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10권 《법성원융》 - 제8장 귀일심원 (歸一心源)

qhrwk 2026. 5. 29. 07:08

 

 

제8장 귀일심원 (歸一心源)

 

“아버지…” 그 한마디가 입 밖으로 나왔을 때, 설총(薛聰)은 잠시 숨을 멈췄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아버지가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분황사의 고요였다.

 

탑의 그림자는 낮보다 더 길어져 그의 발끝을 덮었고, 그 안에서 설총은 스스로 자신이 아직 아들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끼기를 애타게 바라며, 그 그림자를 부여잡고 있었다. 설총은 천천히 뒤돌아 탑을 바라보았다. 고요 속에서, 상(像)의 얼굴이 어둠에 잠기며 부드럽게 빛났다. 설총은 가만히 숨을 고르며 그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해가 기울자 사찰의 돌바닥은 낮의 온기를 서서히 놓아주었고, 바람은 오래된 벽돌 틈을 스치며 낮게 숨을 골랐다. 향로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곧게 오르지 못하고, 몇 번이나 방향을 바꾸다 결국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두 손을 모아 이마에 대었으나, 입술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기도란 말을 건네는 일인데,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효는 이미 길 위의 사람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완전히 떠난 존재도 아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그의 법문이 서로의 입속에서 머물고, 웃음이 전해지고, 노래 같은 설법이 장터의 보수(寶手)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떠나신 게 아니었군요.” 별빛이 탑의 옆면에 닿았다. 그 빛 속에서, 원효의 유골로 빚어진 작은 상(像)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있었지만 어쩐지 이전보다 더욱 가까워 보였다. 설총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였다. 절은 부처에게 바치는 마음이자, 아버지에게 올리는 답례였다. 그리고 아직 길 위에 남은 자신에게, 작게 다짐하는 약속이기도 했다. ‘부처는 멀리 있지 않다, 마음은 닫히지 않는 문(門)’ 원효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문 앞에 선 지금, 설총은 마음이 아니라 가슴이 먼저 아파왔다. 글로 정리할 수 없는 감정, 논(論)으로도 법문으로도 묶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조용히 차올랐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당 안을 바라보았다. 설총은 그 상(像)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는 아직… 아버지처럼 살지 못합니다.” 그 말은 고백이었고, 기도였다. 설총은 상(像) 앞에서 조용히 원효의 행적을 기억하며 화엄경 아승지품(阿僧祗品)에서 보살이 십바라밀을 널리 닦는 대목을 읽기 시작했다.

 

“보시를 행하는 일도 말할 수 없고(修行於施不可說)

그 마음 지나간 일 말할 수 없고(其心過去不可說)

찾는 대로 다 보시함을 말할 수 없고(有求皆施不可說)

모든 것을 다 보시함도 말할 수 없네(一切悉施不可說).

 

계행(戒行)이 청정함을 말할 수 없고(持戒淸淨不可說)

마음이 청정함을 말할 수 없고(心意淸淨不可說)

부처님 찬탄함을 말할 수 없고(讚歎諸佛不可說)

바른 법 좋아함을 말할 수 없네(愛樂正法不可說).

 

참는 일 성취함을 말할 수 없고(成就諸忍不可說)

생사(生死) 없는 지혜를 말할 수 없고(無生法忍不可說)

고요함 갖춘 일을 말할 수 없고(具足寂靜不可說)

고요한 데 머무는 일 말할 수 없네(住寂靜地不可說).

 

큰 정진 일으킴을 말할 수 없고(起大精進不可說)

그 마음 지나간 일 말할 수 없고(其心過去不可說)

물러나지 않는 마음 말할 수 없고(不退轉心不可說)

흔들리지 않는 마음 말할 수 없네(不傾動心不可說).

 

일체 선정의 창고 말할 수 없고(一切定藏不可說)

모든 법 관찰함도 말할 수 없고(觀察諸法不可說)

고요히 정(定)에 있음 말할 수 없고(寂然在定不可說)

모든 선정 통달함을 말할 수 없네(了達諸禪不可說).

 

지혜로 통달함을 말할 수 없고(智慧通達不可說)

삼매에 자재함을 말할 수 없고(三昧自在不可說)

모든 법 아는 것을 말할 수 없고(了達諸法不可說)

모든 부처님 밝게 봄도 말할 수 없네(明見諸佛不可說).

 

한량없는 행 닦음을 말할 수 없고(修無量行不可說)

광대한 서원 내는 일도 말할 수 없고(發廣大願不可說)

깊고 깊은 경계를 말할 수 없고(甚深境界不可說)

청정한 법문들도 말할 수 없네(淸淨法門不可說).

 

보살의 법력(法力)을 말할 수 없고(菩薩法力不可說)

보살의 법에 머무름을 말할 수 없고(菩薩法住不可說)

보살의 모든 바른 생각 말할 수 없고(彼諸正念不可說)

보살의 모든 법계(法界) 말할 수 없네(彼諸法界不可說).

 

방편 지혜 닦는 일 말할 수 없고(修方便智不可說)

깊은 지혜 배우는 일 말할 수 없고(學甚深智不可說)

한량없는 지혜를 말할 수 없고(無量智慧不可說)

끝까지 이른 지혜 말할 수 없네(究竟智慧不可說).

 

저 모든 법의 지혜 말할 수 없고(彼諸法智不可說)

청정한 법륜(法輪) 말할 수 없고(彼淨法輪不可說)

저렇게 큰 법의 구름도 말할 수 없고(彼大法雲不可說)

저렇게 큰 법의 비도 말할 수 없네(彼大法雨不可說).

 

저 모든 신통의 힘 말할 수 없고(彼諸神力不可說)

저 모든 방편들도 말할 수 없고(彼諸方便不可說)

공적한 지혜에 들어감도 말할 수 없고(入空寂智不可說)

생각 생각 계속함도 말할 수 없네(念念相續不可說).

 

한량없는 수행(修行)의 문 말할 수 없고(無量行門不可說)

생각 생각 머무름을 말할 수 없네(念念恒住不可說).”

 

설총은 일숙각(一宿覺)이신 신라 시대의 고승이자 당나라에서 육조 혜능대사의 법을 이어받은 영가현각(永嘉玄覺, 675~713) 스님의 불이(不一而不二)의 도리를 마지막으로 영단에 올렸다.

 

“배움은 끊어지고 위없는 한도인은(絶學無爲閑道人)

망상을 제하거나 참됨을 찾지 않는다네(不除妄想不求眞)

무명의 참 성품이 그대로 불성이요(無明實性卽佛性)

환화의 빈 몸뚱이가 그대로 법신일세(幻化空身卽法身).”

 

그 순간이었다. 설총은 분명히 보았다. 상(像)의 고개가...아주 조금...그를 향해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움직일 리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먼저, 그의 숨이 흔들렸다. 향로의 연기가 잠시 멈춘 듯 보였고, 법당 안의 공기가 한 겹 느리게 흘렀다.

 

상(像)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 시선은 분명히 설총을 바라보고 있었다. 꾸짖음도, 위로도 아니었다. 다만 “여기 있었구나” 하고 알아보는 눈빛이었다. 설총은 고개를 숙였다.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마치 오래된 먼지가 가라앉은 뒤에야 사물이 제빛을 드러내는 것처럼, 향이 다 타들어 갈 즈음, 그는 천천히 울음을 그치고 무거워진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차려 다시 상(像)을 바라보았다.

 

상(像)은 다시 처음의 방향을 향해 고요히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의 일이 환영이었는지, 기도의 끝자락이었는지, 설총은 끝내 판단할 수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법당과 상(像)을 향해 절을 올렸다. 부처에게 올리는 절이었고,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마음의 인사였다. 그리고 동시에, 아직 길 위에 남아 있는 자신에게 건네는 약속이기도 했다.

 

분황사의 밤은 깊어졌고, 홀연히 법당 마당에서 일어난 바람은 다시 돌담을 휘감아 돌며 지나갔다. 그 바람 속에서는 누군가의 웃음 같은 기척이 잠시 섞였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 속으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