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
♣ 무아 ♣
불교철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무아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나(自我)”라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무아는 연기(緣起), 공(空), 무상(無常) 등과도 긴밀히 연관되는 개념으로, 연속적이며 불변의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한다. 따라서 부단히 변화 중에 있으며, 어느 정도 독립적인 기능을 하는
현상으로서의 자아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되는 것이다.
이름이나 명칭은 그 대상을 변화하는 사물로서가 아니라, ‘고정된’ 사물로, 그리고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결합체가 아닌 실체라고 믿게 하는 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 개체’라는
표현 뒤에 ‘육체 속에 존재하는 영원불변한실체’라는 간과하기 쉽지만 의미심장한 단서가
따라다니게 되는 것이다.
즉 부단히 변화 중에 있으며, 어느 정도 독립적인 기능을 하는 현상으로서의 자아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이며 불변의 실체로서의 자아가 부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을 고유명사나 보통명사로 지칭하더라도 그것들의 연기적 성격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면 문제가 없다. 문제는 명사가 아니라, 그러한 명사를 사용하면서 우리가
취하는 심리적 태도인 것이다.
무아가 부정적인 표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내용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염세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허무주의를 표방하는 것도 아니다.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온을 근거로 영속적이고 변치 않는 자아가 존재한다는 미망과 집착은
생각보다 오래되고 또 질긴 것이다.
개설
산스크리트어의 anātman 또는 nirātman의 역어(譯語). '무아'가 일반적이지만, 비아(非我)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다. '아트만(ātman, 我)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불교를 다른 모든
철학사상으로부터 구별하는 특징이자 불교의 근본사상이다.
아트만은 인도의 정통적 철학의 여러 학파에 의해 실재라고 간주된 영원불멸의 본체이고, 고정적 실체이다.
불교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생멸(生滅) 변화하는 무상(無常)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영원의
본체와 실체는 인식될 수 없다.
이것을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한다.
원시경전(原始經典)에는 오온무아설(五縕無我說)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색(色)은
무상(無常)이다. 모든 무상한 것은 고(苦)이다. 고(苦)인 것은 무아(無我, anātman)이다.
무아인 것은 사(私)가 아니다.사(私)는 무아가 아니다. 무아는 사(私)의 아(我 : 아트만)가 아니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를 가지고 보아야 한다'라고 설명하고, 수(受)ㆍ상(想)ㆍ행(行)ㆍ
식(識)에 관해서도 위의 정형구(定型句)에 의해 기술하고 있다. 무아설(無我說)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我)라고 생각하는 것 안에는 아무런 실체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
하지만, 실천 주체로서 자기의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아(無我)라는 부정(否定)에 의해 자아에의 집착을 멸(滅)하고 그것을 초월함으로써
자기의 진실한 모습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무아설의 취지이다.
소승에서는 인간존재에 대해서 무아를 말하지만(人無我) 그것을 구성하는 법(요소)의 존재는
부정하지 않는다. 대승에서는 인간존재에 관해서는 물론 그것을 구성하는 법에 관해서도
그 실재성이 부정되고 '무아', 또는 '공'(空)으로 표현된다.
소승의 무아설을 '아공법유'(我空法有)라고 말하고 대승의 그것을 '아법이공'(我法二空) 또는
인법이공(人法二空)이라고 말한다.
만물에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實我〕가 없다는 뜻으로 범어(梵語)로는
아나트만(Anātman), 팔리어(Pali language)로는 아나딴(Anattan)이다. 무아(無我)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뒤 최초로 설파한 가르침이다.
석가모니 이전의 인도사상에서는 상주(常住)하는 유일의 주재자로서 참된 나인
아트만(ātman)을 주장하였으나, 석가모니는 아트만이 결코 실체적인 나〔我)〕가 아니며,
그러한 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내용
무아설은 아트만을 불변의 실체로 인정하는 기존의 인도 사상과는 구별되는 불교 고유의
주장이다. 그러나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아(我)는 부정하면서도 아트만의 상주설
(常住說)과 함께 인도 사상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윤회설을 수용하고 있다.
불교의 시각에서 윤회란 실체로서 존재하는나〔我)〕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범부의 그릇된
인식으로서 존재하는 나〔我)〕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무아윤회(無我輪廻)’라고 부른다.
불교의 무아윤회는 윤회의 주체로서 중유(中有: 사람이 죽은 후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의 시간)
개념을 상정하였으며, 대승불교의 유식학(唯識學)에 이르러 아뢰야식(阿賴耶識: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으로 대체되었다.
구사론(俱舍論)에서는 ‘중유의 상속’ 또는 무상(無常)한 ‘오온(五蘊: 色․受․想․行․識)의
상속’으로써 윤회가 성립된다고 주장한다. 즉 중유라는 개념이 윤회의 주체를 연속시키며,
이것이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업력(業力: 선악의 행위가 남기는 잠재력) 또는 잠세력
(潛勢力: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는 세력)의 상태로 있는 오온이다. 결국 중유의 상속에
의한 윤회는 ‘온갖 번뇌와 업에 의해 오염된 온(蘊)에 의한 윤회’를 의미한다.
아뢰야식을 장식이라 하여 인간의 심층의식으로 상정하였던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을 윤회의
주체로 보았다. 이는 기존의 상속이론보다 진전된 무아설의 일환이다. 아뢰야식은 업의 잠세력을
의미하는 습기(習氣)일 뿐이며 바로 이 점에서 그것은 무아적 존재이다.
불교의 무아설은 ‘나〔我)〕’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
보아서는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다. ‘나’라고 하는 실체가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형이상학적인문제는 불교 수행자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무아는 제법무아
(諸法無我)라는 이름 아래 설명되었고,무아의 생명은 무아의 실천이나 무아행(無我行)이라고
하는 실천적인 면에서 살아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성이 없는 무아이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무아성을
자각하여 수양하고 노력함에 따라 역경을 극복하여 더욱 향상할 수 있음을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이상인 열반은 무아성의 자각 아래 철저하게 무아행이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경지이다. 이 무아는 일반적으로 크게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로 나누어 설명되는데,
신라의 원효(元曉)는 그의 여러 저술에서 명쾌한 해석을 가하였다.
원효는 인무아를 외도(外道)나 범부(凡夫)들의 견해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외도나
범부는 몸과 마음을 한결같이 주재하는 영구불변의 주체가 있다고 보고 이를 ‘나〔我)〕’라고
하나, 우리의 몸과 마음은 오온이 가정적(假定的)으로 화합해 있는 것일 뿐, 특별한 주체라고
인정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인무아’라고 한다고 하였다.
법무아는 소승(小乘)의 수행자들이 갖는 그릇된 집착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모든
대상의 법에 대하여 실아(實我)가 있고 실법(實法)이 있다고 그릇 생각하여, 갖가지 현상들에
대하여 상주하고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하지만, 실은 모두가 인연의 화합으로 생긴
가법(假法)일 뿐, 따로 그 현상들을 있게끔 하는 법아(法我)가 없는 까닭에
‘법무아’라고 한다고 하였다.
또 실천적인 면에서 볼 때 무아는 무소득(無所得)과 무가애(無罣碍)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무소득이란 집착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我〕와 자기 소유물〔我所〕에 대하여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고정불변할 것을 원하여 이를 집착하게 된다.
이와 같은 아집(我執)과 아소집(我所執)이 없는 것이 무소득이다.
무가애는 무애(無碍)라고도 하는데, 장애와 정체됨이 없이 자유자재한 것이다.
이것은 무소득의 무집착이 진전하여 완성된 상태를 가리킨다.
의의와 평가
불교사에서 볼 때 무아라는 말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차차 공(空) 또는 공성(空性)이라는 말로
바뀌어 사용되었고, 선종(禪宗)에서는 무(無)라는 말도 무아의 뜻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원래 아집(我執)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했던 무아의 가르침은 뒤에 어떠한 것도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가르침으로, 마침내는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립의 소멸과
해탈로 발전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