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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5권 《평등한 마음》 - 제6장 지혜(智慧) (1)

qhrwk 2026. 5. 12. 07:25

 

제6장 지혜(智慧) (1)

 

“본각(本覺)은 성정본각(性淨本覺)과 수염본각(隨染本覺)으로 이중화되어 있습니다. 성정본각은 순수 본각 자체로서 순수 불성의 현시와 다르지가 않습니다. 성정본각은 곧 보신불(報身佛)의 공덕(功德)과 힘으로써 현시된 법신불(法身佛)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수염본각은 법신불이 예토(穢土)인 생멸 세계에 출현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법신불이 중생들에게 밝은 지혜와 자비를 베풀기 위해 하심(下心)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곧 화신불(化身佛)의 의미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정본각(性淨本覺)의 하심(下心)이 수염본각(隨染本覺)이고, 수염본각이 중생들에게 상구보리(上求菩提)의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곧 시각(始覺)인 것입니다.

 

시각(始覺)은 중생의 마음에 무시 이래로 있어 온 여래장(如來藏)이 눈을 떠서 부처가 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범부각(凡夫覺)에서 시작하여 상사각(相似覺)과 수분각(隨分覺)을 거쳐 드디어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는 수행과정은 중생이 생멸의 세계를 살아가는 시간 전개 방식인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사상(四相)을 거꾸로 소멸시켜 나가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시각(始覺)이 본각(本覺)이듯이, 보이는 실존으로서의 화신불(化身佛)은 보이지 않는 법신불(法身佛)의 공성(空性)과 보신불(報身佛)의 현상적 존재와 다르지가 않습니다. 번뇌(煩惱)를 모르면 진여(眞如)가 나타나려 하지 않듯이 희망의 원력은 탐욕의 욕심과 같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마음의 활용법이 다를 뿐인 것입니다.”

 

원효의 위대한 논리 전개는 부처님의 존재 방식을 설명하는 삼신불(三身佛), 즉 법신(法身)인 진리 본체, 보신(報身)인 공덕 몸, 화신(化身)인 중생 구제 몸과 같이, 부처님의 본체와 수행 결과, 구제 행적으로서의 완성된 부처의 모습까지를 포괄한 것이었다.

 

“법계(法界)의 진리 자체인 일심(一心)의 공한 본질의 위대성인 체대(體大), 그 법계의 불생불멸하는 본질이 존재론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나는 상대(相大), 체대(體大)인 진여법성(眞如法性)인 공성(空性)의 무한한 존재론적 작용이 저절로 용출(湧出)하는 현상, 두두물물의 물체와 접목하면서 다양화하는 용대(用大)는 바로 무한대로 일체처(一切處)에 현존하고 있는 공성(空性)의 광대함을 말하고 있으며, 그것은 곧 구체적 외연의 연기법에 따라 생기하고 소멸하는 색의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때 법신불(法身佛)의 본질인 체대(體大)가 해탈의 근원이며 불생불멸의 태허기(太虛氣)의 원기(元氣)가 저절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보신불(報身佛)의 공덕은 무한한 자비(慈悲)와 지혜(智慧)를 뜻합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모두 취하면서 돌보기를 진여평등(眞如平等)으로 하시는데 그 방편이 자비와 지혜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법신불이 스스로 보신불의 공덕을 존재론적으로 발산하는 것입니다. 예토(穢土)의 성불(成佛)을 화신(化身)이라 하고 정토(淨土)의 성도(成道)를 보신(報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효는 혜공에게 기신론(起信論)에 관해 논의하고자 했던 본인 견해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진여(眞如)가 무명과 망상을 훈습(薰習)하는 정법훈습(淨法薰習)에서 바로 존재론적 혁명이 가능한 지름길임을, 그리고 소유(所有)에서 존재(存在), 아상(我相)에서 무아(無我)로, 집착(執着)에서 종용(從容)으로, 탐욕에서 희망으로, 분별에서 관여로, 마음자리의 방향을 돌리는 마음 활용법의 혁명임을 말씀하고 있었다.

 

그리고 원효는 마음을 존재론적으로 활용하는 길은 우리 마음속에 늘, 그리고 ‘이미 있어 온’ 진여(眞如)의 역동적 에너지인 공성(空性)과 공(空)이면서도 공덕(功德)이 가득한 상태로서의 불공(不空)의 공덕에 대한 믿음(信)에서부터 발단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었다. 이는 진여문(眞如門)의 실재적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종국에는 무애(無碍)를 통해 실현되어지는 원효의 화쟁(和諍) 사상의 주된 맥락이 되었다.

 

원효는 이러한 아뢰야식의 각의(覺義)와 불각의(不覺義)의 이의성(二義性)을 앞서 논의된 일심이문(一心二門)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효가 이러한 이의화합식(二義和合識)으로서의 아뢰야식에 삼세(三細)라는 미세한 마음들을 배대한 것은 당시 유식가(唯識家)에서의 아뢰야식이 막연한 잠재심(潛在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에 비하여, 여기에서는 세 가지의 미세한 마음으로 구체화 되었음을 밝혀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유식가의 아뢰야식은 이숙식(異熟識)으로서 윤회(輪廻)의 주체일 뿐, 그리고 깨달음의 정법(淨法)을 낼 수 없는 생멸식(生滅識)일 뿐이지만, 여기에서의 아뢰야식은 화합식(和合識)으로서 그 중의 불각(不覺) 즉 생멸분(生滅分)인 업상(業相), 전상(轉相), 현상(現相)이 소멸되면, 바로 그 자리가 불생불명분(不生不滅分) 즉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되어 각(覺)의 상태가 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처럼 원효가 삼세(三細)라고 하는 환멸(還滅: 번뇌를 끊고 깨달음의 세계로 돌아가는 상태 또는 그 과정)의 구체적 단계를 제시한 것은 심원(心源) 즉 ‘깨달음의 경지’로 환멸해 가는 수행면(修行面)에 있어서 보다 ‘실천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이 삼세(三細)·아뢰야식설은 당시 중관·유식학파의 양대 주장과의 조화라는 성격을 더욱 잘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원효는 아뢰야식의 각의(覺義)에 의하여 자성청정(自性淸淨)한 각(覺)의 상태로 환멸한 후의 본각(本覺)의 성격 즉 지정상(智淨相)과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에 대하여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두 가지 면으로 배대시킴으로써 심원(心源)에 도달한 각자(覺者)는 깨달은 상태(自利)에 안주하지 말고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적극 노력해야 함(利他)을 역설하게 된다.

 

이것은 바로 속(俗) 가운데에서 진(眞)으로 향해 가는 길(上求菩提)을 명시했던 앞서의 삼세(三細)·아뢰야식설에 비하여 이제는 진(眞)으로부터 속(俗)으로 돌아와 중생과 더불어 호흡을 같이함을 의미하는 것이니 바로 하화중생(下化衆生)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의 이러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겸수(兼修) 즉 진속일여(眞俗一如)의 사상은 금강삼매경론 전편(全篇)에서도 누누이 강조하고 있었던 부주열반(不住涅槃)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출세간적(出世間的) 자리(自利)만이 불교의 진의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깨달음의 세계를 이룩해야 한다(利他)는 대승불교의 정신이 아닐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마음에 모든 미세한 분별의 상념들을 여의고, 소유에 대한 어떠한 무의식적 상념도 일어나기 이전, 절대 존재로서의 절대무(絶對無)인 공(空)의 무념(無念)으로, 일법계(一法界)와 상통하는 일심무념(一心無念)의 경지, 존재의 참모습(實相)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로운 마음(如實智), 이것이 바로 말씀하고자 하는 구경각(究竟覺)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하하하”

 

혜공은 오랜 시간 기신론(起信論)에 관한 원효의 견해를 듣고는 마지막 답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