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장 자비(慈悲) (3)
“마음이 진리와 같아지는(心眞如的) 가능성과 마음이 진리를 등지는(心生滅的) 가능성을 동시에 논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하자면 인간의 사유 활동은 깨달음의 기능(覺義)과 깨닫지 못하는 기능(不覺義)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말씀이군요... 이 생멸적 사상(事相)의 현상적 생기(生起)에 깃들어 있는 본질인 불성(佛性)이나 공성(空性)이 중생들에게는 어떻게 요익됨이 되는지요?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각(覺)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혜공의 질문은 일심(一心) 구현의 측면을 밝히는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의 ‘통합의 통로’인 각(覺)의 의미가 중생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묻고 있었다. 이때 ‘깨달음’은 구속과 오염의 현 존재상황(苦)에서의 해방과 정화의 변혁적 성숙으로 본질적인 전환을 성취시키는 ‘관절적’ 통로에 자리하고 있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희망의 빛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의 노력과 힘으로 깨달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삶의 근원적 불안과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현실적 인간은 마음 아프게도 ‘깨닫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생명에 내재하는 원초적 이해의 결핍(無明)과 그 산물의 구조 및 내용을 해명하려는 것이 저의 의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또한 원초적 결핍으로부터 해방된 본원적 완전성도 동시에 간직한 존재입니다. 그 본원적 완전성을 본각(本覺)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불각(不覺)이라는 존재 결핍으로부터 본각(本覺)이라는 본원적 완전성으로 귀환할 수 있는 가능성, 잠재력이 바로 본각(本覺)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본각(本覺)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훈습(薰習)이라고 합니다. 본각에서 주어지는 본각 귀환의 의지가 현실화되는 것이 ‘비로소 깨달아감(始覺)’입니다. 이 본각 귀환의 여정이야말로 인간존재가 지닌 삶의 희망이요, 당위(當爲)이며 궁극적인 목적이 됩니다.
생명의 본원적 완전성으로 돌아가려는 이 본각(本覺)의 귀환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완성시킬 때 ‘시각(始覺)이 곧 본각(本覺)’이라는 경지가 펼쳐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무상(無常)으로 무너지지 않는 금강신(金剛身)을 얻는 불괴락(不壞樂)의 대락(大樂) 불국토의 실현이 이루어지게 되길 원(願)하는 것입니다.”
혜공은 원효의 대답을 듣고 각(覺)의 의미를 조금 더 명확히 이해하려고 했다.
“본시 각(覺)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심체(心體)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함이며, 망념을 여읜 상(相)이란 허공계와 같아서 두루 하지 않은 바가 없어서, 법계일상(法界一相)이며 오직 청정한 진여자성(眞如自性)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바로 여래의 평등한 법신인데, 이 법신에 의하여 비로소 본각(本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말씀하신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원효의 대의의 설명에 대해 혜공의 엄밀한 이해가 일차적으로 정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생사(生死)의 근본은 그 자체가 없는 것인데, 그 자체가 없기 때문에 별도로 유전할 것도 없지요. 현생에 유전할 것이 없는데, 그 자체에서 어떻게 움직임이 생기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래장(如來藏)에는 생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불각(不覺)과 각(覺)이 거취를 같이 가지는 일각(一覺)이라는 말입니까?”
혜공의 질문에 원효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였다.
“예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데로 사상(四相)은 오직 일심(一心)뿐인 것이고, 각(覺)이라 하는 것은 곧 두 가지가 있으니,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말하는데 본각이란 이 심성이 불각상(不覺相)을 여읜 것을 말하니, 이 각조(覺照)의 성질을 본각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자체에 대지혜 광명으로서 법계를 두루 비친다.’의 뜻이 함의(含意)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본각의 훈습의 힘에 의하여 비록 시각(始覺)이란 이 심체가 무명(無明)의 연(緣)을 따라 움직여서 망념을 일으키지만, 차츰 각의 작용이 있으며 구경(究竟)에 가서는 다시 본각과 같아지는 것이니, 이를 시각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시각(始覺)이 불각(不覺)의 대대법(待對法)의 관계를 지니고 있고(欲明始覺待於不覺), 불각은 본각(本覺)에 대대법의 관계를 지니며(不覺待於本覺), 본각은 시각에 대대법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밝히려는 것입니다(本覺待於始覺). 이미 이렇게 상호관계에 있기에 사실 모두가 자성(自性)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성이 없다는 것은 곧 각(覺)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상호 대대법으로 짜여져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상호 대대법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각이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름이 각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성이 있지 않으므로 이름하여 각이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풀어보면, 불각(不覺)은 결국 본각(本覺)에 의지하며 본각은 시각(始覺)에 의지하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미 서로 의지하는 것이라면, 결국 자성이 없는 것입니다. 자성이 없다면 각이 있지 않을 것이요, 각이 있지 않은 것은 서로 상대하기 때문입니다. 상대하여서 이루어진다면 각이 없지 않을 것이요, 각이 없지 않기 때문에 ‘각’이라 말하는 것이지(非無覺故 說明爲覺) 자성이 있어서 ‘각’이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非有自性名爲覺也). 그래서 서로 의타기적(依他起的)으로 존재하는 가설적(假說的) 존재인 것입니다.
불각(不覺)의 뜻은 진여법(眞如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서 그 망념이 있게 된 것을 이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각과 시각과 본각은 상호의존적으로 성립하는 공성(空性)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불각의 상태는 시각과 본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생멸문(生滅門)에 이미 아뢰야식으로 존재하는 본각(本覺)은 곧 자비의 마음이 인간 본성의 지선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선험적(先驗的)인 본각의 존재도 경험적인 시각의 실존적 느낌이 있어야만 인식하게 되며, 번뇌가 실존적으로 느껴지므로, 깨달음의 존재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과 같고, 번뇌를 느끼지 못하는 마음은 깨달음의 기쁨을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에, 실존적 괴로움이 있기에 존재론적 기쁨에 대한 희망이 강렬한 것이며, 이것이 바로 생멸문(生滅門)의 진실인 것입니다.” 원효는 생멸심의 불각이 곧 시각과 다르지 않고, 그 시각이 또 결국 진여심의 본각과 다르지 않다는 대승사상을 피력하고 있었다.
보살 정신에 입각한 원효의 존재론적 혁명도 먼저 실존적으로 자기 마음에 와닿는 괴로움의 번뇌를 씻어내려는 구원에 대한 요구 없이는 초발심으로 발단되지 않으며, 실존적 고통의 본질은 결국 이 생멸의 세상이 안고 있는 무명(無明)의 미망(迷妄)으로 생기는 고통의 바다에서 일어난 작은 물방울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자각함으로써, 소승적 구원에서 대승적 구원으로 마음의 지평을 활짝 열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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