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10권 《법성원융》 - 제7장 만파식적(萬波息笛)

제7장 만파식적(萬波息笛)
신문왕 임오년(682년), 서라벌은 가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견대(利見臺)에 어가가 도착했을 때, 대신들은 이미 긴장한 얼굴이었다. 신문왕이 문무왕을 기리기 위해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신문왕이 이견대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왕께서 용이 되어 이 바다를 지키신다 하셨다. 오늘 이곳에서 그 분(靈)을 뵈올 터이니, 모두 조용히 하라.” 대신들이 합장하고 조용히 왕의 곁에 서 있었다. 바닷바람만이 돌바닥을 스치며 지나갔다.
당시 동해 바다에 거북이 모양을 한 섬 하나가 둥둥 떠오고 있다는 이야기가 떠돌더니, 그 섬에 큰 대나무가 낮에는 둘로 갈라지고, 밤이 되면 하나로 합쳐진다는 소문이 퍼졌다. 신문왕은 그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대신들과 직접 그 섬에 올랐다. 갑자기 하늘에서 먹장구름이 몰려오더니, 바다 위로 검은 구름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대신들이 놀라 뒤로 물러섰으나, 신문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바다에서 용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파도가 거세게 치오르며, 검은 옥대를 물고 해룡이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 용의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 빛 속에서 문무왕의 형상이 비쳤다. 해룡이 천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문이여, 네 마음 잘 알도다. 내가 해룡이 되고 김유신이 천신이 되었으나, 여전히 신라를 지키고 있도다.” 신문왕이 용 앞에 무릎 꿇고 합장했다. “부왕이시여, 감은사를 짓고 이견대를 세워서 신라 백성들의 마음을 다잡고자 하오니 굽어살펴 주옵소서.” 순간 왕의 옥대가 공중에서 두 쪽의 대나무로 변하더니, 자신의 손에 착착 하나의 모습으로 손에 들려졌다.
해룡이 다시 말했다.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나라의 보물로 간직하여라. 피리는 반드시 하나로 되어야 소리가 날 것이고, 그때 이 피리를 불면 나라의 근심 걱정이 모두 사라지리라.” 해룡이 머리에서 검은 옥대를 뱉어내고는 이내 그 자취를 감췄다. 그 순간 하늘에서 천신 김유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 형상이 나타났다. 김유신 천신이 말했다. “폐하, 이 피리는 신라의 마음을 모으는 법음(法音)이 될 것이옵니다. 그 이름은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할 것이오며, 백성들의 두려움을 녹이고, 나라의 운명을 지킬 것이옵니다.” 그때 대나무가 빛을 내며 피리 모양으로 변했다. 신문왕이 떨리는 손으로 피리를 받아들었다. 대신들이 놀라 감격하며 합장했다. 신문왕이 피리를 높이 들며 외쳤다. “부왕의 은혜와 천신의 가호로 이 피리가 우리 통일 신라를 지키리라!”
그날 저녁 어전(御殿)에서 늦게까지 신문왕은 피리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손끝으로 살살 어루만지며 살펴보았으나, 점점 그 피리가 단지 보물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왕은 생각했다. ‘흩어져 있는 내 나라의 백성들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좋을런지...’
순간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아직도 신라의 땅에서 숨죽여 사는 것, 귀족들과 평민들 사이에 놓인 경계, 전쟁의 아픈 기억이 아직도 사람들의 눈빛에 슬프게 스며 있다는 것. 그 모든 마음의 서로 다른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 때 어전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왕이 고개를 들었을 때, 문가에 선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해진 가사를 걸친 노승이었다. 등불의 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고, 눈빛은 마치 오래된 우물처럼 깊고 고요했다. 그는 말없이 문을 지나가더니, 피리 앞에서 허리를 숙여 앉았다.
“원효 스님 아니시오?”
왕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맞이했다. 원효는 왕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왕은 원효에게 피리를 보여주었다.
“폐하, 이 피리는 단지 재난만을 막는 단순한 신물(神物)이 아닙니다.”
“원효 스님, 그렇다면 그 피리의 소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소리란 말이오?”
원효는 미소를 지었다. “이 피리를 두고 ‘적을 물리치고, 병을 고치고, 바람을 다스린다’라고만 말하는 것은, 이 피리가 가진 뜻을 너무 좁게만 보는 것입니다. 이 피리의 소리는 서로 다른 마음의 소리를 분별없이 듣게 하는 평등의 소리인 것입니다. 용으로부터 받은 이 피리의 소리는, 막연한 하늘의 꾸짖음이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을 다시 잇는 소리이어야 함을 아셔야 합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그제야 만파식적의 의미가 완전히 풀리는 듯했다. 그리고 피리의 의미가 그에게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단지 힘에 의해 억눌려 있을 뿐, 구조적 불평등이나 차별 같은 근본적인 갈등은 해결되지 않은 ‘부정적인’ 평화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의 상처를 깊이 헤아리고, 그들의 질투와 분노, 불만과 불안, 기대와 실망 등의 마음의 파도를 하나의 소리(圓音)로 쉬게 한다는 뜻으로, 마침내 그 소리를 듣고는, 그들의 갇혀 있는 마음들을 환희의 연꽃으로 피워 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왕은 피리를 손에 다시 들었다.
“그러하오. 이 피리는 단지 재난을 막는 신물이 아니었오. 그러면 이 피리는 단지 내가 품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라의 모든 사람들의 희망과 꿈을 한곳으로 모으는 소리여야 한다는 말씀이었오. 그렇다면 이 소리가 흐를 때마다 그곳은 하나의 나라가 되게 하고, 그 소리를 듣는 이들이 고통과 아픔을 쉬게 하여 비로소 희망과 꿈을 품게 하는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구려...”
원효는 그 말을 들으며, 가볍게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더 깊고, 부드러웠다.
“오로지 중생의 마음의 안락(安樂)만을 위하는 보살의 원대한 자비는 결코 다하지 않는 까닭에, 한 중생을 위해서 한 먼지 가운데서 한량없는 겁을 지날 때까지 만행을 수행하더라도, 그 마음은 피로하지 않으며, 또한 먼지 먼지마다 다 그러하며 중생 중생마다 다 그러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만약 중생계가 끝나면, 그래서 만약 세계와 내지 세간의 진전, 법의 진전, 지혜의 진전하는 경계가 끝이 난다면 보살의 원(願)도 끝이 나려니와, 하지만 중생계가 끝날 수 없으며 내지 세간의 진전, 법의 진전, 지혜의 진전하는 경계가 끝날 수 없으므로, 보살의 이 큰 행과 원의 선근이 다함 없음을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부디 폐하께서도 바라옵건대 이와 같은 보살 성군(聖君)이 되옵소서.”
신문왕은 원효의 축원에 감동하며 천천히 피리를 입에 가져갔다. 입술이 떨렸지만, 그 떨림은 두려움보다도 진실하게 자신의 마음을 풀어내는 떨림이었다. 그가 숨을 불어넣는 순간, 아주 길고도 청아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마침내 화쟁(和諍)의 음률로 통일 신라 전역을 따듯이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