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장 자비(慈悲) (5)
“그렇지요...하하하... 정확히 바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생멸의 현실 세계에서 모든 번뇌의 근본 원인은 소유욕(所有慾)과 아집(我執), 이것의 무의식적인 아(我) 중심의 심상(心象)을 그냥 두고서는, 아무리 의식의 표상만을 도덕적으로 고치고 바꾸겠다고 고집한들, 그러한 ‘도덕주의적 명분론’은 모두 빛 좋은 개살구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됩니다...하하하” 혜공은 간단히 다시 정리하고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원효의 대답이 흡족함을 표했다.
“바로 그 중생들의 무명업식(無明業識)의 상(相)이 주객이 나누어지기 이전의 마음의 동요와 같이 홀연(忽然)히 일어나서 존재와 소유의 경계를 갈라놓는 것과 상관이 있는 것인데, 홀연히 일어난다는 것은 망념이 갑자기 일어났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망념이 본체가 없으며 진여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라는 의미이지요. 이것은 인간이 참으로 간파하기 어려운 미세한 미망(迷妄)이어서, 원인도 이유도 없이 무명의 바람이 분다는 사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요. 부처의 경계에 이르기 전까진 알아차리기가 어렵긴 합니다만, 아무튼 이 무명의 미세한 원인은 바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마음이 외부의 자극으로 미세한 생각이 떠올라 무의식적으로 어떤 관념이 발생한 데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주관적 견분(能見相)이 생겨 곧 그림을 그려서 경계상(境界相)을 등장시키게 하는 것입니다. 연이어 이것이 제7식인 말라식에 영향을 미쳐 육추(六麤)의 망상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지만 이 경계상(境界相)이 실제로 존재해서 능견상(能見相)이 결과적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혜공의 말씀이 삼세육추(三細: 심층의식, 六麤: 표층의식)로 이어지고 있었으며, 그에 대한 원효의 추가적인 설명이 자세히 더해졌다.
“예...그렇습니다. 세가지 미세한 오염과정이 점차 여섯 가지의 거친 오염과정(三細六麤)으로 커져서 확실하게 나타나게 되는 불각(不覺)에 대한 분석은, 결국 업상(業相)과 업식(業識)의 작용이 모든 무의식과 의식의 현상과 그 작용의 전부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의 작용이 어떻게 해서 노골적인 모습을 나타내는가를 말하는 것인데, 삼계의 모든 법은 마음의 업(業)이 지은 그림(心象)에 지나지 않습니다(三界諸法唯心所作).
마음자신이 움직여서(無明業相-業識) 무명(無明)의 업(業)이 무의식적으로 시작이 되어, 자신을 주관으로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대상을 만들어 내면서도 허상에 불과한 대상을 실상으로 착각하면서 그로 인한 분별망상을 일으키면서, 끊임없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이어가고 집착하면서, 그것을 뜻대로 하기 위해 일을 도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대상을 만들어 내면서도 그러한 대상을 실상으로 착각하면서 망심을 만들어 내고, 이러한 망심에 의해서 또한 대상이 더욱 왜곡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심신의 모든 힘을 자신의 망심이 만들어 낸 미혹의 세계를 유지하는데 쏟고 있지요. 즉 스스로의 마음이 투영한 환영에 마음을 빼앗기고, 거기에 집착하여 여러가지 업을 쌓아가며 생사의 세계를 전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월화(月華)가 강물 속에 비취니 원숭이가 그것을 탐내어 친구들을 데리고 강물이라는 삼계로 뛰어드는 형국과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보면, 업이 전도몽상(轉倒夢想)을 일으켜서 자아(自我)라는 강렬한 주관을 무의식적으로 형성하는 전식(轉識-能見相)을 낳게 되고 그리고 이 전식(轉識)은 그에 상응하는 객관적인 대상을 그리는 현식(現識-境界相)을 낳게 되고, 현식(現識)의 대상이 그러한 알음알이의 식별을 무의식에 지음으로써, 요별경식(了別境識: 全六識)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택일적(擇一的) 성향으로 표상케 하여서(智相), 호오(好惡)의 분별과 아상(我相) 중심의 소유욕이 무의식의 근간이 되게 해서, 좋아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과 싫어하는 것에 대한 괴로움에 상응하는 사념들을 계속 무의식의 마음에 전달하는 상속식(相續識)을 낳게 됩니다. 그 후 그것에 집착하고(執取相), 나의 소유적 욕망을 언어적으로 계산하여서(計名字相) 삶을 오염시키는 갖가지 행위를 일으키고(起業相), 현재에 이어 미래에도 상속되고, 또한 과거의 증상연(增上緣)으로도 나타나게 함으로써, 생멸의 세상살이가 온통 아상(我相) 중심의 업감(業感)으로 물드는 편파심(偏頗心)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원효는 이러한 업계고상(業繫苦相)이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을 짓게 하는 속박의 굴레가 된다는 말씀을 부언하면서, 다만 마음의 무명으로 지은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업환(業幻)에 지나지 않는 환차별(幻差別)이라고 통별(通別)하여 말씀하였다.
“이러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한, 세상을 여여하게 존재하는 그대로 볼 수가 없게 되지요. 중생들은 자기가 객관적으로 사실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중생들은 자기 업식(業識)의 방향과 수준 정도만큼만 세상을 이해하고 말할 뿐입니다.”
원효는 업장(業障)의 결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원효는 업상(業相)과 업식(業識)이 ‘없지 않지만 있는 것이 아니고(諸法不無而非是有), 있지 않지만 아주 없는 것이 아닌 것(諸法不有而非都無)이라고 하여 일체법은 비유비무(非有非無)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모든 분별 업상(業相)은 모두 중생이 스스로 자기 마음에서 지은 자기 분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삼계의 모든 마음은 모두 다 이 꿈과 같아서 마음을 여윈 바깥에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 분별은 곧 자심(自心)을 분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심(自心)으로 나아가서 스스로를 볼 수 없다는 것은, 곧 칼이나 손가락 등이 스스로를 자르거나 가리키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마음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원효는 마음은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으므로 밖으로 자신의 분별심을 그림으로써 세상이라는 영사막에 자신을 투영한다 라고 비유하여 말씀하였다. 현존재의 마음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마음은 자신의 업식(業識)에 의한 업상(業相)을 세상에 그리고 있으므로 세상은 마음의 상분(相分)이며, 그 상분은 실재로 존재자적(存在者的)으로 존재하는 그런 실체가 아니고, 견분(見分)의 한 사이버(cyber)일 뿐이라는 말씀이었다.
원효는 세상에 존재하는 마음의 상분(相分)을 가유(假有)와 가무(假無)로 다시 언표했다.
“가유(假有)를 나타내려 하므로 상분(相分)도 견분(見分)도 있다고 말하고, 가무(假無)를 나타내려 하므로 상분(相分)도 견분(見分)도 없다(無)고 말합니다. 가유(假有)는 유(有)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가유(假有)는 무(無)에 의하여 흐트러지지 않고, 가무(假無)는 무(無)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가무(假無)는 유(有)에 의해 파괴되지 않습니다. 유(有)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으므로 가무(假無)는 완연히 존재하고, 가유(假有)는 결국 무(無)에 의하여 흐트러지지 않으므로 가유(假有)는 완연히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바다에 떠 있는 거품(假有)은 물방울처럼 '있다'고 보이지만, 손으로 터뜨려도(無로 부정해도) 실체가 없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거품은 물(無)의 현상으로 공존하며, 물이 사라지지 않는 한 거품의 가능성은 항상 남아 있게 됩니다. 또한 그릇을 보면, 그릇(假有)의 형태는 있지만, 그 안의 빈 공간(無)이 있어야 쓰임이 생깁니다. 무(無)가 없으면 그릇도 무의미하고, 그릇이 없으면 무(無)의 쓰임도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고로 둘은 서로 의지하며 공존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꿈에 비유해보면, 꿈속 산천(假有)은 생생히 있지만, 깨면 무(無)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꿈이 무(無)에 의해 완전히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깨어난 마음)가 꿈을 가능케 하는 바탕이 됩니다.
윤회에서도 '나(我)'와 '세계'는 가유(假有)로서 무(無)에 의해 흐트러지지 않지만, 애초 실재(實在)가 없어 집착(執着)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는 결국 윤회를 '실체적 고통'이 아닌 허상으로 보게 합니다.
중도적(中道的) 해탈(解脫)의 측면에서도 가유(假有)를 무(無)로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 무(無)속에 가유(假有)의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즉시 깨달음(頓悟)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번뇌(煩惱)·업력(業力)이 가유(假有)라면, 원력(願力)으로 용대(用大)해서 전환이 가능해지면서, 윤회가 곧 고통의 순환이 아니라 구제의 장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효는 이 독특한 논리로 금강삼매경론에서 윤회를 '일심(一心)'의 현상으로 통합하였다. 윤회는 무(無)의 바탕에서 가유(假有)로 노니는 자유로운 활동이 되며, 범부도 즉시 해탈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된다.
“고로 지말불각(枝末不覺)의 무명(無明)이 지닌 이러한 삼세육추(三細六麤)의 업(業)은 실로 꿈같은 마음의 환상(幻相)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의식의 자리에서 생긴 그 업(業)의 존재는 환유(幻有)이므로 가유(假有)이기도 하고 가무(假無)이기도 하다는 말씀입니다.”
원효는 이것은 결국 마음의 존재론적 깨달음의 혁명으로 보고 있으며, 하나의 사라지는 허상(虛像)이며 이슬과 같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말하려 하고 있었다. 업장(業障)을 소멸시킬 수 있는 자체적 원인의 힘(自體相)과 더불어 아뢰야식에 있는 그 여래장이 마침내 생멸 세계의 좋은 외연(外緣)을 만나서 중생의 마음을 존재론적인 방향으로 회심향도(回心向道)시킬 수 있는, 그리고 스스로 마음에서 발의가 되는, 용(用)의 훈습(薰習)으로, 이중화(二重化)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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