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6권 《법계연기》 - 제7장 일승보법(一乘普法) (3)

qhrwk 2026. 5. 15. 20:19

 

제7장 일승보법(一乘普法) (3)

 

“수거일법진섭일체(隨擧一法盡攝一切)라 하였다! 하나의 법을 듦에 따라 일체를 다 거두어들인다. 사물의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로 인해 일법(一法)이 일체법(一切法)인 것이다. 바로 ‘무측(無側)’이다! 이 ‘무측(無側)’은 하나의 법(法)이 곧 일체의 법계를 포괄하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완전하게 균등하게 일체를 섭(攝) 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중심 하나가 주변 일체를 무측으로 포용하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의 무중무변(無中無邊)·무변무측(無邊無側) 원만한 원리를 나타내는 말이다. ‘무측’은 ‘측(側)’이 한쪽으로 기울음이나 편파를 뜻하므로, 이를 부정한 ‘無側’은 일체 법이 중도(中道)의 균형 속에 머물며 좌우·중변(邊)의 구분 없이 원만하게 상호 관철하는 의미인 것이다.”

의상의 화엄의 독창성을 강조하는, 무중(無中)·무변(無邊)과 함께 무변무측(無邊無側)의 원리를 형성하는, 하나의 현상이 일체를 다 포섭하는 특징을 강조하는 ‘무측(無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중심 하나가 주변 일체를 무측으로 포용하며,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층위를 통해 모든 법이 상호 관철·융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변행덕(無邊行德)이 갖추어져 있는, 삼승(三乘)을 초월한 원만무상돈교법륜(圓滿無上頓敎法輪)을 생각해야 한다! 들어가는 바 없으므로 들어가지 못하는 바가 없는(無所入故無所不入也), 그렇게 하여 얻는 공덕(功德)도 또한 얻는 바 없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바가 없는(無所得故無所不得也), 삼세가 다하도록 이르지 못하는 바가 없는, 상대적인 언설(言說)이나 개념의 범주를 벗어나는, 그와 같은 가르침을 펼쳐야 한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이 사상적으로나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수준이 될지는 몰라도, 사람들의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얼마나 실천적일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의 번뇌와 관련하여 이러한 가르침을 얼마나 잘 실천할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느낄 수가 있으며, 또한 자기의 삶에 실제로 적용할 수 있을까?” 의상의 고민은 하나의 온전한 실천적 수행 방편으로, 단혹(斷惑)을 이처럼 화엄의 도리로 이해해야만 ‘진정한 단혹(斷惑)’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동일한 지행(智行)의 서로 다른 형식과 서술들, 논리 전개에 있어서 층차(層差)가 심한 단계들, 상호 이질적으로까지 보이는 다양한 이론들을 어떻게 일관성 있고 질서 있게, 그리고 통합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그것들을 하나의 일관된 체계로 묶어서 서로 모순 없이 소화할 수 있는 상위이론이나 관점은 과연 무엇일까?”

 

의상은 중국불교의 절정기인 당(唐)과 교류하며 당시 불교이론의 수준과 추이에 시차 없이 부응하여 소화하며 전개해 냈다. 특히 통일 신라 전후 시대에, ‘교판(敎判)적 관점의 이론 수립’이라고 하는 시대적 요구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사형께서 늘 하셨던 말씀이 ‘열면 무량의무변의(無量義無邊義) 뜻으로 근본을 삼고, 합하면 이문일심(二門一心)의 법으로 요체를 삼아서, 이문(二門) 안에서는 온갓 것을 허용하되 산만하지 않고, 한량없는 뜻이 일심(一心)에서 비로소 같아져서 혼융(混融)하게 되고, 이런 까닭에 개합(開合)이 자재(自在)하고 입파(立破)가 무애(無碍)한, 열어도 번거롭지 않고 합하여도 협소하지 않으며, 세워도 얻음이 없고 깨뜨려도 잃음이 없는 이러한 것이 바로 묘술(妙術)이어야 하며 종체(宗體)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는데, 나는 과연 어떤 대답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의상은 원효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최상위 이론으로 삼아 다른 모든 불교 이론들을 융섭(融攝)하고 하나의 체계 안에서 질서 지우는 작업의 구체적 접근을 화엄 사상에서 구하고 있었다.

 

“모든 불교 이론을 오종(五種)으로 계층화시켜서, 화엄경의 십지(十地)에 배당해 보면, 삼승(三乘)인 대승의 가르침으로는 7지(地)의 경지를 넘지 못하고, 극대승(極大乘) 일승(一乘)인 화엄에 의해서야만 8지(地)에서 10지(地)까지의 경지로 나아가 궁극적인 깨달음을 성취하게 된다. 그리고 연기(緣起)에 대해 삼승과 일승의 관점에서 각각 보게 되면, 삼승의 입장(三乘緣起)에서 본 관점은 ‘연(緣)이 모이면 있고 연(緣)이 흩어지면 없다’는 것으로 대변시킬 수 있는 한편, 일승의 입장(一乘緣起)은 ‘연(緣)이 모여도 있지 않고 연(緣)이 흩어져도 없지 않다’는 관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연(緣)에 따라 있다거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있다거나 없다고 말할지라도 이미 연(緣)에 따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있다는 것이 꼭 있는 것이 아니요, 없다는 것이 꼭 없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곧 알 수 있다. 또 그러므로 ‘꼭 있거나 꼭 없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緣)을 따를 때라도 늘거나 주는 것이 아니고, 꼭 있거나 꼭 없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연(緣)을 따를 때라도 곧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다.

 

삼승(三乘)의 관점은 사물을 연(緣)의 합산(合散)으로 본다는 점에서 연기적(緣起的)으로 이해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있음(有)과 없음(無)의 두 가지 치우친 오해(常見과 斷見의 二見)에 빠져 공(空)의 중도적 진실에서 이탈해 버리는 위험성을 지니는 반면, 일승(一乘)의 관점은 연(緣)의 합산(合散)에 상관없이 항상 공(空)으로 봄으로써 연기론의 근본 취지에 철저히 부합한다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뜻을 연(緣)에 따라 말할 수 있으니, 맞지 않음이 없으며 또한 맞는 바도 없다. 맞는 바가 없기 때문에 꼭 자기 입장이라 할 것도 없고, 자기 입장이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옳다거나 그르다고 할 것도 없다. 이러한 일승연기(一乘緣起)의 법은 단순히 정식(情識)으로 헤아려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정식(情識)으로 헤아려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멀리서 구하지는 말아야 한다. 곧 정식(情識)을 돌이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인 것이다. 보이는 것을 따라가면서 마음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들리는 것을 따라가면서 들리는 대로 취착(取着)하지 않으면 곧 그것이 말미암은 바를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존재의 참다운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

 

의상은 이 일승연기(一乘緣起)를 증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행방법으로는 ‘返情論’을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사람들의 인식에는 모든 사물의 실체성과 고정성에 입각하여 파악하려는 뿌리 깊은 성향이 자리 잡고 있다.

 

소위 ‘세계 이해와 경험의 선입(先入) 범주(範疇), 즉 하나의 틀과 익혀온 버릇’이라고 할만한 이 인식적(認識的) 습벽(習癖)으로 인해 세계를 분리와 집착으로 경험하게 되며, 이러한 인식적 오해와 혼란, 즉 과거의 버릇대로 무자각하게 ‘그릇된 이해 방식’에 그대로 휘말려 들어가는 상태를 교정하여서 ‘있는 그대로’의 실제(實際)를 이해하는 지혜를 발휘하고 세상을 무집착(無執着)의 자유와 평안으로 경험하게 하여 그로 인해 나타나는 자비의 정서를 실천하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