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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와 의상대사 제4권 《지혜의 불꽃》 - 제5장 정안왕(淨眼王) (5)

qhrwk 2026. 5. 10. 07:32

 

 

제5장 정안왕(淨眼王) (5)

 

그 때 무주보살((無住菩薩)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이익으로 수행해야 중생의 일체의 정식(情識)을 변화시켜 아말라식(奄摩羅)에 들어가게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순일한 깨달음(一覺)으로 여러 가지 식(識)을 변화시켜 아말라식에 들어가게 하느니라. 왜냐하면 일체 중생의 본각(本覺)은 항상 순일한 깨달음으로 가지가지의 중생을 깨우치며, 저 중생들이 모두 본각을 얻어서 가지가지의 정식(情識)들이 공적하여 생김이 없는 줄(無生)을 깨우치게 하느니라. 왜냐하면 결정된 근본 바탕(本性)은 본래 아무런 움직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일체의 식(識)은 모두 경계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인데 어떻게 움직이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의 경계는 본래 공(空)하며, 일체의 식(識)도 본래 공하므로 공은 연고(緣故)가 없는 바탕(無緣性)이니라. 도대체 어떠한 인연으로 일어나는가?’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일체의 경계가 공하다면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게 되면 망상이 되느니라. 왜냐하면 일체의 존재(萬有)는 생김도 없고 형상도 없어서 본래 스스로 이름하지 않는 것이니 모두가 공적(空寂)하며, 일체의 법(法)의 모습도 이러하며, 일체 중생의 몸 또한 이와 같으니라. 몸도 오히려 존재하지 않거늘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일체의 경계가 공하고 일체의 몸이 공하며, 일체의 식이 공하고 깨달음 역시 공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순일한 깨달음이란 무너뜨릴 수 없고 부술 수도 없나니, 결정성(決定性)이기 때문이니라. 공한 것도 아니요 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은 것(空亦不空)도 아니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가지가지의 경계도 그러하여 공의 모습도 아니며 공의 모습 아닌 것도 아니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저 경계라 할 수 있는 것은 바탕이 본래 결정되어 있지만 결정된 바탕의 근본은 처소가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깨달음도 이와 같아서 처소가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깨달음은 처소가 없기때문에 청정하나니 청정하므로 깨달음이 없느니라. 사물은 처소가 없기 때문에 청정하나니 청정하므로 물질(色)이라 할 것도 없느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마음과 안식(眼識 : 눈의 분별)도 이와 같아서 헤아릴 수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과 안식도 이와 같아서 헤아릴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물질은 본래 처소가 없으므로 청정하여 이름할 것이 없으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라. 눈은 본래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보이는 것이 없으므로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니라. 마음은 본래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그침이 없으므로 일어날 곳이 없느니라. 식(識)은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으므로 인연의 차별이 있을 수 없느니라. 바탕은 모두 공적하며, 바탕은 깨달을 수 없나니, 법칙을 깨닫는 것으로 깨달음을 삼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깨달음 없는 여러 가지의 식(識)을 깨우쳐 알면 근본으로 들어가느니라. 왜냐하면 금강석 같은 지혜(金剛智)의 경지에서는 해탈의 길(解脫道)이 끊어졌으며, 완전하게 끊어지면 머묾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 나오고 들어가는 것이 없느니라. 마음은 소재처가 없는 결정성(決定性)의 경지에 있으며, 그 경지는 청정하기가 맑은 유리와 같고, 바탕은 항상 평등하기가 저 대지와 같으며, 깨달아 미묘한 관찰은 지혜의 햇빛과 같고, 이로움을 성취하고 본각(本覺)을 얻는 것은 위대한 진리의 비(法雨)와 같으니라. 이 지혜에 들어간 자는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것이며,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자는 가지가지의 식(識)이 발생하지 않느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아말라식은 들어갈 곳이 있는 것이며, 곳(處)은 얻을 바가 있는 것이니, 이것은 법을 얻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왜냐하면 비유하자면 어리석은 자식이 손에 금전(金錢)을 가지고도 지니고 있는 줄 모르고 시방(十方)으로 돌아다니며, 오십 년이 지나도록 가난과 고난으로 오직 구걸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으나, 자신을 지탱하기도 부족했던 것과 같으니라. 그 아버지는 자식의 이러한 사정을 보고 자식에게 일러 말했다. 너는 금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쓸 줄을 모르느냐? 마음대로 필요한 것을 모두 충족할 수 있으리라고 하여 그 자식이 정신을 차리고 금전을 찾으니,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금전를 얻었다고 말했느니라. 그 아버지는 말했느니라. 어리석은 자식아, 너는 기뻐하지 말라. 얻었다는 금전은 ‘본래’ 너의 물건이니, 네가 얻은 것이 아니니라. 어찌 기쁘다고 하겠느냐?고 하였다. 선남자여, 아말라식도 이와 같으니라.

본래 나오는 모습(出相)도 없으며 이제 들어가는 것(入)도 아니니라. 옛적에는 어리석었기 때문이니 없는 것이 아니며, 이제 깨달았다고 하여 새롭게 들어온 것이 아니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저 아버지는 그 자식이 어리석은 줄을 알면서도 어찌하여 오십 년이 지나도록 시방으로 돌아다니며 가난과 고난을 겪은 다음에야 비로소 알려 주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오십 년이 지났다는 것은 한순간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요, 시방으로 돌아다녔다는 것은 함부로 분별하는 생각에 끌려다님이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어떠한 것을 한순간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한순간의 마음이 움직이면 오음(五陰)이 함께 일어나며, 오음이 일어나는 가운데 오십악(惡)이 갖추어져 있느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함부로 분별함에 끌려다니며 시방을 돌아다니고 한순간의 마음이 일어날 때에 오십악을 갖추게 되는데, 어떻게 저 중생이 한순간의 마음도 일으키지 않도록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심신(心神)을 가라앉혀 금강 같은 경지(金剛地)에 머물게 하고, 마음이 고요하여 일어남이 없게 하며, 마음을 항상 무사태평하게 하면, 바로 한순간의 마음도 일어남이 없느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불가사의하옵니다. 깨달음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그 마음이 무사태평하면 바로 본각(本覺)의 이익입니다. 그 이익은 움직임이 없지만, 항상 있어서 없는 것이 아니며, 없는 것이 아니란 것도 있을 수 없으며, 깨달음이 없는 것(不覺)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며, 이는 겉으로 보면 깨닫지 못한 듯하나, 완전히 무지한 것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즉, 중생의 마음은 미혹 속에 있지만, 그 깊은 본체에는 본래의 지혜(本覺智)가 잠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한 상태조차 본래의 지혜를 바탕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 때에 대중들은 이 말씀을 듣고 모두 본각의 이익인 지혜바라밀을 얻었다.” 원효는 경의 무주보살과 부처님과의 중요한 대화의 대목을 인용하고는 강론을 이어갔다.

 

“이 말씀은 미혹마저도 본각(本覺)의 작용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이 없음(不覺)을 깊이 통찰하면, 깨달음이 없다고 하는 그것조차도 본래 깨달음의 작용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깨달음이 없는(不覺) 상태는 깨어 있지 않은 상태, 즉 무명(無明)의 자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명을 무명으로 알아차리는 그 인식 자체가 이미 깨달음의 작용이며, 미혹 안에도 본래의 깨달음이 드러나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깨닫지 못하는 마음이 완전히 어둡지 않은 까닭은, 그 ‘깨닫음이 없음’을 아는 작용 자체가 이미 ‘깨달음의 빛’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는 상태조차 깨달음의 자리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그 ‘깨달음이 없음(不覺)’을 통찰함으로써 본래의 깨달음이 드러난다는 말씀이며, 이처럼 깨달음이 없음(不覺)마저 본각 안에 있다는 인식이 본래의 이익(本利)이요 본각(本覺)인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청정하고 물듦이 없어서 변이(變易)하지 않고 그 자체의 결정성(決定性)이기 때문에 헤아려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 말씀인 것입니다. 부연하자면, 능취(能取)를 떠나는 것을 시각(始覺)의 뜻이라 한다면, 본래 이미 공심(空心)마저도 떠나 있는 상태를 본각(本覺)이라 합니다.” 원효는 질문에 관련된 내용 이외에도 관련 있는 본각과 불각에 관한 깊이 있는 개념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원효는 관(觀)수행을 통해 ‘실행에 옮겼다는 생각이 없이 행할 수 있는(‘無生의 行’), 즉 취(取)하지도 않고 사(捨)하지도 않으며, 마음 아닌데 머물고 법 아닌데 머무는 무생(無生)의 마음의 능력을 성취하면, 본원적 완전성(本覺)을 구현할 수 있으며, 이 경지에 오르면 적정(寂靜)에도 머무르거나 집착하지 않고, 널리 중생 교화의 보살행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