 허망하고 겉치레일 뿐입니다.
이런 변화 무상한 상 너머에 내재되어있는 우리의 진실 생명을 이해하는 것이 부처이다 하는 
소리를 듣고도 놀래지도 않고 겁내지도 않고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매우 희유함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중생과는 구별되는 뭔가의 위신력을 구비한분이 부처님인 줄 알고 있는 가운데 간단 명료한 진실을 금방 납득한다면 그 사람은 희유함이 되는 것입니다.


何以故  須菩提  如來  設第一波羅蜜  
하이고  수보리  여래  설제일바라밀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즉비제일바라밀  시명제일바라밀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님일새 그이름이 제일바라밀이니라."
보통 제일바라밀을 보시바라밀로 보지만 『금강경』에서는 지혜바라밀로 생각합니다.
만상을 떠나 보내고 우리의 진실자리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금강석과 같이 견고하며 날카로운 반야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금강과 같이 빛나는 지혜라 하여 또 제일바라밀이라는 상을 낼까봐 제일바라밀이 제일바라밀이 아니고 단지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須菩提  忍辱波羅蜜  如來  說非忍辱波羅蜜
수보리  인욕바라밀  여래  설비인욕바라밀    
是名忍辱波羅蜜
시명인욕바라밀

"수보리야, 인욕바라밀도 여래가 설하되 인욕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니라."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이라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환경이나 금욕스러운 상황을 끝까지 참아냄으로써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수행입니다.
다른 바라밀도 있지마는 상을 떠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인욕이라는 것이 중요한 방편으로 대두됩니다.

허황된 일체의 상에서 떠나게 되면 그 어떠한 감정의 대상도 있을 수 없습니다.
참아낼 대상도 기뻐할 대상도 성낼 대상도 그 어떤 것도 없게 됩니다.
우리들의 고통을 초월하였으므로 실제로 참을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욕바라밀은 인욕바라밀이 아닌 것이고 단지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인 것입니다.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하이고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앙  할절신체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아이어시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주자상
何以故  我於往昔節節支解時  
하이고  아어왕석절절지해시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應生嗔恨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응생진한

"어찌한 까닭인가. 수보리야, 내가 옛적 가리왕에게 신체를 낱낱이 베일 때에 나는 그때에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느니라.왜냐하면 내가 옛적에 마디마디 사지를 베일 때에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함을 내었으리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초월하여 텅 비어 있는 상태에서 누구를 원망하고 무엇에 대하여 성을 낼 수 있겠습니까.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라고 할 수 없는 그 경지를 부처님께서는 전세(前世)에 겪었던 실제를 예로 들려 주십니다.
부처님게서 전생에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서 산중에서 혼자 수행을 하고 있을 때, 그 시대의 왕인 가리왕(歌利王)은 
많은 신하와 궁녀를 거느리고 사냥을 나왔습니다.
왕은 점심을 먹은 후 노곤하여 잠이 들었습니다.깨어보니 자기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여기저기를 찾아보니 자기의 시종들이 바위앞에 있는어느 수행자에게로 가서 지극한 예를 다함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시종들이 전부 거기에 가 있으니 왕은 거만한 마음에서 큰 화가 났습니다.그 수행자에게로 급히 가서 물었습니다.

"그대는 조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그러자 그 수행자는 고요히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인욕(忍辱)을 수행하는 중입니다."
"그래 정말로 참기를 그렇게도 잘 하는냐.내가 직접 시험을 해 보겠다." 하면서 칼을 뽑아 수행인의 신체를 
하나하나 마디마디 잘라내었습니다.
"이렇게 해도 아프지 않느냐. 원망하는 마음〔瞋恨〕이 나지 않느냐."

"내 이미 있지 않고 너 또한 떠나 있는데 무엇이 아프고 누구를 원망한단 말입니까."하며 그렇게도 낱낱이 베임을 당하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하늘의 제석천이 그것을 보고 가리앙에게 돌비〔石雨〕를 퍼부어 벌을 주고,수행자의 몸을 본래대로 환원시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바늘 끝에 조금 찔리거나 손가락에 조그마한 가시 하나가 박혀도 얼마나 아픕니까.
가만 있는 사람을 약간만 건드려도 신경질 부터 내는게 게 보통 우리들 수준인데 그토록 마디마디 살점을 올내고 
뼈를 갈라놓은아픔을 당하면서도 아무런 진한(瞋恨)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나는 수행자다. 
수행자니 이 정도는 참아야지'하는 수준의 인욕은 아닐 것입니다.
나와 너를 공(空)으로 보았기 때문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四相)에서 떠나 있으므로 이미 고(苦)의 상도 없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육체의 고통도, 원망할 가리왕도, 심지어는 고마워할 제석천도 없는 것입니다.


須菩提  又念過去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에 
수보리  우념과거어오백세  작인욕선인  어이소세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수보리야, 또 과거 오백세 동안에 인욕선인이었던 일을 생각하니그때의 세상에서도 아상이 없었으며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도 없었으며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생각난 김에 부처님께서는 과거 오백생 동안에 수행한 인욕을 다 반야의 광명에 비추어 들려 주십니다.
그 때에도 사상이 없음으로 해서 이름하여 인욕바라밀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꼭 부처님의 전세가 아니더라도 역사상에는 이와 같은 예가 많이 있습니다.

사자존자(獅子尊子)는부처님의 법맥을 이은 분 중의 한 분인데 이교도의 모함을 받아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형에 임하면서 남긴 시가 있습니다.

"사대원무주  (四大元無主)    
 오음본래공  (五陰本來空)  
 장두임백인  (將頭臨白刃)  
 유사참춘풍  (猶似斬春風)"

풀이를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 수 화 풍 사대가 원래 주인이 없고 색 수 상 행 식 오음으로 이루어진 이 몸도 마음도 모두 공한 것이라서 머리를 가지고서 흰 칼날 앞에 대어도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 같다오."
칼로써 봄바람을 베어 보십시오.

무슨 흔적이 있으며 또 봄바람을 베는 칼잡이는 무슨 흥이 아겠습니까.망나니가 칼을 들고 사형을 집행하려는 순간에도 이런 시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실체를 공한 것으로 보니 가능합니다.
이 정도의 경지라면 부처님의 전신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남김없이 비운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순교자 이차돈도 자기 자신을 불생 불멸의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한 점 주저없이 불법을 위해 
자신이 생명을 보시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發阿縟多羅三먁三菩提이니
시고  수보리  보살  응리일체상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일체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낼지니"
보리심은 모든 상을 떠나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상식과 지식, 상념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을 때 깨달음이 열리는 것입니다.
온갖 시비선악의 판단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진실한 자기를 볼 수 있습니다.

참선 일념(參禪 一念)에 들면 그 동안 우리들 마음 속에 누적 되어 있는 온갖 기준과 법도, 지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깊고 깊은 마음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잊어버리거나 떼어내어 날려 버려서 벗어난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 속에는 본래로 온갖 사변에서 떠나 있는 
공적한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바로 그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 참선입니다.

이 세상의 제도(制度)라는 상을 떠난다고 깊은 산중에 가서 도를 닦는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상념들의 찌꺼기에 매여 있고 얽혀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고, 복잡한 세계에 침잠하여 상으로 부터 벗어나 있으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생무소주심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응당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서도 마음을 내지 말고 
응당 머문 바 없는 그 마음을 낼지니라."
앞에서 "일체상(一切相)을 다 떠나라."라고 했던 것을 하나하나 분석하여 일러 주십니다.
사실 나라고 하는 것은 안이비설신의를 통해 인식되어지는 색성향미촉법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물, 소리, 향기, 맛, 감촉, 법의 이 여섯 가지에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물을 인식하여 분별을 짓고 눈으로 보고 소리를 들으며 냄새를 맡고 
감촉을 느끼며 사는세계는 사실 거대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식을 축적해가고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심지어 저 높은 하늘나라 도솔천 내원궁을 아는 
법의 세계도 굉장히 큰 세계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전부 다 이 여섯 가지 속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좀 더 깨어 있자면 이 여섯 가지 세계 속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주착하지 말고 매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어디, 그 어떤 일과도 연관을 가지 아니 하면서 
홀로 드러나 있는 소소영령한 진실생명이 활발히 작용을 하여 자기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若心有住  則爲非住  是故  佛說菩薩   心不應住色布施
약심유주  즉위비주  시고  불설보살   심불응주색보시

"만약 마음에 머묾이 있으면 곧 머묾 아님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부처님이 말하기를, "보살은 마당히 마음을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하느니라
우리들이 그 어디와도 연관을 맺지 않고 살아가기란 사실 참으로 어렵습니다. 
태어나면서 한 가정의 일원이 되고 자라면서 점점 더 많은 세계에 속해지면서 사회적인 자아(自我)가 확대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여 소속감이나 안정감을 얻을 수도 있지마는 때로는 
자신을 옭아매는 경우도 생깁니다.

주위에서 보면 많은 모임에 적을 두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사람이 의외로 자신의 일을 돌보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또한 '누구 누구의 무엇이다'하는 관계로밖에 드러나지 않고 진실한 자기 자신은 없어집니다.
그것처럼 색성향미촉법의 어떠한 대상에 집착해 버리면 집착해버린 그 대상 
하나밖에 알 수가 없고 전체를 온전하게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대상에 갇히지 않고 그 어디에 도 머물지 않을 때면 그 무엇에도 머물 수 있는 큰 삶이 되는 것입니다. 
수박껍질을 벗겨야 맛있는 수박 알갱이를 먹을 수 있고, 매미도 한꺼풀 벗어나야 성충(成蟲)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우리들을 한정지우는 온갖 상(相)으로부터 벗어나야만 신선하고 새로운 삶이 활짝 열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