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장 계리합기(契理合機) (2)
“청정범행을 이루려면 우선 ‘안쪽’의 자아와 ‘평화롭게 ’ , ‘조화롭게’ 지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나 외부 환경과도 ‘청정(淸淨)’하게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고 , 그와 더불어 자기 자신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선 심신을 편안하게 하고,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이 잘났다고도 생각하지 말며, 그렇다고 또 스스로를 얕볼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이미 멸해버린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이르지 않은 미래를 걱정할 것 없고, 현재가 공적함을 알면서 살아간다면, 삶이 더욱 가뿐하고 환희로울 수가 있지요...하하하” 원효는 가득 모여든 대중들을 위해서 우선 마음속 이야기를 간단히 말씀하셨다.
“하지만 온전히 본인의 삶을 중생 구제만을 위해 출가를 하신 스님의 경우라면, 그 청정범행이란 사람이 불법에 근거하여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무거운 책임감이 더 한층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데는 신구의(身口意) 셋과 다시 그 셋이 업을 지어가는 것인데, 그래서 여섯 가지가 되며, 스님 같은 경우에는 거기다가 출가하여 법의(法衣)를 입고 불법을 신행한다는 조건이 따르므로 불법승 삼보(三寶)와 계율(戒律)을 굳게 지킨다는 특수한 점이 있기 때문에, 자세히 깊이 관찰해보면 청정범행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쉽게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몸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선하지 않은 것이며, 법답지 않은 것이며, 혼탁한 것이며, 냄새나는 것이며, 부정한 것이며, 싫은 것이며, 어기고 거역하는 것이며, 잡되고 물든 것이며, 송장이며, 벌레 무더기인 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청정범행이라고 할 만한 점이 있는가?... 따져 보면, 몸뚱이는 선한 점이란 없습니다. 오히려 나쁜 점만 많습니다. 법답지도 못합니다. 온갖 음식을 먹어서 혼탁하기도 합니다. 하루만 몸을 씻지 아니해도 냄새를 참을 수 없습니다. 냄새가 많은 것은 부정하기 때문이지요. 살다 보면 이 몸뚱이가 싫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지수화풍 사대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늘 서로 어기며 갈등하고, 잡되고 물든 것입니다. 잠만 자도 그대로 송장이며 만약 죽고 나면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그래서 만일 몸의 업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곧 가는 것, 머무는 것, 앉는 것, 눕는 것, 왼쪽으로 돌아보는 것, 오른쪽으로 돌아보는 것, 구부리는 것, 펴는 것, 숙이는 것. 우러르는 것일 것입니다. 곧 몸의 업이란 모든 몸짓이 해당 되는 것입니다. 몸짓은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일체 동작들입니다. 몸짓은 일정하지 않아서 정한 바가 없지요. 곧 아무런 실체가 없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실체가 없는 몸의 모든 동작을 어찌 청정범행이라고 하겠습니까. 몸짓에서 찾아봐도 청정범행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청정범행은 없습니다.
만일 말이 범행(梵行)이라면, 범행은 곧 음성, 숨, 입술, 혀, 목구멍, 뱉고 삼킴, 막고 놓음, 고저(高低), 청탁(淸濁)등이 모두 동원이 되어 겨우 말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말소리의 실체는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말을 청정범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청정범행은 여기에도 없습니다.
만일 뜻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곧 지각이며, 관찰이며, 분별이며, 가지가지로 분별함이며, 기억이며, 가지가지로 기억함이며, 생각이며, 가지가지로 생각함이며, 환술이며, 꿈일 것인데,
만일 뜻의 업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곧 생각함[思]이며, 생각[想]이며, 추위며, 더위며, 주림이며, 목마름이며, 괴로움이며, 즐거움이며, 근심이며, 기쁨일 것입니다. 청정범행이 과연 이와 같은 어수선한 한순간의 마음 작용에 있을까요?... 여기에도 또한 범행은 없습니다.
만일 부처님이 범행(梵行)이라면, 색온(色蘊)이 부처인가? 수(受)온이 부처인가? 상(想)온이 부처인가? 행(行)온이 부처인가? 식(識)온이 부처인가? 상(相)이 부처인가? 수호(隨好)가 부처인가? 신통이 부처인가? 업행(業行)이 부처인가? 과보(果報)가 부처인가?
또 그의 업행이나 과보에서 부처님을 찾아보아도 역시 없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가 없는데 무슨 청정범행이 있겠습니까?
또 만일 교법이 범행(梵行)이라면, 적멸(寂滅)이 법인가? 열반이 법인가? 생기지 않음이 법인가? 일어나지 않음이 법인가? 말할 수 없음이 법인가? 분별없음이 법인가? 행할 바 없음이 법인가? 모이지 않음이 법인가? 순종치 않음이 법인가? 얻을 바 없음이 법인가? 따지고 보면 그 무엇도 법이라고 할 만한 실체는 없습니다. 법이라는 실체도 없는데 하물며 실체 없는 법이 무슨 청정범행이겠습니까?
만일 스님이 범행(梵行)이라면, 예류향(豫流向)이 스님인가? 예류과(果)가 스님인가?
사다함(斯多含) 향(向)이 스님인가? 사다함(斯多含) 과(果)가 스님인가? 일래향(一來向)이 스님인가? 일래과(一來果)가 스님인가? 불환향(不還向)이 스님인가? 불환과(不還果)가 스님이가? 아라한(阿羅漢)향이 스님인가? 아라한(阿羅漢)과가 스님인가? 삼명(三明)이 스님인가? 육통(六通)이 스님인가?
그냥 하나의 사람입니다. 각각의 이름에서 어찌 스님을 찾겠습니까. 설사 삼명(三明)과 육통(六通)을 얻었다 하더라도 역시 하나의 사람일 뿐입니다. 스님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디서 청정범행을 찾을 것입니까?” 원효는 청정범행이란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스님들의 행동거지를 두고 말씀하고 있었다.
“만일 계율이 범행(梵行)이라면 계단[壇場]이 계율인가? 청정한가를 묻는 것이 계율인가? 위의(威義)를 가르침이 계율인가? 갈마를 세 번 말함이 계율인가? 화상(和尙)이 계율인가? 아사리(阿闍梨)가 계율인가? 머리를 깎는 것이 계율인가? 가사를 입은 것이 계율인가? 걸식함이 계율인가? 정명(正命)이 계율인가? 아무리 따져 봐도 어디에도 계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계율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청정범행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관찰해 보면, 몸에 취할 것이 없고, 닦는데 집착할 것이 없고, 법에 머물 것이 없으며, 과거는 이미 멸하였고,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고, 현재는 공적하며, 업을 짓는 이도 없고, 과보를 받을 이도 없으며, 이 세상은 이동하지 않고, 저 세상은 바뀌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원효는 청정범행의 실상을 관찰하기 위해서 몸과 몸의 업과 말과 말의 업과 뜻과 뜻의 업과 부처님과 교법과 스님과 계율 등 청정범행이 있을 만한 곳을 낱낱이 분석(分析)하고 천착(穿鑿)하였다. 이와 같이 분석하였을 때 그 관찰이 성취되어 몸이나 수행이나 법이나 일체 시간성(時間性)에나,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것이, 본질에 있어서는 불변(不變)하며 부동(不動)하여 굳이 청정범행이라고 할 것이 없음을 말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관찰하면, 범행이란 법은 얻을 수 없는 연고며, 삼세의 법이 다 공적(空寂)한 연고며, 뜻에 집착이 없는 연고며, 마음에 장애가 없는 연고며, 행할 것이 둘이 없는 연고며, 방편이 자재한 연고며, 모양 없는 법을 받아들이는 연고며, 모양 없는 법을 관찰하는 연고며, 부처님 법이 평등함을 아는 연고며, 일체 부처님 법을 갖춘 연고이므로, 이와 같은 것을 청정한 범행이라 이름 하는 것입니다.” 원효는 어디를 찾아보아도 범행이란 법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청정범행이고, 그것이 청정범행이 성취된 모습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청정범행의 실상을 깨닫고 나서 범행이라는 이름에 구애받지 아니하여 자유롭더라도, 다시 중생을 교화하는 데 지혜를 닦아야 합니다. 또한 설법을 들은 뒤에는 큰 자비한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중생을 관찰하여 버리지 아니하며, 모든 법을 생각하여 쉬지 아니하며, 위 없는 업을 행하고도 과보를 구하지 아니하며, 경계가 요술과 같고, 꿈과 같고,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고, 또한 변화와 같음을 분명히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옳은 경계며 훌륭한 견해라 하더라도 그것에 걸리면 곧 진흙탕에 빠진 것이 됩니다. 자신이 진흙탕에 빠져서야 누구를 교화하겠습니까?
능히 이와 같이 관행(觀行)함으로서 더불어 서로 응하여 모든 법에 두 가지 이해를 내지 아니하면 일체 부처님 법이 빨리 앞에 나타날 것이며, 처음 발심할 때에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며, 일체 법이 곧 마음의 자성임을 알 것이며,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다른 이를 말미암아 깨닫지 아니할 것입니다.”
“모든 존재의 상반된 견해인 있음과 없음, 옳고 그름, 생과 멸, 너와 나 등 이와 같은 견해를 내지 아니하면 비로소 진정한 불법을 알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의 청정범행을 하늘처럼 바라보는 청정범행의 실체를 여실히 분석해 주셨습니다. 청정범행과 청정하지 못한 일체 행에 대하여 이제는 구름을 벗어난 보름달과 같이 환하게 하늘을 비추고 땅을 비추고 사람을 비추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념 스님의 맑고 총명한 마음이 더불어 주위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불교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7권 《생사자재》 - 제4장 계리합기(契理合機) (4) (0) | 2026.05.15 |
|---|---|
|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7권 《생사자재》 - 제3장 계리합기(契理合機) (3) (0) | 2026.05.15 |
|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7권 《생사자재》 - 제1장 계리합기(契理合機) (1) (0) | 2026.05.15 |
|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6권 《법계연기》 - 제10장 동수정업(同修淨業) (제6권 終) (0) | 2026.05.15 |
|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6권 《법계연기》 - 제9장 득법(得法) (0) | 2026.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