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장 현성의(顯成義) (1)
“모든 생멸(生滅)을 멸(滅)한다는 것은 진제(眞諦)(진여제) 적멸(寂滅)의 법을 들어서 말한 것인데, 이 진제(眞諦)의 뜻이 생(生)이라는 것은 세속이 되도록 진여를 녹였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적멸법이 인연을 쫓아서 생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적멸을 비멸(非滅)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적멸(寂滅)이 생의(生義)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적멸이 비적멸(非寂滅)이므로 적멸의 뜻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까닭으로 적멸이 곧 인연을 쫓아 생(生)한다고 합니다. 적멸이 생이라는 것은 불생(不生: 불멸불생하는 본질의 불생)의 생(生: 생멸하는 현상의 생)이요, 생의(生義)가 멸(滅)이라는 것은 불멸(不滅: 생멸하는 현상의 생)의 멸(滅: 적멸하는 본질의 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멸(불생불멸하는 본질의 불멸)의 멸(현상적 생멸의 멸)이므로 멸(적멸의 멸)이 곧 생(현상적 생)이 되고, 불생(불생불멸의 본질적 불생)의 생(현상적 생멸의 생)이므로 생이 곧 적멸인 것입니다.”
원효는 적멸법(寂滅法)은 인연소생(因緣所生)에 따라서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었으며, 마치 삼공지해(三空之海), 즉 삼공의 진여(眞如)가 바다라는 세속으로 융합되어 나아가는 것에 비유했던 것처럼, 적멸법을 비멸법(非滅法)이라 부르게 된다. 적멸법은 자기동일성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인연소생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적멸(寂滅)과 비멸(非滅)이 차연(差延)의 관계이므로 적멸을 오로지 적멸에서 구함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었으며, 생의의 불멸과 적멸의 멸은 상관적 이중성(不生之生, 不然之大然, 無理之至理, 無本之本)을 띠고 있다는 말씀이었다.
“합해서 말한다면, 생이 곧 적멸이나 그 적멸을 지키지 않고(生之寂滅, 滅卽生), 적멸이 곧 생이나 그 생에 머물지 않습니다(寂滅之生, 生卽寂滅). 생멸(生滅)이 불이(不二)하고 동적(動寂)이 무별(無別)하므로, 이와같은 것을 일컬어 일심(一心)의 법이라 말합니다. 비록 실상(實相)은 둘이 아니지만, 하나를 지키지 않으며, 본질은 인연을 따라 생동하기도 하고, 본질이 인연을 따라 적멸하기도 합니다. 이런 도리(道理)로 말미암아 생(生)이 적멸(寂滅)하고, 적멸(寂滅)이 생(生)이기에,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어서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효는 구별이 없는 일심의 법을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로고스와 같다고 표현했다. 적멸에 집착하면 손감변(損減邊)의 악취공적(惡取空的)인 허무론에 빠지고, 생의(生義)에 집착하면 증익변(增益邊)의 존재자적(存在自的)인 소유론에서 헤매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공성(空性)의 본체(본질)를 들어서 연기(緣起)에 따르면 삼공지해(三空之海)의 방향으로 생동하기도 하고, 연기의 생멸을 들어서 불생불멸을 따르면 일심지원(一心之源)의 방향으로 적멸하기도 하며, 또 삼공지해가 일심지원으로 돌기도 하고, 일심지원이 삼공지해로 돌기도 하므로, 순환론적 관계가 늘 마음의 근원인 진여의 절대무(絶對無)와 세속화한 바다 사이를 오간다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학승께서 이어서 질문하신 내용에 대해 말씀드리면, 사실 의식이 본래로 ‘초롱초롱, 또렷또렷’한 것을 선(禪)이라고 합니다만... 정(定)에 들어 있을 때는 반연하는 경계를 잘 생각하고 제대로 살피기(審正思察) 때문에 정사(正思)라고 합니다. 유가론(瑜伽論)에서도 ‘대상에 대하여 잘 살피고 제대로 관찰하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라고 했습니다.
경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살펴보면, ‘선남자야! 선(禪)의 관(觀)은 다 정(定)을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진여는 저런 것이 아니라, 진여로서의 진여의 실상을 관(觀)하면 진여의 실상(實相)을 보지 못하니, 모든 실상이 이미 적멸했기 때문이다. 적멸은 곧 진여의 뜻이다. 저와 같이 정(定)을 생각하면 그것은 움직이는 것이요, 선(禪)이 아니다.
선(禪)의 본성은 모든 움직임을 떠난 것이요, 물들이는 것도 아니고 물드는 것도 아니고, 법도 아니고 그림자도 아니며, 모든 분별을 여읜 것이니 본디 뜻이 그런 뜻이다. 그러므로 선남자야! 이와같이 정(定)을 관(觀)하는 것을 일컬어 선(禪)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효는 학승의 질문에 본인이 생각하는 선을 간단 명료히 언급하고는, 경전의 부처님 말씀을 인용해 설명한 후, 한참을 그 학승을 미소 띤 열굴로 바라보고는 다시 말씀을 이어갔다.
“선(禪)적 무아(無我)의 법열(法悅)은 바로 절대공(絶對空) 절대무(絶對無)의 차원을 경험하는 것인데, 이는 본각(本覺)의 초탈적 독정(獨淨)의 무애(無碍)한 대자유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초탈적이고 자의식이 전혀 없으면서 무한대의 고갈이 전혀 없는 무진제(無盡諦)의 독정(獨淨)한 허심(虛心)은 경에서 부처님께서 대력보살(大力菩薩)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생(生)이 생(生)한 바 생(生)이 아니고, 멸(滅)이 멸(滅)한 바 멸(滅)이 아닌’ 모든 연기적(緣起的) 차연(差延)의 법칙마저도 망각한 영원한 세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래장(如來藏) 혹은 본각(本覺)이라 함은, 곧 본래 갖추어져 있으되, 그 본각이 중생의 수행을 통해 드러나 성취되는 것으로 파악해야 하며, 이때 본각에는 본래 있는 것을 드러내어 성취한다는 뜻(顯成義)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즉 ‘현성의(顯成義)’는 새로 만들어 내는 성취가 아니라, 본래 갖추어진 각(覺)이 발현된다는, 여래장(如來藏)·일심(一心)의 관점에서 이해되는 ‘성취’를 가리킵니다.
본각에는 현성의(顯成義)가 있기 때문에 진수(眞修)라고 말할 수 있는 도리 즉 ‘참되게 드러내어 성취한다’가 있으며, 또 시각(始覺)에는 수성의(修成義)라는 도리가 있기 때문에 시각이 ‘점차 수행을 통해 닦아 성취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각은 본래 구족된 것이 드러나 성취되는 것이고(顯成義), 시각은 수행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다(修成義)라고는 말하지만, 둘은 일심(一心)·진여(眞如)·여래장(如來藏)의 구조 안에서 본래 서로 떨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진여(眞如) 자체상은 본래부터 그 자성에 일체의 공덕이 만족되어 있습니다. 소위 진여 자체에
대지혜의 광명이라는 뜻이 있고, 법계를 널리 비춘다는 뜻이 있으며, 제대로 알아차린다는 뜻이 있고,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뜻이 있으며, 상(常)·낙(樂)·아(我: 진실한 자아)·정(淨)의 뜻이 있고, 청량(淸凉)·불변(不變)·자재(自在)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항사(恒事)를 능가하고, 떠난 적도 없으며, 단절된 적도 없고, 변이(變異)한 적도 없는 부사의한 불법을 구족하고 나아가서 부족한 뜻이 없으므로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또한 여래법신(如來法身)이라고 합니다. 그 도리가 애초부터 갖추어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법사 스님, 그렇다면 청정(淸淨)이라고 하는 뜻은 어떠한 것인지요?” 이어지는 학승의 질문에 원효는 답하기 전 이 학승의 거처를 물었다. “예 저는 금강산(金剛山) 수미봉(須彌峰)에 있는 수미암(須彌庵)에서 수행 중인 현지(玄旨)라고 합니다.” 원효는 이 학승과 오랜 인연이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고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간단한 비유를 하나 들어 쉽게 설명하였다.
“예... 경에 보면, 꿈에서 강을 건너는 비유가 있습니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침상에 누워 꿈을 꾸었는데, 꿈에 큰 강물이 자신의 몸을 휩쓰는 것을 보고는 손과 발을 움직여 그 물살을 거슬러 올라갔지요. 그는 온 정신과 힘을 쏟으며 게으르지 않았기에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꿈에서 깨 보니 강물은 커녕 이 언덕과 저 언덕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생사의 망상이 이미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그 깨달음이 청정(淸淨)해지니, 깨달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비유입니다. 이와 같이 법계의 일체 망상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청정(淸淨)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얼굴이 맑아 보이는 학승은 공손히 진심으로 감사의 예를 허리 굽혀 표하고는 자리로 돌아가 조용히 앉아 법문을 경청하고 있었다.
원효는 질문에 모두 답하고는, 해탈보살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서 마음에 큰 기쁨을 느끼고 미증유한 경지를 증득하여 그 뜻을 펼치고자한 게송을 말씀하셨다.
“대각을 원만구족한 세존께서는 (大覺滿足尊)
중생 위해 법 널리 연설하시도다 (爲衆敷演法)
모두 다 일승법만을 설명하시고 (皆說於一乘)
그 밖에 이승의 도 전혀 없어 (無有二乘道)
분별없는 일미본각의 이익들은 (一味無相利)
비유하면 마치 큰 허공과 같아 (猶如大虛空)
일체를 수용하지 못할 것 없도다 (無有不容受)
자기의 성품 각각 다름을 따라 (隨其性各異)
모두가 본래자리를 얻게 한다네 (皆得於本處)
오늘 이 법회에 참석하신 모든 사부대중들께 금강삼매경의 대의와 경의 깊은 뜻을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의 이 가르침은 세속의 모든 것을 다 긍정하는 생의(生義)사상이므로, ‘파괴함이 없고(無破)’ 그리고 ‘정립하지 않음이 없다(無不入)’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요약하자면, 무리(無理)는 절대무(絶對無)의 진리인 진여제(眞如諦)와 진여제가 내포하고 있는 무애한 해탈법(解脫法)의 자유를 이야기하고, 지리(至理)는 생멸(生滅)의 진리인 세속제(世俗諦)와 세속제가 회임하고 있는 원융한 연기법(緣起法)의 평등을 이야기 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無理之至理). 또한 불연(不然)은 무집착(無執着)의 자유를 의미하고, 대연(大然)은 존재간의 상호성과 상호간의 대긍정을 의미한다(不然之大然)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원효는 법문의 말미에 이르러 지금까지 강론하신 내용을 요약하여 말씀을 이어갔다. 원효의 이 말씀은 다른 한편으로는 ‘법불지보불(法佛之報佛)’의 의미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결국 이 양가성이 서로 순환하는 돌고 도는 이치를 원효는 묘계환중(妙契環中), 초출방외(超出方外)라 하여, 화신불의 용대(用大)로 수렴한 의미로 거듭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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