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5권 《평등한 마음》 - 제4장 자비(慈悲) (4)

qhrwk 2026. 5. 12. 07:22

 

제4장 자비(慈悲) (4)

 

“그렇다면 불각(不覺)과 본각(本覺)이 결합한 가운데, 무명(無明)이 없어진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요?”

 

“예... 결국 무명(無明)의 바람에 의하여 바닷물이 출렁거려도, 그 파도가 잠자면 다시 바닷물은 고요한 습성(濕性)을 불변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자세히 비유해 보면, 바다의 물이 바람에 의하여 물결이 움직일 때, 물의 특징(水相)과 바람의 특징(風相)이 서로 떨어지지 않지만, 물은 움직임을 본성으로 하지 않는지라 만약 자성이 움직이는 것이라면 움직이는 특성이 없어질 때 젖는 본성도 따라서 없어져야 할 것이지만, 다른 것을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특성은 비록 없어지더라도 젖는 본성은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중생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도 무명(無明)의 바람에 의하여 움직일 때 마음과 무명이 모두 형상이 없어서 서로 떨어지지 않지만, 마음은 움직임을 본성으로 하지 않는지라 만일 무명이 없어지면 상속(相續)하는 것이 곧 없어지나, 지혜의 본성은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혜가 맑아짐에 의하여 모든 뛰어난 경계를 짓는 것이니, 이른바 무량한 공덕의 상이 항상 끊어짐이 없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히 상응하여 여러 가지로 나타나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불각(不覺)인 마음의 무명(無明)현상을 씻을 수 있는 수염본각(隨染本覺)이라는 여래장의 본질이 현상화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본래 무명이 없어지면, 무명의 ‘바람’도 없어진다는 것에 어울리는 것을 말합니다. 상속(相續)이 없어진다는 것은 곧 업식(業識) 등이 없어지는 것과 같고, 곧 움직이는 상(相)이 없어진다는 것에 합치하는 것이지요.

 

지혜로운 본성이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본각(隨染本覺)이 지닌 신비스럽고 지혜롭고 해맑은 이해의 본성(智性)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치 물을 상속(相續)하는 쪽에서 보면 유동적이지만, 생멸(生滅)하는 쪽에서 보면 부동적이어서, 상주(常主)하는 것도 아니고 단절(斷絶)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건너간 것도 아니고 사라진 것도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물의 습성(濕性)이 파괴되지 않는 것과 어울리는 것입니다.” 원효의 설명에 혜공의 의문은 다시 이어졌다.

 

“염오(染汚)의 업식(業識)을 덜어내는 본각(本覺)의 힘도 해맑은 지혜의 성품이 현상화되는 것이라는 말씀인데, 그 현상화되는 힘이 지닌 불가사의한 활용력이 궁금합니다.” 혜공의 질문이 한걸음 더 나아가 진리가 활용되는 바에 대해 물었다.

 

“예... 여래는 일념(一念)으로 두루 삼세(三世)에 교응을 합니다. 교응되는 바가 시작도 없기에 교응하는 바도 곧 시작이 없습니다. 마치 일념의 원만한 지혜가 가이없는 삼세의 경계에 두루 관통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경계가 끝이 없기에 지혜 또한 끝이 없는 것입니다. 가이없는 지혜가 나타난 바의 현상이므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심식(心識)으로 사량(思量)하고 측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不思議業相) 이름합니다. 이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은 법신불의 공성(空性)이 삼세의 무수한 중생들을 위하여 이타적(利他的) 타수용신(他受用身)으로 나투신 천백억화신의 석가모니불을 상징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곧 중생들이 받아서 활용하게 되는 그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법담은 더욱 깊어져 갔다.

 

“마음이 자기의 무명(無明)과 그 미망(迷妄)을 없앰으로써 부처님이 세상을 법계의 있는 그대로, 즉 존재하는 그대로 여여(如如)하게 바라보듯이, 그렇게 세상을 보는 경지(性淨本覺)를 또한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그러면 그 경지는 어떠한지요?”

 

“돌을 봐도 내가 만든 돌로서, 나무도 내가 만든 나무로서, 나의 소유물로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돌과 나무들이 그리고 기타 생명 들이 어떻게 얽히고설켜 사는가를 해맑게 비춰보는 ‘거울’의 반조(反照)처럼, 나라는 자의식이 없는 그런 무념지념(無念之念)의 본래성(本來性)입니다. 이 여래의 본성인 불성(佛性)이 마음에 가행(加行)하는 원인의 지위로서(如實空鏡 因薰習鏡)의 불성은 우리 마음을 허공처럼 해맑게 하는 힘이 있고, 모든 중생들을 부처로 되돌리는 훈습(薰習)의 힘이 있습니다. 그런 여래장(如來藏)의 출현은 결과적으로 중생들이 오랜 세월 동안 습기로 젖어 왔던 ‘아집(我執)의 번뇌장(煩惱障)’과 아집이 고집스럽게 지탱해 온 모든 ‘소유론적 법집(法執)’을 벗어나는 해방의 복락(福樂)을 심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생멸의 세상에서 살면서 만나는 모든 인연들의 관계를 좋은 복락의 관계로 변하게 해주는 것이지요.” 원효는 원인의 지위에 있는 여실공경(如實空鏡)과 인훈습경(因習鏡)을 여래장의 공(空)과 불공(不空)의 이중성을 말하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었다. 여래장은 법신(法身)의 공(空)이지만, 동시에 보신(報身)의 불공(不空)으로서의 힘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공(空)의 뜻에 의해서도 유(有)를 지을(作)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공(空)이 규정된 공(空)이라면(定空=空執: 공을 일정하게 범주화하여 공으로 고착시키는 의미의 공), 상응하여 유(有)를 지을 수가 없을 것인데, 이 공은 상응적(相應的)인 역공(亦空: 유(有)에 대한 상관적 관계를 띤 공)이므로 유(有)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공(空)을 공(空)하게 한다는 것(空空)에도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존재하는 법성(法性)이 공한 것인데, 이 공은 역공(亦空)이지만 유(有)와 공(空)을 모두 얻을 수 없으니 이와 같은 공을 공(空) 하게 함은 진여문(眞如門)이 있으니, 대품경(大品經)에 보면 ‘일체법은 공(空)하고, 이 공은 역공(亦空)이므로 이름하여 공공(空空: 공을 공하게 함)이라고 부른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두 번째로 진여(眞如)의 유(有)에는 유성(有性)이 없는 것과 같으므로, 공(空)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를 일컬어 공(空)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공(空)은 공성(空性)이 없기에 유(有)를 지을 수 있는데, 이를 일컬어 공공(空空)이라고 이름합니다. 이와 같은 공공은 생멸문에 있습니다. 열반경(涅槃經)에 이르는 바와 같이 이 유(有)와 무(無)를 일컬어 공공(空空)이라고 이름합니다.

 

그래서, 흔히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 함은 ‘공(空)의 집착을 허물고 유(有)를 잉태하고 있으므로, 정공(定空)이 아니라 역공(亦空)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여문(眞如門)에서 공(空)은 법성(法性)의 공성(空性)을 의미하는데, 유(有)와 공(空)은 불일(不一)이기 때문에, 유(有)는 공(空)을 따라오지 않고, 공(空)은 유(有)와 불이(不二)이므로 공(空)은 유(有)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생멸문 안에 포섭되어있는 바가 이(理)인데, 비록 이(理)의 체성(體性)이 다시 생멸상(生滅相)을 여의지만 그렇다고 상주(常住)의 본성을 지키지는 않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그 이(理)가 무명의 인연을 따라 생사를 유전하고 있고, 비록 현실적으로 그 이(理)가 물들어 있으나, 그 자성(自性)이 청정하므로 이 생멸문 중에서도 임시로 불성본각(佛性本覺) 등의 이름이 세워진 것입니다.” 원효는 생멸문도 수연(隨緣) 변화의 측면에서 불공(不空)이나 또한 그 현상은 공(空)의 본질도 함의(含意)하고 있으므로 공(空)이라 부른다는 말씀이었다.

 

“아뢰야식에 있는 여래장은 공(空)이나 동시에 불공(不空)이기에, 그 불공의 보신불적(報身佛的) 공덕(功德)에 의거해서, 중생들이 오랫동안의 미세한 착각이 일어나서 생긴 무명의 습기(業)인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라는 두 가지 망상의 소유를 씻어내 버리고 다시 존재론적 그물망(인드라망)을 맺게 된다는 말씀이군요.” 혜공은 원효의 답을 명쾌하고 집약된 문장으로 다시 말씀하였다.

 

“예 그렇습니다. 진각(眞覺)의 이름이 망상(妄想)과 대대법적(待對法的)인 관계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불각(不覺)을 여의면 진실한 각(覺)의 자상(自相)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진실한 각(覺)은 반드시 불각(不覺)과 상대해서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만약 서로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면 자상(自相)이 없게 되며, 또한 다른 것을 기다려있는 것이므로 자상(自相)이 아니므로, 자상(自相)이 없는 것인데 어찌 타상(他相)이 있겠습니까...하하하”

원효는 오직 구경각(究竟覺)의 본각(本覺)인 부처의 지위에 이르러서야 이 무의식의 근본불각(根本不覺)이 온전히 지워진다고 말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