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 선생을 기린다 / 법정스님◈
밖에 나가면 편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가 있다.
어떤 편지는 그 자리에서 펼쳐보고, 어떤 편지는 집에 가져와 차분히 읽는다.
첩첩산중 외떨어져 사는 나 같은 경우는 휴대전화가 판을 치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도 편지가 유일한 통신수단이다.
받은 편지는 겉봉에 받은 날짜를 표시하고, 답장을 해야 할 편지와 안 해도 그만인 편지를 가려서 놓아둔다.
그런데 내가 늙어가는 탓인지 마땅히 해야 할 답장도 번번이 거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편지 답장은 편지를 읽고 나서 바로 그 자리에서 써야지 그때의 감흥이 식어지면 이날 저 날 미루다가 끝내는 답장을
못 하고 만다.
산중에 오래 살다 보면 오고 가는 세상의 인사치레도 성글어지게 마련이다.
최근에 연암 박지원 선생이가족과 친지들에게 보낸 서간 첩을 읽으면서 편지에 대한 내 무성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2백여 년 전 우리 선인들의 살아가던 모습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편지들이다.
연암 선생이 60세 되던 1796년 정월에서 이듬해 8월까지 띄운 것으로 선생의 노년에 쓴 편지들이다.
선생이 안의 현감으로 있을 때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나는 고을 일을 하는 틈틈이 한가로울 때면 수시로 글을 짓거나 때로는 법 첩을 꺼내 놓고 글씨를 쓰기도 하는데
너희들은 해가 다 가도록 무슨 일을 하느냐?
나는 4년 동안 [자치통감강목]을 골똘히 봤다. 너희들이 하는 일 없이 날을 보내고 어영부영 해를 보내는 걸 생각하면
안타깝고 안타깝다.
한창때 이러면 노년에는 어쩌려고 그러느냐.고추장 작은 단지를 하나 보내니 사랑방에 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을 게다. 내가 손수 담근 건데 아직 온전히 익지는 않았다.”
손수 담근 고추장을 아이들에게 보낸 아버지의 마음이 뭉클하게 전해 온다.
선생은 9년 전인 1787년에 부인 이 씨와 사별했다.
51세 때. 그 후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고 홀로 살았다.
“관아의 하인이 돌아올 때 기쁜 소식을 갖고 왔더구나. ‘응애 응애’ 우는 소리가 편지지에 가득한 듯하거늘 이 세상
즐거운 일이 이보다 더한게 또 있겠느냐. 육순 노인이 이제부터 손자를 데리고 놀 뿐 달리 무엇을 구하겠느냐.
산부의 산후증세가 심하다고 하니 걱정이 된다. 산후 복통에는 생강나무를 달여 먹여야 한다. 두 번 복용하면 즉시 낫는다.
이는 네가 태어날 때 쓴 방법으로 특효가 있으므로 말해 준다.”
전에 고추장과 여러 가지 밑반찬을 보내 주었는데도 아무 말이 없자 무람없다(무례하다, 버릇없다)고 꾸짖는 사연도 있다.
“전에 보낸 쇠고기 장볶이는 잘 받아서 조석 간에 반찬으로 하느냐? 왜 좋은지 어떤지 말이 없느냐? 무람없다, 무람없어.
고추장은 내 손으로 담근 것이다. 맛이 좋은지 어떤지 자세히 말해 주면 앞으로도 계속 두 물건을 인편에 보낼지 말지
결정하겠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을 감명 깊게 읽었다.
이 책은 연암 선생의 아들 박종채가 엮은 연암의 전기다.
아버지의 뛰어난 문학자의 모습만이 아니라 그 인간적인 면모와 함께 강직한 목민관 시절의 일화도 들려준다.
또한, 이 책은 18세기 영․정조 시대의 지성사와 사회사에 대한 생동감 넘치는 보고서이기도 하다.
-산방한담(山房閑談) 월간 맑고 향기롭게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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