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7권 《생사자재》 - 제1장 계리합기(契理合機) (1)

qhrwk 2026. 5. 15. 20:25

 

제1장 계리합기(契理合機) (1)

 

분황사(芬皇寺)의 가을하늘은 구름한 점 없이 맑았다. 원효는 집필을 이어가고 있었다. 불교의 핵심 정수를 정리한 화엄경소(華嚴經疏),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등 수많은 저서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원래 불도(佛道)에서의 도(道)의 면모는 온전히 맑음 그 자체이며 깊고 그윽하다. 간격 없이 그윽하다. 매우 큰 것이며 넓고 멀다. 끝없이 멀고 멀다. 허깨비의 변화와 같은 유위법과 무위법 이 두 가지가 실재하지 않는다. 생겨남도 없고 모습도 없으며, 내면과 외부를 포괄하여 모두 없앤다. 모두를 없앤다는 것은, 두 가지 계박(繫縛)에서 벗어나고 이해를 드날리는 것이다. 두 가지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 맛(一味)과 같아져서 고요하면서도 신통의 경지이다. 그러므로 능히 삼세에 노닐면서 평등하게 관찰하고, 시방에 유행하면서 몸을 나타낸다. 법계에 두루 존재하여 중생을 구제하고, 미래세가 다하도록 더욱 새로워진다....

 

모든 존재와 이론은 본질적으로 같으면서도(同), 현상적으로는 다르다(異). 본질의 차원(同)은 모든 강물이 결국 바다로 모이듯,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국 하나의 진리(一乘)를 향해 있다. 근본 마음(一心)의 자리에서 보면 모든 주장은 하나로 통합된다. 방편의 차원(異)에서는 중생의 근기(이해 수준)가 다르기 때문에, 부처님은 그에 맞춰 다양한 설명을 하셨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교설이 다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하나의 진리를 상황에 따라 수만 가지의 법문으로 펼쳐내는 것(開)이 그것이고, 흩어져 있는 여러 교설을 하나의 근본 원리인 일심(一心)으로 귀결시키는 것(合)이 중요하다. 상대방의 주장이 ‘내 것과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니라, 전체 진리의 한 단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공정한 입장에서 보면(至公), 옳지 않은 것이 없고(無非), 지극히 사적인 입장에서 보면(至私), 옳은 것이 하나도 없다. 집착을 버리고 보면 서로 다른 주장들이 사실은 하나의 진리를 보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효는 다양성 존중에 관해 서로의 다름(異)을 인정하되, 더 큰 틀에서의 같음(同)을 찾아내어 화합을 도모하는 공통 가치 추구에 관한 생각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늘 보름 법회에서 자신을 다스린다는 것은 대체 어떤 마음을 내어야 하는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원효는 어김없이 분황사에서 나와 보광전(普光殿) 약사여래불께서 바라다보시는, 맞은편 장터를 찾아 보름 법회의 첫 일성을 쏟아내고 있었다.

 

“화엄경에 훌륭한 보살은 중생들에 대하여 열 가지 마음을 내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항상 이익을 주려는 마음(利益心), 크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大悲心), 안락케 하려는 마음(安樂心), 편안히 머물게 하려는 마음(安住心), 가엾이 여기는 마음(憐愍心), 거두어 주려는 마음(攝受心), 수호하려는 마음(守護心), 내 몸과 같이 여기는 마음(同己心), 스승같이 여기는 마음(師心), 도사(導師)같이 여기는 마음(導師心)을 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내고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말고 곧바로 각자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이것이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 보십시요. 사람을 대할 때 이익을 주려고 하는가? 불쌍하게 여기는가? 안락하게 하려 하는가? 편안히 머물게 하는가? 내 몸과 같이 여기는가? 스승과 같이 여기는가?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귀한 부처님의 교법을 듣고 실천하게 되면 이른바 영원히 그 불법의 진리에서 퇴전하지 아니하며(永不退轉), 모든 부처님께 청정한 믿음을 깊이 내게 되며(深生淨信), 법을 잘 관찰하게 되며(善觀察法), 중생과 국토와 세계와 업의 행(業行)과 과보와 생사와 열반을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귀족 중에 태어나서 귀족으로 머문다는 뜻입니다(生貴住). 즉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태어나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며 부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의법출생(依法出生)이라는 말도 있듯이, 법에 의해서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실로 우리 모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불계(佛戒)를 받으면 불위(佛位)에 오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왕자로 태어나면 그가 설사 큰 잘못을 범했더라도 서민이 되지는 않듯이, 불법 중에서 절대 퇴전(退轉)하지 않습니다. 다시 부처님의 처소에서 청정한 믿음을 내며, 부처님의 법을 잘 관찰하며, 부처님의 진정한 제자로서 중생과 국토와 세계와 업행과 과보와 생사와 열반 등을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원효의 첫 일성의 큰 목소리가 장터를 쩌렁쩌렁하게 울릴 때, 흰 수염이 긴 한 사내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확실한 부처님의 제자가 되고, 확실한 부처님의 아들딸이 되었다면 반드시 수학해야할 법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리고 어떤 선근을 닦아야 합니까?”

 

“그 참 좋은 질문이요, 말씀대로 그렇게 되었다면,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일체 부처님 법을 분명히 알아야 하며,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일체 부처님 법을 닦아 모아야 하며,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일체 부처님 법을 원만히 하여야 되며, 일체 부처님 법의 평등함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예컨대 만약 왕족으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왕가의 법도를 배워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부처님 법을 훌륭히 잘 배움으로써, 그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정진하게 해서, 이는 세 세상 가운데서 마음이 평등하게 하고, 법을 듣고는 스스로 이해하고, 궁극에는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不由他敎) 연유입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법과 궁극의 법은 모두 자신에게 이미 내재(內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질문하신 닦아야 하는 선근은 모두 일체 중생을 구호하며, 일체 중생을 요익케 하며, 일체 중생을 안락케 하며, 일체 중생을 가엾이 여기며, 일체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재난을 여의게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청정한 신심을 내게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다 조복함을 얻게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열반을 증득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깊은 부처님의 법을 듣고 마음이 견고하여 물러서지 않게 되면, 이른바 부처님이 있다. 부처님이 없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않게 되는 것이며, 법이 있다. 없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보살이 있다. 보살이 없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보살행이 있다. 보살행이 없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보살이 수행해서 벗어난다. 수행해서 벗어나지 못한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게 됩니다.

 

또한 과거에 부처님이 있었다. 과거에 부처님이 없었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미래에 부처님이 있을 것이다. 미래에 부처님이 없을 것이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현재에 부처님이 있다. 현재에 부처님이 없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부처님의 지혜는 다함이 있다. 부처님의 지혜는 다함이 없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삼세가 한 모양이다. 삼세가 한 모양이 아니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눈앞의 문제만이 아니고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 또는 부처님의 지혜에 대해서 있고 없음을 듣거나 의심하여 물러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자성생명(自性生命) 부처님과 자성생명 법문과 자성생명 불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위와 같은 일로 절대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진실한 법과 궁극의 법은 모두 자신에게 이미 내재(內在)되어 있다는 사실을 더욱 굳건히 믿어야 합니다. 바로 태산부동(泰山不動)의 결코 물러서지 않는 자세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껏 보면, 많은 사람들이 불법 가운데에 발심(發心)을 했다가도 이런 저런 이유로 물러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들이야 말로 응당 이 넓고 큰 법(廣大法)을 배우기를 권할지니, 이른바 하나가 곧 많은 것(一卽多)이다 말하며, 많은 것이 곧 하나(多卽一)다 말하며, 글이 뜻을 따르고(文隨於義) 뜻이 글을 따르며(義隨於文), 있지 아니한 것이 곧 있는 것이고 (非有卽有), 있는 것이 곧 있지 아니한 것이며 (有卽非有), 상(相) 없는 것이 곧 상이며(無相卽相), 상이 곧 상이 없는 것이며(相卽無相), 성품 없는 것이 곧 성품이며(無性卽性), 성품이 곧 성품 없는 것(性卽無性)인 이러한 원융무애(圓融無碍)하고 상즉상입(相卽相入)한 이치를 배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정진해서, 마음에 걸림이 없고(心無障礙) 법을 듣고는 스스로 잘 알아서(卽自開解)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시길(不由他敎) 바랍니다.”

 

원효는 반복해서 진실한 법과 궁극의 법은 모두 자신에게 이미 내재(內在)되어 있음을 더욱 분명히 강조하고 있었다.

 

원효는 펄쩍 장마당 앞으로 뛰어나와, 저 양나라 지공처럼 금빛 칼 달린 석장(錫杖)을 가지고 와서는 휘휘 저으며 두 팔을 들썩들썩하며 게송을 이어 읊기 시작했다.

 

“발심필경이불별(發心畢竟二不別) 처음 발심한 것과 마지막 성불이 둘이 다른 것이 아니지만,

여시이심선심난(如是二心先心難) 이와 같은 두 가지 마음 중에 발심이 어려우니라.

자미득도선도타(自未得度先度他) 자신은 제도를 얻지 못했으나 다른 사람을 먼저 제도하나니,

시고아례초발심(是故我禮初發心) 그러므로 나는 처음 발심한 사람에게 예배합니다.

초발이위천인사(初發以爲天人師) 처음 발심하면 이미 천신과 인간의 스승이 되나니,

초승성문급연각(超勝聲聞及緣覺) 성문과 연각보다 훨씬 수승하니라. 나무 아미타불”

 

법문을 듣고 있던 대중 가운데에 가사를 입은 한 객승이 앞으로 걸어 나와 무릎을 꿇고는 원효에게 간절히 질문하며 법을 청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물든 옷을 입고 출가하였으면, 어떻게 하여야 범행(梵行)이 청정(淸淨)하게 됩니까? 또 보살의 지위로부터 가장 높은 보리의 도(道)에 이르겠습니까?”

 

원효는 잠시 그의 눈빛을 바라다보고는 “법명이 무엇이요? 스님” “예 정념(正念)이라 하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장터에서는 처음 보는 장면이라 쑤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처음 보는 얼굴인대?” “저기 다른 지방에서 오셨나 보구먼” “얼굴은 말쑥한 스님이야...”

원효는 질문을 하고 꿇어앉아 있는 스님을 일으켜 세우고는 법문을 이어갔다.

 

“음... 정념(正念)이라는 좋은 법명을 가지셨군요. 이 법명의 뜻은 바른 기억으로 모든 존재와 사건과 사실들을 그 실상(實相)과 같이 바르게 기억하고 알아 챙김을 의미합니다.” 원효는 실상과 같이 바르게 기억하여 알아 챙긴다는 뜻의 법명을 가진 정념 스님의 질문으로 인하여 청정범행이 무엇인가에 대해 법문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