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장 입의숭현(立義崇玄) (2)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수전법(數錢法)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수전법(數錢法)이란 ‘수전(數錢)’은 말 그대로 ‘돈을 세는 방법’입니다. 1부터 10까지 돈을 셀 때, 각 숫자가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통해 우주의 진리를 설명하는 논리입니다.
1이 없으면 10이 없다는 말씀인데요, ‘1’이라는 숫자가 있어야 ‘2, 3... 10’이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즉 전체(10)는 부분(1)에 의지해 성립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1안에 10이 들어 있고(一位卽十), 10안에 1이 들어 있다(十位卽一)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1'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이미 '10'으로 가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1안에 이미 10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상입상즉(相入相卽)을 설명하는 논리입니다.”
지엄스님은 1부터 10까지 돈을 세는 과정을 통해 ‘상입(相入)’과 ‘상즉(相卽)’이라는 어려운 철학 용어를 일상 언어로 치환한 논리를 말씀하고 있었다. 상입(相入), 즉 1을 셀 때 이미 10을 향한 기운이 그 안에 들어가 있고, 10안에는 1, 2, 3... 등의 개별 숫자들이 조화롭게 들어 있다는 논리(空間的 融合)와 상즉(相卽), 즉 1이 없으면 10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사실상 1이 곧 10의 근거가 되며 ‘하나가 곧 전체이다’ 라는 화엄의 대전제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라는 말씀(本體的 一致)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숫자의 계산이 아니라, 이 세상의 아주 작은 티끌 하나(1) 속에 온 우주(10)의 정보와 질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화엄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도리를 초보자도 이해하기 쉽게 돈 세는 법에 빗댄 것입니다. 그러면 왜 '돈(錢)'인가? 숫자를 셀 때 가장 흔하고 가시적인 단위가 동전이기 때문입니다...하하하” 지엄스님은 형이상학적인 '공(空)'이나 '연기(緣起)'를 설명하기 위해, 누구나 아는 일상의 행위인 ‘돈 세기’를 가져와 철학적 도구로 삼은 것이었다. 수전법(數錢法)의 비유를 통해 지엄스님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나’라는 존재(1)가 결코 우주(10)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위대한 선언이었다.
“혹시 이 비유가 '십현문(十玄門)' 중 구체적으로 어느 문(門)과 연결되는지, 법장 스님께서 말씀해 보실 수 있을까요?”
지엄스님의 수전법(數錢法, 돈 세는 비유)은 그의 화엄 사상의 핵심 정수인 십현문(十玄門) 중에서도 특히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과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을 설명하는 결정적인 도구로 쓰였다.
순간 의상의 생각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내용들이 있었다.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온 우주)가 머금어져 있다... 여기서 ‘한 티끌’은 수전법(數錢法)의 숫자 1에 해당하고, ‘시방세계’는 숫자 10에 해당하지 않을까? 하나가 곧 여럿이요, 여럿이 곧 하나이다...중중무진(重重無盡)...스승님께서 돈을 세며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은 ‘관계의 그물망’이다...독립된 존재는 없다. 숫자 1은 2, 3... 10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 의미를 갖는 것이다.
1을 셀 때(현재)는 이미 지나온 0과 다가올 2~10(과거·미래)이 그 찰나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시간 또한 독립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찰나의 순간 속에 ‘영원’이 담겨 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내가 돈 한 잎(1)을 옮기면 전체 숫자(10)의 상태가 변하듯, 나의 작은 행동 하나가 우주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통찰이다. 결국 스승님의 논리는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현실 세계가 바로 깨달음의 장소임을 역설하고 계신 것이다...’
“예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에서는 1을 세는 순간 이미 10이 그 뒤에 갖춰져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 과거와 미래가 한 찰나에 조화를 이룸을 나타내는 것이고,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에서는 하나(1)와 여럿(10)이 서로의 영역을 받아들이지만(相容), 자기 자신의 모습은 잃지 않습니다(不同).
그리고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에서는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인 관계가 걸림 없이 자유로움을 나타내며, 인다라망격계문(因陀羅網格界門)에서는 그물코마다 달린 보석들이 서로를 끝없이 비추듯, 모든 존재가 서로를 투영하고 있는 것을 보여 줍니다.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에서는 아주 작은 티끌(1) 속에 거대한 세계(10)가 질서정연하게 들어가 안주하고 있음을 보여 주며, 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顯俱成門)에서는 1을 강조하면 10이 숨고, 10을 강조하면 1이 숨지만, 사실은 동시에 성립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에서는 순수한 하나(純)와 섞여 있는 여럿(雜)이 서로 덕(德)을 갖추어 원만함을 나타내며, 십세융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에서는 과거·현재·미래의 시간들이 서로 격절(擊節)된 듯 보이지만, 한 생각 속에 모두 녹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에서는 이 모든 조화가 결국 '한 마음(一心)'의 움직임에 의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탁사현법생해문(托事顯法生解門)에서는 구체적인 사물(數錢法 등)을 빌려 심오한 진리를 드러내어 그 이해를 돕게 됩니다.”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이 복잡한 논리와 개념들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불법을 생각으로만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관점의 전환’을 위해서였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비록 작은 존재(1)일지라도, 내 안에 우주의 전체성(10)이 들어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겸손과 자존감을 회복하게 되고 또한 저 상대방인 사람(1)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10)임을 인드라망의 비유로 체계화하여 진정한 자비심, 즉 타인에 대한 자비를 이끌어내기 위함이며, 지금 이 순간을 잘 사는 것이 결국 영원인 무한(無限)의 시간을 잘 사는 것임을, 즉 찰나의 소중함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엄스님은 수전법(數錢法)과 십현문(十玄門)은 결국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無礙)를 지향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었으며, ‘돈 한 잎을 세는 그 평범한 행위’ 속에 우주의 질서가 다 들어 있다는 화엄의 ‘미소(微笑)’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이후 지엄 스님이 처음 세운 십현문(古十玄)은 제자인 법장스님에 의해 약간 수정되어 완성(新十玄)된다. 하지만 그 뿌리는 지엄스님이 수전법을 통해 보여준 ‘연기(緣起)의 법칙’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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