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계의 근본취지[受菩薩戒法序] 강의 19
보살계의 근본취지[受菩薩戒法序] 강의 19
問 具縛凡夫가 根微垢重하니 若令受戒면 毀犯益多요 若不觀根이면 返遭淪墜리라
[원문] 문, 번뇌의 속박에 얽매인 범부가 근기는 미약하고 업장은 무거우니 만약
그들에게 계를 받게 한다면 헐뜯고 범하는 일이 더욱 많을 것이다.
그와 같은 근기를 관찰하지도 않고 계를 받게 하면 도리어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 발생하리라.
(해설) 충분히 염려할 수 있는 질문이다. 앞에서 58조항의 계목을 대강 살펴보았으나
누구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중생이 그대로 보현보살 문수보살이요,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 없이
같다고 하여 사람이 곧 부처님이라는 차원 높은 지견은 아무나 받아드리고
소화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자신이 받아드리기 어려운 가르침은 비방하기가 일쑤다.
자신의 소견이 좁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법이 옳지 않다고 하여 법을 나무란다.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비유하자면 맹인이 자신의 눈이 어두운 것은 생각하지 않고 태양빛이 어둡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면 당연히 그 잘못에 대한 과보로 악도에 떨어지게 된다.
이 문제는 비단 질문자의 한 사람의 일에 그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의문이다.
答 只為垢重障深하야 令受佛戒하니 現行煩惱雖厚나 佛乘種子無虧니라
[원문] 답, 다만 번뇌가 무겁고 업장이 깊은 이를 위해서 그들에게 부처님 계를 받게
하는 것이다.
현재 일상생활에 드러난 번뇌가 비록 두텁고 무거우나 불승(佛乘)의 종자는 줄어들거나
이지러지지 않는다.
(해설) 사람들이 염려하는 무거운 번뇌와 깊은 업장이란 무엇인가?
흔히 말하는 탐욕과 진심과 어리석음이 아니다.
모함하고 음해하고 질투하고 교만스런 등등의 팔만사천번뇌도 아니다.
그와 같은 인간의 부정적인 것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그대로 문수보살이며 보현보살이며
부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을 말한다.
사람을 보는 관점이 잘못된 것을 말한다.
그것이 업장이며 번뇌다.
모든 사람의 진실한 본성을 보는 관점만 바꾸면 문제는 끝이다.
그래서 이 심지법문(心地法門)인 보살계를 설하여 사람이 곧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만약 범부를 집착하여 보현보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곧
부처의 종자를 없애버리는 것이 되며, 만약 중생을 집착하여 부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부처님을 칭찬은 못할망정 비방을 해서야 되겠는가.
부처의 종자를 더 성장하게는 못할망정 없애서야 되겠는가. 당치 않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비록 탐욕과 진심과 어리석음과 모함하고 음해하고 질투하고 교만스런 등등의
팔만사천번뇌가 꽉 차서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있다하더라도 사람이
본래로 부처님이라는 그 부처의 씨앗은 줄어들거나 이지러지지 않고 추호만한 손실도 없다.
마치 다이아몬드가 변소에 들어가서 똥 속을 헤매다가 거름무더기를 거쳐서 밭이나 논에서
뒹굴다가 또다시 흙 속에 묻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난다 하더라도 다이아몬드의 성질과
빛은 변하지 않으며 그 가치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이치와 같다.
그러므로 온갖 번뇌무명에 휩싸여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살아가는 우리들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염려할 것이 아니며 자기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에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고 자신 있고 편안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어떤 부처와 어떤 조사도 이 외에 다른 것은 없다.
이렇게 외치는 근거는 늘 이야기 했듯이 보고 듣고 말하는 이 사실 이 능력인 사람 사람들의
본래 가지고 있는 참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출처: 다음카페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