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5권 《평등한 마음》 - 제9장 지혜(智慧) (4)

qhrwk 2026. 5. 12. 07:31

 

 

제9장 지혜(智慧) (4)

 

“예... 그들의 행한 업을 따라서 이와 같은 과보가 생기지만 짓는 이가 없다는 것이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입니다.”

 

원효는 인연으로 생기는 업(業)과 과보(果報)는 상속하지만 짓는 이도 없고 받는 이도 없고, 짓는 이도 본질이 공성(空性)이며, 받는 이도 본질이 공성이며, 업도 또한 공성이며, 과보도 또한 공성임을 말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공덕도 공성이며, 어떤 죄업도 공성이며, 설사 어떤 한 법이 있어서 열반을 지나간다 하더라도 꿈이며 환영이며, 바로 이와 같이 보는 것이 정견(正見)이요 이와 다르게 보는 것은 사견(邪見)이라는 말씀이었다.

 

“출렁이던 파도는 다시 하나의 바다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설법도 천만 가지로 중생들의 근기와 수준에 따라 소위 팔만 사천 법문으로 펼쳐지지만 결국은 깨달음이라는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흡사 비유하자면, 바람이 불어 일체 사물에 와 닿지만, 산 위에서 부는 바람은 나무꾼을 시원하게 하고 바다의 바람은 어부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나무에 부는 바람도 곡식밭에 부는 바람도 다 각각의 인연을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오지만, 바람의 성품은 하나이듯이 여래가 깨달으신 법은 한가지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법은 이와 같으며 또한 가고 옴은 없지만 듣고 믿고 이해하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깨닫게 되는 바입니다.”

 

“그렇지요. 여래의 깨달음은 하나이지만 바로 화엄경의 가르침은 십삼천(千) 대천(大千)세계 미진수의 게송(偈頌)과 일사천하(一四天下) 미진수의 품(品)이 있다고 하질 않습니까? 여래소오(如來所悟)는 유시일법(唯是一法)이라 하였습니다. 여래의 깨달으신 바는 오직 한 가지 법이지만, 그러나 그 한 가지 법에서 천백억화신으로 천변만화하는 것이 또한 여래의 법입니다. 모두가 중생을 위한 자비의 마음이지요.” 혜공의 말씀이 광대한 우주를 품은 듯했다.

 

“경에 여래의 복전(福田)이 평등하게 하나인지라 다름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중생이 보시함에 과보가 같지 않음을 보게 되는지요? 법보시나 재보시나 무외보시 등을 베풀었을 때 그에 따른 과보를 받음이 알기 어려워서 깊고 깊은 이치를 알고자 합니다.”

 

“여래의 복전(福田)은 평등하게 하나이지요. 그런데 받는 과보는 천차만별하다... 왜 그런가를 물으셨습니다. 보시에 따라 색상과 형상과 집과 근(根)과 재물 등등의 천차만별한 과보의 형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살펴보면 목적과 마음 씀씀이의 흔쾌함과 아끼는 자세 등등이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그러나 삼륜(三輪), 즉 베푸는 자와 물건과 받는 이가 모두 텅 비어 청정함을 늘 관찰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 복전(福田)이 됩니다...하하하...” 원효의 질문도 현실적이었고, 혜공의 답변 또한 적확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세상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니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화엄경을 공부하여 깨달음을 이루는 일도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게으름이란 가장 나쁜 해독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자도 낮잠을 자느니보다 차라리 바둑이나 장기를 두라고 하였다지 않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예 맞는 말씀입니다. 나무를 비벼서 불을 구할 때 불이 나기도 전에 자주 쉬면 불기운이 따라서 소멸하게 되고, 한 터럭 끝으로 큰 바다의 물을 떠내서 모두 다 말리려 하듯이 게으른 사람들이 가지는 행동이나 생각이 늘 그렇지요. 그야말로 얼토당토않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면서 불법을 깨달으려는 사람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본인들은 나름 바른 법을 받아 지녔다고는 하나 무슨 까닭으로 다시 바른 법을 받아 지니고도 번뇌를 끊지 못하는지를 불평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게으른 사람 못지않게 그 중생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따르고, 아만(我慢)을 따르고, 감춤을 따르고, 분심(忿心)을 따르고, 한(恨)을 따르고, 질투를 따르고, 아낌을 따르고, 속임을 따르고, 아첨을 따르는 세력의 구르는 바가 되어 그 구렁텅이를 떠날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능히 바른 법을 잘 받아 지닐진댄 무슨 까닭으로 다시 마음의 움직임 안에서 모든 번뇌를 일으킵니까?” 가슴이 서늘한 혜공의 답이었다.

 

“그렇습니다. 불법에 대해서 많이 듣기만 하고 실재적으로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물에 떠내려가면서 빠질까 봐 두려워 목말라 죽듯이, 불법을 제대로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이와 같을 것 같습니다.” 원효의 비유가 절묘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음식을 늘어놓고도 스스로 주리면서 먹지 않거나, 남의 보물만 세면서 자기에게는 한 푼도 없듯이 불법에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기만 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수행이란 안으로 실다운 덕(德)을 쌓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실다운 덕이 없이 듣기만 많이 한다면 무엇이 이익이 있겠습니까?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입니다.”

 

“예 실로 많이 듣는 것이 허물이 아니라, 듣고도 수행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씀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