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장 자비(慈悲) (2)
혜공(惠空)은 신승(神僧)으로, 신라십성(新羅十聖)중의 한 분이다. 천진공(天眞公)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던 노파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우조(憂助)이었다. 어려서 신이(神異)한 능력이 드러나 출가하였다. 그의 나이 일곱 살 때 주인인 천진공이 악성 종기 때문에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문병하러 오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제가 낫게 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라고 어머니에게 말했는데, 어머니는 실없는 소리로 웃어넘기면서도 이를 천진공에게 고했고, 천진공이 속는 셈 치고 불러오게 했더니 우조는 침상 밑에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고, 얼마 안 가서 종기가 터지고 아프던 것이 나았다.
이때까지도 천진공은 우연이겠거니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마침 천진공의 동생이 지방으로 가면서 형이 기르던 매 가운데 한 마리를 받아 가지고 떠난 날 저녁, 천진공의 마음이 바뀌어서 매를 도로 찾아올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천진공이 이를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는데, 우조는 어떻게 알고 지방으로 내려간 천진공의 동생을 찾아가서 매를 가져다 바로 다음 날 새벽에 천진공에게 바쳤고, 천진공은 그제서야 우조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제가 멍청해서 성인께서 우리 집에 있는데 몰라뵙고 함부로 종으로 부리고 있었습니다”라며 빌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뒤에 우조는 출가하게 되었다.
출가 후 작은 암자에 머무르며 삼태기를 지고 취하여 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므로 사람들이 부궤화상(負簣和尙)이라 불렀고, 그의 암자를 부개사(夫蓋寺)라 불렀다. 부개는 삼태기의 향언(鄕言)이다. 이는 원효가 무애박을 만들고 무애가를 지어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가난하고 무지했던 대중들을 교화한 행동과 상통한다.
혜공의 신이(神異)는 출가 후에도 계속되었다. 우물 속에 들어가 몇 달씩 나오질 않았었고, 나올 때는 항상 푸른 옷을 입은 신동(神童)인 벽의동자(碧衣童子)가 먼저 솟아 나왔으므로, 절의 대중들은 이것으로 혜공이 나오는 조짐을 삼았으며, 우물에서 막상 나왔어도 옷은 전혀 젖지 않았다고 전한다.
어느 날은 풀로 새끼를 꼬아 가지고 영묘사(靈廟寺)에 들어가서 금당(金堂)과 좌우의 경루(經樓)와 남문의 낭무(廊廡)를 둘러 묶고 강사(剛司)에게 말하기를, “이 새끼를 꼭 3일 후에 걷어라.”라고 하였다. 강사가 이상히 여기면서 그대로 하였다. 과연 3일 만에 선덕왕(善德王)이 행차하여 절에 오자 지귀(志鬼)의 심중에서 불이 나와 그 탑을 태웠으나 오직 새끼로 둘러맨 곳만은 화재를 면하였다. 선덕여왕을 짝사랑했던 지귀의 심화(心火)로 영묘사에 불이 나서 탑까지 다 타버렸는데, 앞서 혜공이 새끼줄을 쳐 둔 곳만 불에 타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일찍이 조론(肇論)을 보고 전생에 본인이 찬(讚)한 것이라고 하여, 사람들이 그를 후진(後秦) 승조(僧肇384-414)의 후신이라 여겼다고 한다. 혜공은 입적할 때는 허공에 뜬 채로 입적했으며, 많은 사리가 나왔다고 전한다. 만년에는 항사사(恒沙寺)에 있었는데 원효가 경소(經疏)를 지을 때 의심나는 것은 그에게 와서 묻고 서로 법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본디 중생은 생김도 없으며 또한 다시 무너짐도 없으니(衆生無有生 亦復無有壞) 만약 이와 같은 지혜를 얻으면 마땅히 최상의 도를 이루리라(若得如是智하면當成無上道)’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중생의 무생멸(無生滅)을 말씀하신 것인데, 일체의 법은 불생(不生)이며 일체의 법은 불멸(不滅)이며, 때론 세간의 형상이 항상 머무른다고도 하였습니다. ‘곧 하나 가운데서 한량없음을 알고 한량없는 가운데서 하나를 알아(一中解無量 無量中解一) 그것이 서로 함께 일어남을 알면 마땅히 두려울 바 없음을 이루리라(了彼互生起 當成無所畏)’라고 하셨습니다. 하하하...”
혜공은 존재의 본질은 언제나 텅 비어 공 하며, 그 공한 본질에서 천백억화신으로 작용하는 것이 현상이며, 그래서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며, 하나 가운데 일체가 들어 있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들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원효의 의중을 살펴보고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중생 모두가 정각을 이루면 체성(體性)인 광명이 백 세계를 지나서 동방의 천 세계를 두루 비추고 남서 북방과 네 간방과 상방 하방도 비추어서(光明 過百世界 徧照東方 千世界 南西北方 四維上下 亦復如是) 그 낱낱의 세계 가운데 있는 것이 다 모두 분명하게 ‘그 마음에’ 나타난다(其中所有 悉皆明現)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원효는 중생의 깨달음의 지혜는 무한으로 확장한다는 뜻이며, 한계가 없다는 뜻이며, 끝없이 확장될 수 있는 것이 곧 앞서 이야기했던 바로 자성생명의 원리며 법성생명의 원리라는 말씀이었다. 참으로 고준한 말씀이었다. 원효는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의 난승지(難勝地)보살의 공과(功果)에 대한 말씀 중에, 보살이 열 가지 평등하고 청정한 마음을 닦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과거·미래·현재의 불법 관찰, 수행 지견, 보리 법문, 중생 교화 등에 평등하고 청정한 마음(평등심)을 강조하며, 중생의 다양한 근기(善根)를 마치 큰 그물을 짜서 포용하고 제도하는 지혜(智慧)와 대비(大悲)가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중생을 구호하고 이익 하게 하며, 안락하게 해서 해탈케 하는 평등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간적 현상세계와 출세간적 본체계가 둘이 아님을 아직 깨닫지 못한 우리 범부들이 현재의 미오(迷汚)한 심성으로 부터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미망에 허덕이고 있는 현실의 마음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상과 본체가 각기 그 바탕(體)이 다른 것이라는 잘못된 집착을 깨뜨리는 말씀을 널리 알려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원효는 현실심 분석에 치중한 현 유식서 등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라는 논서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려 하고 있었다.
“저 대승(大乘)의 본질(體)은 고요하고 비어서 공적하고(蕭焉空寂), 깊고 넉넉하여서 그윽합니다(湛爾沖玄). 대승의 본질은 현묘하고 현묘하지만(玄之又玄之), 어찌 만상(萬像)의 현상을 벗어났겠으며(豈出萬像之表), 고요하고 또 고요하나(寂之又寂之) 오히려 백가(百家)의 담론 안에 있다고 하겠습니다(猶在百家之談). 그러나 대승의 본질은 만상의 현상을 벗어나지 않았으나(非像表也), 오안(五眼)으로도 능히 그 몸을 볼 수 없고(五眼不能見其軀), 백가의 말 속에 깃들어 있으나(在言裏也), 사변(四辯)으로도 능히 그 모양을 담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四辯不能談其狀).
대승의 본질이 크다고 말하고 싶어도(欲言大矣) 안이 더 이상 없는 아주 미세한 곳에 들어가도 남기지 않고(入無內而莫遺), 그것이 미세하다고 말하고 싶어도(欲言微矣) 그 이상의 바깥이 없을 정도로 무한히 큰 것을 감싸고도 남는 것이 있다고 하겠습니다(苞無外而有餘).
대승의 본질을 유(有)에 의거해서 이끌려 하지만(引之於有), 일여(一如)가 이를 베풀어서 공(空)하고(一如用之而空), 무(無)에 의거해서 뜻을 나타내려 하지만(獲之於無), 만물(萬物)이 그것을 타고 생기하니(萬物乘之而生), 어떻게 말할 수 없어서 억지로 이름하여 대승(大乘)이라 부르는 것입니다(不知何以言之 强號之謂大乘).”
원효가 혜공에게 의논하고자 했던 내용을 먼저 황홀(恍惚)하고 유려(流麗)한 문장으로 일목요연하게 전달했다. 한참의 적막이 흘렀다.
“대승적(大乘的) 마음과 그 믿음(信)으로 들어가 보자는 말씀이군요... 하하하...”
혜공은 원효의 의논하고자 하는 대의에 대해 간단히 요약해서 먼저 답을 했다.
“대승의 법은 오직 일심(一心)이 있을 뿐이며 일심 이외에 다른 법은 없습니다. 단지 무명이 일심을 미혹시켜 육도(六道)에 유전(流轉)하게 하지만, 이때에도 역시 일심을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일심으로 말미암아 온갖 세계(六道)를 지어내기 때문에 널리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일으킬 수가 있고, 온갖 세계가 일심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 몸으로 일으키는 큰 자비심(同體大悲)’ 을 낼 수 있는 것이니, 이리하여 의혹을 버리고 발심(發心)할 수 있게 됩니다.” ‘일심이 일체법을 총섭한다’ 라는 원효의 말씀은 본체와 현상 간의 관계를 본체의 세계에서 현상의 세계가 전개된다는 생성적인 관점보다는, 절대적인 본체와 현상적인 현상은 서로 상즉(相卽)해 있다는 관점에서, 일심의 경지에서는 제법과 일심을 둘로 나누어 볼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그러면, 말씀하신 일심의 ‘일(一)’과 ‘심(心)’은 각각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원효의 말씀에 대한 혜공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모든 존재의 참 모습은, 생겨남(生)과 사라짐(滅)이라는 이분법적 구분과 분리가 없으며(無生無滅), 일체의 인위적 구별이 원천적으로 해체된 상태(本來寂滅)이니, 오직 일심(一心)의 경지입니다. 이와같은 상태를 심진여문(心眞如門)이라 하기 때문에 능가경(楞伽經)에서는 ‘모든 인위적 분별과 분리가 해소된 경지를 일심이라 한다(寂滅者名爲一心)’고 말했으며, 이 일심의 바탕은 본래적 깨달음(本覺)이지만 무명을 따라 동작하여 분별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경우(실체적 분별을 행하는 마음, 생멸문(生滅門)) 여래의 성품이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는 것을 여래장(如來藏)이라 부릅니다. 이와 같은 뜻이 생멸문에 있기 때문에, 능가경에서는 ‘일심을 여래의 가능성이 간직된 상태(一心者名如來藏)’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일심의 생멸문(生滅門)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속(俗)되거나 탈속(脫俗)한 모든 것들의 참 모습은 속(染)이니 탈속(淨)이니 하는 분별이 없는 것이고, 참된 진여(眞如)의 체계(眞如門)니 그릇된 분별의 왜곡 체계(生滅門)니 하는 것도 근본에 입각해 보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一)라는 말을 붙이게 됩니다. 동시에 이 이원적 분별과 분리가 해체된 진실의 경지는 허공과는 달라서, 성품이 스스로 신령스럽게 아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마음(心)이라는 말을 붙이게 됩니다.
다른 표현으로 이해를 도운다면, 동일한 것(一)은 동일하지 않는 것(非一)에 상응하고 있으므로, 상이한 것에 즉(卽)하여서 상이한 것과 같이하고, 상이한 것(異)은 상이하지 않은 것(非異)에 상응하므로, 동일한 것에 즉(卽)하여서 동일한 것과 같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둘로 분별할 것이 없으니, 하나가 있다고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라고도 할 수 없다면, 무엇을 ‘마음’이라는 말로 지칭할 것 인가하면, 이와같은 도리는 언어적 범주를 벗어나고 모든 것을 이원적, 실체적으로 분별하는 마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경지라서 무슨 말을 붙여야 될 지 알 수 없으므로 억지로나마 ‘한 마음(一心)’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컨대 질그릇과 흙먼지가 본질적으로 서로 상통한 이치를 들어서 바라보는 세계이고, 생멸문에서는 질그릇과 흙먼지가 서로 현상적으로 상이한 점을 들어서 설명한 사실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생멸문의 차이상도 그 본질에서 질그릇과 흙먼지에서 어떤 차이도 없기에, 진여문은 이치(理)의 문(門)이고 생멸문은 바로 사실(事)의 문(門)입니다.”
원효는 일심의 경지는 인간에게 자리 잡은 사유 능력의 차원 높은 발전 단계이며, 한편으론 ‘이중적 동시성’의 사유이며 생멸문에서 이미 진여문의 본질이 변하지 않고 현존해 있다고 말씀하고 있었다. 이 진여문은 결국 중생이 무분별심(無分別心)으로 세상을 상응하면 거기에 따라 마음이 증득하게 되는 진리의 본질 세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혜공은 자세히 원효의 설명을 들어보고는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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