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장 정안왕(淨眼王) (4)
“경에 ‘일미의 모양 없는 이익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수용하지 않음이 없으면서 그 모든 만물의 타고난 본성이 각각 다름에 따라서 모두 그 근본 처소를 얻게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법사 스님의 말씀을 듣자 하니, 그 근본 처소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말씀해 주실 수 있을런지요?” 상단에 같이 앉아 있던 왕의 시선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원효는 상황을 냉정히 관찰하고는 쉽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원효는 경에서 우선 해탈보살의 게송을 인용하면서 초탈적인 공성의 의미를 한번 이야기를 한 후 답변을 자세히 이어갔다.
“허공이라는 개념에 의하여 허공이라는 것이 별도로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허공은 무한한 우주 공간의 비어 있음을 말하는 것인데, 그런 비어 있음이 하나의 명사처럼 개념이 될 수 있는 까닭은 해와 달의 움직임과 별들의 반짝거림과 춤추는 구름들의 무늬로 나타나게 하는 바탕이 상정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늬들이 없다면 우리의 지각은 허공의 바탕을 상상하기 어렵게 됩니다. 바다와 대지라는 개념들도 모두 다 그러합니다. 이 개념들은 무한대로 존재자들을 포용하고 아우르는 고갈되지 않는 무한 힘의 상징입니다.
이 개념들의 품 안에서 모든 생명과 뭇 생명이 다 그들의 기운을 표출해 내고 있습니다. 즉 그 근원은 홀로 해맑고 깨끗하지만, 그래도 그 근원은 모든 두두물물의 다양한 본성을 출현시키고 다양하게 존재하도록 하는 그런 근원의 의미를 지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심의 근원 혹은 근본 처소는 대립을 넘어서는 부정(不定)의 자유로움을 상징합니다. 즉 무애(無碍)한 심법의 공(空), 공성(空性)으로 표현되게 되지요. 공은 무한대의 탈근거(脫根據)로서, 무한 만물이 생멸하게 되는 근거와 같습니다. 결국 규정할 수 없는 무한대의 열린 지평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공간적으로 수평적 통일로서 지혜(마음)와 경계(세상)가 둘이 아니고(境智無二), 오로지 한가지 맛뿐(唯是一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심(一心)의 지혜에서는 깨달음의 양각(二覺)인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고, 삼공(三空)의 경계에서는 진여(眞如)와 세속(世俗)의 경계가 막혀 통하지 않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런 무애(無碍)한 공(空)의 모든 경계를 비유하자면 거대한 바다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마음과 세상은 일미(一味)로서, 마음이 능동적 능견(能見)이면 세상은 각자의 안목에 따라 결정되므로, 수동적 소견(所見)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경계들이 인과의 시간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곧 지금의 원인이 먼 훗날의 결과와 별개의 것이 아니게 되며, 종국에는 시간적 차이를 넘어 일미로 상응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원효는 자기 자신의 마음 안에서 돌고 도는(亘) 순환론적 인과법을 근본 처소에 연관시켜 말씀하고 있었다.
“세상이라는 바다는 진속지성(眞俗之性)처럼 진여와 세속의 본성이 각각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한자리에 동거하고 있는 것과 같고, 염정지상(染淨之相)의 현상도 이원론도 아니고 일원론도 아닌 그런 이중성의 상관적 차이의 연기법으로 존재합니다.
세상의 바다에서 세속과 물듦의 현상이 없으면 진여와 해맑음의 존재양식이 성립할 수 없기때문에, 세속과 물듦의 존재양식은 진여와 해맑음의 존재양식과 함께 서로 상호보충적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 불법은 곧 진토(塵土)의 현상계가 없으면, 청정한 불국토(佛國土)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진토는 곧 비불국토(非佛國土)인 것입니다. 마음에 불국토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 마음의 자기 그림자에 비불국토인 진토의 생각이 늘 이면에 도사리고 있으므로, 불국토와 진토는 종이 한 장 차이로 결정됩니다. 마음이 불국토를 선택하고 진토를 배척한다고 택일하는 그 순간, 마음은 포괄적인 원융법(圓融法)을 잃고 외곬의 선(善)의지라는 명분하의 소유론적인 욕망에 사로 잡혀 고통의 독약을 먹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국토의 도래는 마음이 자기가 선(善)이라는 고집을 피우지 않고, 늘 불선(不善)의 위험성을 스스로 안고 있음을 자각하는 겸손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의 선행이 독선의 외곬으로 변할 수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악을 내려고 애쓰면 악은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지요. 그러므로 불법은 악을 미워하여 없애려 하지도 않고, 선을 위한다고 흥분하지도 않습니다. 악을 비선(非善)으로 여겨, 선의 이면에 늘 악이 잠재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불법입니다. 그래서 흥분하지 않고 세상을 보면 세상은 늘 고요하고 해맑게 진정되어 있으면서 비선비악(非善非惡)의 불국토(佛國土)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죽음의 사라짐이 생명의 새로운 도래를 가능케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죽음이 남긴 무(無)의 빈공간은 새로운 삶의 생명이 거주하는 터전으로 작용을 하게 됩니다. 유무지법(有無之法)이 무소부작(無所不作)이고 시비지의(是非之義)가 막부주(莫不周)라 했습니다. 즉 유무의 법이 이루지 않는 바가 없고, 긍정과 부정의 뜻이 돌고 돌지 않는 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질문했던 그 고승은 원효의 답변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질 않는지, 이내 다른 질문으로 옮겨 갔다. “소승이 생각해 보니, 마음의 일심이 그러면 유식학(唯識學)에서 이야기하는 제8식인 아뢰야식으로도 읽을 수 있을런지요?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 마음의 근원을 제9식인 아말라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지요?” 유식학을 공부한 듯한 고승의 질문은 비유하자면 우주의 허공과 같은 마음의 무한한 비어 있음의 터전을 아뢰야식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을 묻고 있었다.
“일심의 지혜는 마음을 자유롭게 하고, 삼공의 경계는 마음을 평등하게 합니다. 삼공의 다양한 분화는 결국 바다라는 거대한 유식의 아뢰야식 안에서 진여와 세속의 두 경계를 융화하게 됩니다. 바다의 포괄적인 존재 방식은 ‘깊고 넉넉해서 두 가지를 융화하되 합일하지 않는다(融二而不一)’, 즉 바다는 깊고 넉넉하여 진속(眞俗)의 두 경계를 합일해서 하나로 만들지 않고, 차이속에서 동거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경계가 그 차이를 절대적으로 없애지 않으면서, 상관적으로 동거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펼침과 오므림이 자재(自在)하고, 세움과 부숨이 무애(無碍)하고, 열어도 번잡하지 않고, 합일해도 부자유스럽지 않고, 긍정해도 얻는 것이 없고, 부정해도 잃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평등일미(平等一味)하여 다를 수가 없고, 유통유별(有通有別)하여 같을 수가 없습니다.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은 같음(同)이 다름(異)과 가까이 한다는 것이요, 다를 수 없다는 것은 다름이 같음과 가까이 한다는 것입니다.
같음은 다름에서 변별한 것이고, 다름은 같음에서 다름을 해명(解明)한 것입니다. 같음에서 다름을 해명한, 즉 같음이 나누어져서 다름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다름을 변별한, 즉 다름을 녹여서 같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같음은 다름을 녹인 것이 아니므로, 이것이 같다고만 말할 수 없고, 다름은 같음이 나누어진 것이 아니므로, 이것이 다르다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다르다고만 말할 수 없으므로 이것이 같다고 말할 수 있고, 같다고만 말할 수 없으므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함과 말하지 못함이 둘이 아니고 별개의 것도 아닙니다.” 원효는 같음과 다름의 일률적인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논리는 범부와 성인의 생사와 열반을 보는 관점의 비유에도 적용하였다.
“여래는 이와같은 도리를 체득한 까닭에 일체 모든 법 자체와 다르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경에 말씀하기를 ‘생사(生死)는 도(道)와 합일하게 되고, 도는 곧 생사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와같은 본성이 모이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님을 깨달으시니, 얻음과 얻지 않음이 없는 것으로 말미암아 단절과 단절되지 않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상을 떠나서 궁극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름을 선서(善逝)라 하고, 진여(眞如)를 타고 돌아온 까닭에 여래(如來)라 칭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말씀과 같이 부처님은 되돌아와서 범부가 되는 까닭에 공(空)하지 않고, 모든 부처님은 무(無)라는 것이 없으므로 유법(有法)도 아니고, 비법(非法)이므로 불이(不二)이고, 이법(二法)이 아니므로 불일(不一)인 것입니다. 이런 도리로 말미암아 단절과 부단에도 모두 장애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효의 법문에 의하면 삼공의 바다에서는 진여와 세속은 서로 방해를 가져오는 배타적 이원론을 구성하지 않고, 상보적인 보충대리의 역할을 수행하는 상관성을 띠는 그런 차연(差延)의 관계라고 말씀하고 있다. 곧 진여가 진여이기 위하여 세속의 타자(他者)로서의 진여로 존재하고, 또 세속도 세속이기 위하여 진여의 타자로 존재하는 그런 존재론적 상호필요성이 성립하게 된다.
“진여와 세속이 둘 다 독자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둘 다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해서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境卽眞俗雙泯 雙泯而不滅). 즉 진여는 세속의 타자로서, 세속도 진여의 타자로서 상대방이 없으면 자기도 출현할 수 없는 연기법적 차연(差延)관계(서로 다르면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흔적을 연기 시키는 관계)인 융화(融和)가 바로 담연(湛然)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여와 세속은 공의 두가지 모습, 즉 해탈적 수직의 방향으로 해맑고 깨끗한 수행으로 길을 닦는 독정(獨淨)의 자유와 다르지 않고, 바다처럼 물이 깊고 넉넉하여 결코 고갈되는 법이 없는 담연(湛然)의 포용적 수평의 방향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다 용인하는 평등의 대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무애자재한 대자유가 되는 반면 삼공지해는 삼공의 중관학적 공사상이 인연의 세상에 내재하면서 유식학적(唯識學的) 상관적 연기법과 만나게 되며, 연기법은 모든 존재가 차이의 상관성으로 얽혀 있는 평등의 포괄성으로 표현할 수있습니다. 유론과 공론, 자유와 평등, 무애와 인연, 초탈과 포괄이 서로 만(卍) 자처럼 기와를 이어가듯이, 새끼를 꼬듯이, 짜여져 가는 것으로 비유할 수있습니다.
허공법계 그 자체는 이미 자기 안에 온갖 만물들을 다 포섭하고 있으므로, 허공과 만물의 존재방식이 따로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허공법계 그 자체는 모든 진망(眞妄)종자들의 초탈한 존재라고 봐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진망 종자들을 자체 안에 섭수하고 있는 허공이라 하더라도, 그 허공은 여전히 청정하여 어떤 오염(汚染)종자들의 활동에도 물들지 않는 청정한 초탈성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효는 일심은 아뢰야식으로 온갖 종자들을 포섭하는 허공과도 같다고 보았지만, 동시에 일심의 근원은 그 허공이 어떤 종자들의 생멸에도 오염되거나 흔들리지 않는 초탈적인 청정한 종자만을 가리키는 무구식인 아말라식과 같다고 봐야 한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아뢰야식의 본성은, 유식학에서 논하는 것처럼, 허공과 같은 무한대의 부정성(不定性), 즉 비결정성(非決定性)을 뜻합니다.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이라고도 하지요. 이것은 일법계(一法界) 안에 중생과 부처님이 공존하고 있는 현상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일심의 아뢰야식이란 일법계의 허공의 온갖 종자를 다 저장하고 있는 이치와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무구식(無垢識) 인 제9식 아말라식을 질문하셨는데... 그것은 제8식과 존재론적으론 크게 다르지가 않습니다. 다만, 제9식은 제8식의 진망화합식에서 청정한 여래장(如來藏)을 따로 분리해서 인식하고 있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모두 일심의 유전이자, 적멸한 것이며 여래장과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일심은 생멸이 왕래하는 순환의 세계를 말하고, 그 근원은 그런 순환의 왕복을 초탈한 청정한 진여의 세계라는 말씀입니다.” 원효는 이 대목에서 부처님께 질문한 무주보살의 질문 내용을 독경하기 시작했다. 원효의 말에 따라 모두 경건히 따라 합장하고 들었다.
'불교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4권 《지혜의 불꽃》 - 제6장 정안왕(淨眼王) (6) (0) | 2026.05.12 |
|---|---|
|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4권 《지혜의 불꽃》 - 제5장 정안왕(淨眼王) (5) (0) | 2026.05.12 |
|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4권 《지혜의 불꽃》 - 제3장 정안왕(淨眼王) (3) (0) | 2026.05.12 |
|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4권 《지혜의 불꽃》 - 제2장 정안왕(淨眼王) (2) (0) | 2026.05.12 |
|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4권 《지혜의 불꽃》 - 제7장 현성의(顯成義) (1) (0) | 2026.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