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장 동수정업(同修淨業)
지엄스님의 입적 후 어느덧 두 해가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일곱 차례나 당으로 건너가 오랫동안 당 고종(高宗, 재위 649-683) 가까이에서 숙위(宿衛)의 신분으로 있으면서, 신라와 당 사이의 정치·군사적 현안을 조정하고 협상하는 중개자이자 지휘자 역할, 외교 창구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김인문(金仁問)이 지상사(至相寺)로 의상을 찾아왔다. 어두운 저녁이었다. 두 사람은 주위를 물리고는 조용히 의상의 거처에 앉아서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스님... 최근 당나라의 유병(遊兵)과 여러 병사들이 주변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를 습격하려고 계획하고 있던 것을 문무왕이 알고는 군사를 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듬해 당(唐)의 고종(高宗)이 저를 불러서 도리어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들이 우리 군사를 청해 고구려를 멸하고도 우리를 해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라고 되묻고는, 신라의 대외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곧 저를 옥에 가두려 하고 있고,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들이 군사 50만 명을 조련하여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치려고 치밀히 계획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습니다.” 의상은 놀라워하며 다시 물어보았다. “본국의 승상(丞相) 김흠순(金欽純)과 김양도(金良圖) 등이 이곳 당나라에 와서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구금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고종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를 치려고 하고 있다는 숙위의 이야기를 들으니 놀라울 따름이오”
의상의 말씀에 따르면, 김양도(金良圖)와 김흠순(金欽純)은 문무왕 9년(669) 당에 사죄사로 파견된 인물이었고, 당시 시대적 상황을 비추어 볼 때, 김흠순 등이 일찍이 비밀리에 자신들에 대한 당의 의심을 피하며 긴급한 상황을 조정에 한시바삐 전하기 위해, 의상에게 일러 본인들보다 한시라도 급하게 앞질러 귀국하여 당의 침략계획을 조정에 알리기를 부탁한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하여, 의상은 결국 함형(咸亨) 원년, 문무왕 10년(670) 경오(庚午)에 귀국을 결심하고 그 사정을 조정에 알리게 되었던 것이다. 의상은 본인이 전달해야 할 정보가 단순한 외교적 소식이 아니라 국가의 존망과 직결되는 중요한 사안이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김인문(金仁問)은 의상과 은밀히 의견을 나누고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급히 자리를 떴다.
“당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기밀이 신라에 미리 자세히 알려질 경우에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우려하여 김흠순 일행을 억류했다는 소문이 틀린 것 같지는 않구나...음...”
이처럼 첨예한 외교적 상황에서 의상은 승려의 신분으로 당나라를 떠나 신라에 돌아가 그러한 사실을 알렸다는 것은 그만큼 본인에게는 위험을 무릅쓴 어려운 결정이었음을 의미한다. 촌각을 다투는 사안으로 의상은 파악하고 있었다.
어렵사리 결정한 의상의 귀국길은 무엇보다도 어느 누구에게도 쉽게 알려져서는 안되는 일이었지만, 의상은 과거 당에 처음 도착하여, 등주(登州)의 한 신도의 집에서 식객으로 있었을 때에 신세를 졌던 곳에는 마지막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떠나고 싶었다. 그때 당시 그 집에는 선묘(善妙)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의상이 그 집에 잠시 머무는 동안 그녀는 그에 대한 연모의 정을 잠시 가졌었다. 하지만 의상은 선묘의 마음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어 매번 선묘의 마음을 거절하였던 일이 있었다. 의상의 단호함에 결국 선묘는 의상의 불법 성취를 기원하도록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했던 선묘에게 의상은 작별인사차 잠시 들렀으나, 때마침 선묘가 자리를 비운 터라 끝내 얼굴을 보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 그 후 이를 들은 선묘는 의상을 보지 못하고 보낸 것을 못내 가슴 아파하며, 결국 안타깝게도 그녀는 의상의 귀국길에 호법신이 되겠다는 장엄한 서원을 세우고는 바다에 몸을 던져 황룡으로 변신하여, 거친 풍랑으로부터 의상의 배를 호위하며 무사히 신라 땅에 닿게 하였던 것이다.
의상은 귀국한 즉시 문무왕에게 당에서 들었던 내용을 직접 아뢰게 되니, 왕이 매우 염려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방어책을 물었다.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이 아뢰기를, “근래에 명랑(明朗)법사가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수해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라고 하였다. 신라 시대의 고승으로 명랑(明朗)법사의 외삼촌이 자장율사였으며, 그의 자는 국육(國育)이었다. 명랑이 아뢰기를,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그곳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을 개설함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신라는 밀교가 흥행하여 호국 의식으로, ‘문두루(文豆婁)’라는 비법을 승려들이 곧잘 행하곤 했었는데, 범어로는 '무드라(mudra)'의 음역어이자 신인(神印)을 뜻하는데, 명랑법사가 당나라에서 배운 이 비법은 불단을 설치하고 다라니를 독송하는 가운데 오방불(五方佛)과 사천왕 신상을 세워 원통형 나무에 오방신(五方神)의 이름을 적어 악귀를 굴복시키는 행위로 국가의 재난을 물리치려고 하였다.
이후 당 고종은 그들의 침략계획의 사실이 신라의 조정에 알려지게 된 것에 대해 크게 화를 내며 조서를 내려 경사(京師)에 있던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유인궤(柳仁規)를 계림도대총관(雞林道大摠管)으로 삼고, 위위경(衛尉卿) 이필(李弼)과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李謹行)에게 보좌하도록 하여 병사를 일으켜 신라를 쳐들어올 계획을 본격적으로 시행하려고 하고 있었다. 당의 조정은 신라에 있는 문무왕을 부정하고 동생인 김인문을 신라의 왕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당의 행동이 결국 문무왕의 당과의 전쟁의 불씨를 더욱 지피는 일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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