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붓다의 선물] 성불이란 무엇인가

qhrwk 2026. 7. 27. 12:29

마하반야 바라밀, 우리도 부처님 같이...






[붓다의 선물] 성불이란 무엇인가

김재영
(사)우리는선우 상임법사


1. 너무 거룩해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부처님

선우 형제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렇게 건강하고 밝으신 모습으로 법석에서 만나,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고 진지하게 공부하는 이 인연을 참으로 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좀 전에 성태용 대표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저도 과거에 불교 공부를 하면서 점차로 부처님이 멀어져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거룩해서 가까이 근접할 수 없는, 닮아갈 수 없는, 아득한 '神', '神佛', '신 같은 부처님'... 그것이 과연 부처님의 진면목일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사학 전공이었는데, 학교에서 역사를 통해 배운 부처님과, 신앙현장에서 불자들이 생각하는 부처님이 너무나 큰 거리(괴리)가 있어 심각한 갈등을 느꼈습니다.

대승경전에 나타나 있는 영원불멸하신 부처님. 법화경에 보면 무량수(無量壽, 아미타유스), 무량광(無量光, 아미타브하), 즉 한량없는 생명의 부처님이 나타나 있습니다. '아미타'는 '헤아릴 수 없다' '유스'는 '생명'이란 뜻입니다. 한역하니 '무량수'입니다. 우리가 아미타불을 무량수불이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2600년 전 사라쌍수 아래서 돌아가신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기에 계시면서 중생을 구제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2. 역사속 실존인물, 고타마 붓다

그런 부처님과 우리가 공부했던 역사적인 부처님,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 무엇이 참다운 부처님의 모습인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출구를 찾아서 초기경전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초기경전에는 부처님을 '고타마 붓다'라고 부릅니다.‘고타마 부처님’

'석가모니불'해도 한국불교도들에게는 너무나 신격화되고 아득한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다 가까이, 내 가까이, 나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인간 붓다, 그 부처님을 초기경전에서 불렀던 것처럼 '고타마 붓다'라고 불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선우님들께서도 너무나 아득한 무량수 무량광 부처님만 생각하지 마시고, 내 가까이에 있는, 내가 먼저 손을 내밀면 따뜻한 체온으로 잡아주실 수 있는, 내가 부르면 '그래 내가 여기 있어'하고 응답해줄 수 있는, 그런 가까운 인간붓다부터 먼저 찾으시길 부탁드립니다. 무량수불, 무량광불을 부정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런 부처님의 세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찾아야할 분은, 가까이 있는, 나와 호흡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체온을 함께 할 수 있는, 고락을 함께 할 수 있는, 내가 터놓고 가슴을 열고 내 아픔을 호소할 수 있는, 잔잔히 미소 지으면서 들어줄 수 있는, 그런 인간 붓다부터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그런 부처님을 '고타마 붓다', '고타마 부처님'이라고 앞으로 여러분들도 꼭 그렇게 불러주시고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3. 불자라면 부처님에 대한 예의로 반드시 암기해야할 세 가지 연대

그리고 제가 법회 때마다 말씀드립니다만, 부처님에 대해서, 고타마 붓다에 대해서 좀 구체적으로 알아야합니다.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영원을 뛰어 넘는, 그런 식으로만 알 게 아니라 구체적인 모습으로, 구체적인 사건으로, 구체적인 삶을 좀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세 개의 연대.
법회 때마다 다시 한 번씩 상기시켜드리고 있는데, 오늘도 다시 한 번 기억해봅시다.


태어나신 것은 기원전 624년. 예수가 태어나시기 꼭 620년 전입니다. 예수는 BC 4년에 태어났습니다. 고마타부처님은 620년을 앞서가신 대선각자이시고 대선구자이십니다. 예수도 고마타 붓다의 영향을 막대하게 받았고 성경속에서도 부처님의 영향이 그대로 미치고 있다는 것,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고타마 부처님께서는 기원전 624년에 인도 가빌라국의 왕자로 태어나셨습니다. 흔히 '태자'라는 명칭을 쓰지만 그것은 적절치 못합니다. 가빌라국은 농업을 주로 한 조그마한 나라였습니다. 당시 인도는 16개의 국가들이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인데, 두 개의 강대국이 있었고 많은 작은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두 개의 강대국의 하나가 코살라국이고, 가빌라국은 그 코살라의 속국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타마를 너무 높여서 큰 나라의 태자인 것처럼 부르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고, 고타마 '왕자'님이 맞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것은 80세가 지난 기원전 544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할 또 하나의 연대는 기원전 589년. 이 해는 고타마께서 성도하신 해. 깨달으신 해. 대각을 성취하고 부처님 되신 해입니다. 35세 때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독실한 불자라면 이 세 가지 연대만은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나 친지 친구들이 물어오면 자신 있게 알려드리세요.


4. 지독한 피부병에 걸린 제자를 손수 구완하고 장례 치르신 부처님, 그리고 무상법문

어느 때 부처님께서 강대국 코살라의 수도인 사밧티(금강경에는 사위성이라 표현하고 있는)에 계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45년의 안거를 지내시는 중에, 그 사밧티의 제타숲절(기원정사)에서 거의 반을 보내셨습니다. '안거를 지내셨다'는 것은 '일 년을 보내셨다'는 뜻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동안거, 하안거 두 번이지만, 인도에서는 비오는 계절에, '우안거' 한 번입니다.

그때 많은 제자들 가운데 '팃사'라는 젊은 비구가 있었는데, 수행 중에 병에 걸렸습니다. 온몸에 종기가 생기고, 종기 속에 고름이 차고, 고름이 곪으니 몸에서 냄새가 나는, 지독한 악성 피부병이었습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부티가따 팃사'였습니다. '악취를 풍기는 팃사' 그런 뜻입니다. 심한 병에 괴로워하니 동료비구들이 병구완에 애를 많이 썼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낫지 않고, 온 몸에 고름이 줄줄 흐르고 악취가 풍기는 것이 더 심해져갔습니다. 친구를 살려보려고 애를 썼지만 백약이 무효였고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쪽 방을 치워 조용히 눕혀 놓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고타마 붓다께서 그것을 아시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아셨는가... 고타마 붓다께서는 24시간 동안 중생을 살핍니다. 잠자는 시간은 하루에 두 시간 정도 됩니다. 고타마 붓다께서 24시간 어떻게 사셨는가 학자들이 연구한 그 시간표가 나와 있어요. 밤에 주무시는 시간은 두 시간 정도 밖에 안 됩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불자들을 만나 상담을 하였습니다. '거룩하게 법을 설했다' 그런 표현보다는 '상담을 통해 도움을 주시다'가 더 적절합니다. 하루에 한번 집집마다 다니면서 탁발을 하시고, 탁발을 하면서 집집마다 축복을 기원해주시고, 돌아와서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또 시간이 나면, 천안으로 세상을 살핍니다. 어디에 고통 받는 중생이 없는가, 어디에 내가 가서 도와줘야할 그런 중생은 없는가. 그렇게 하면서 시간을 보내시는 겁니다. 이런 걸 생각하면, 우리는 지금 얼마나 게으른지 참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삼매에 들어 세상을 살펴보니, 당신 가까이서 사랑하는 제자 팃사가 다 죽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팃사가 홀로 누워있는 방으로 달려가서 병구완을 하십니다. 피고름이 엉켜, 옷이 몸에 다 달라붙어 있는 팃사의 몸에, 따뜻한 물을 뿌려 손수 옷을 벗겨 내셨습니다. 손에 고름이 묻고, 악취가 진동하지만, 마지막 속옷까지 다 벗겨내서, 부처님께서 손수 그 옷을 빨았습니다. 너무 악취가 진동하니, 아무리 부처님이라도, 제자들에게 그런 일을 함부로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옷을 빨아 가져다 널고, 깨끗한 수건으로 팃사의 몸을 깨끗하게 닦아 냈습니다. 목욕을 시켰어요. 악취가 풍기고 손에 피고름이 가득 묻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팃사 비구는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거룩한 세존께서, 내 생명보다 우러러 받드는 그 세존께서 그렇게 수고를 하시니, 눈물을 흘리면서 그걸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몸을 깨끗이 닦아낸 후, 인도의 뜨거운 날씨에 금방 마른 팃사의 옷들을 다시 입힙니다. 비구로서의 품위를 회복하도록.

팃사 비구는 숨을 거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숨을 막 몰아쉬고 있는 사랑하는 제자 팃사의 손을 잡으시고 머리맡에 앉아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십니다. '법을 설했다' 저는 그런 말을 쓰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거창하게 하기보다 '이야기를 나눈다', '상담을 한다'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부처님의 심정으로 돌아가서, 여러분의 사랑하는 가족이, 친구가 지금 숨을 거두려고 하고 있다면, 가까이 가서 몸을 깨끗이 닦아내고 손을 붙들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오래지 않아 이 몸 흙바닥에 버려지고
마음 또한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리
그때 덧없는 이 몸 실로 섞은 나무토막 같이 쓸모없으리.

Dhp.41 (법구경. 41게송)


숨 한번 끊어지면 우리 육신은 흙바닥에 뒹굴고, 마음이란 것 또한 사라져버린다 하셨습니다.




무상법문을 통해 깨닫게 되는 우리들의 잘못된 마음에 대한 오해

우리 한국불자들이 많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 마음 하니까, 마음이 영원히 어디에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음을 찾자', '육신은 허망하고 소멸되는 것이지만 마음은 영원한 것이다', '마음은 윤회하는 것이고', '마음은 해탈하는 것이고', '마음은 영원한 생명이고', '자성이다', '자성은 청정한 것이다', '자성을 보아라'... '자성'을 쉬운 말로 하면 '마음'입니다. 선가에서도 '마음을 보면, 마음을 깨달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럽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죠? 대부분 이렇게 다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실로 이 마음 또한 없는 것입니다. '마음 또한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리',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허무하십니까? 육신도 없는 것이고, 마음도 없는 것이라 하니, 허무하십니까?

그렇게 철저하게 비워야 합니다. 조금도, 그 무엇도 집착하지 마십시오. 무엇도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럼 사도에 떨어집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니까, 다음 기회에 자세하게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흙바닥에 버려진 육신은, 나무토막보다 쓸모가 없지요. 나무토막은 쓸모가 많아요. 통나무집도 짓고 장작도 떼고, 유용성이 많아요. 그런데 죽어 나자빠진 송장은 어디다 써요? 악취만 나고 기분 나쁘고 소름 끼치고, 그야말로 쓸모없죠? 원전에도
'쓸모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의 죽음을 보고, 말하자면 무상법문을 하신 것입니다. 무상법문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할 거 없습니다. 이 이상 좋은 무상법문이 어디 있습니까? '그 애지중지하는 육신, 숨 한번 거두고 나면 나무토막보다 못해' 이 한마디로 무상법문은 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영원한 것에 집착해있기 때문에, 그것을 철저히 깨는 것이 무상법문입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 다 이 영원한 영혼이라는 거에 매달려서, 심령의 종이 되어서, 그것만 믿고 천국에 간다느니 지옥에 간다느니 하지 않습니까. 영혼의 노예, 심령의 노예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마음의 노예들입니다. 심령 찾는 거나, 마음 찾는 거나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그것을 철저히 깨는 무상법문은, 결코 허무가 아니고, 결코 단멸이 아닙니다. 참으로 기쁜 법문입니다.

고타마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제자가 숨을 거두니, 사랑하는 다른 제자들과 힘을 합쳐서 장례를 손수, 바로 그 자리에서 치릅니다. 부처님께서는 손수 제자의 염을 하시고 바로 다비(화장)를 하신 겁니다. 인도에서는 원래 당일장이었습니다. 24시간 안에 화장합니다. 인도에 가보신 분들은 보셨겠지만, 갠지스강 그 언덕이 전부 화장장입니다. 연기가 계속 솟아오릅니다. 그 사람들은 간단하게 합니다. 뼈를 그냥 강물에 던집니다. 그러나 그걸 조금도 부정하게 보지 않습니다. 생과 사를 둘로 보지 않는 철학을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5.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부처님!

불(佛)상(相)에 대한 발상의 대전환!

오늘 주제가 성불입니다. 도대체 부처님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부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팃사 비구의 사례를 통해서 보여지는 부처님의 모습을 한번 그려보십시오. 부처님의 참모습, 참다운 인간상, 밤낮으로 중생들의 고통을 살피는 부처님, 주무시지도 않고, 아니 주무시는 동안에도, 대비심으로 살펴보시고 중생 곁으로 달려가시는 부처님! 어디 당신 제자라고만 달려갑니까? 누구든지, 곡예사에게도 달려가고, 노비에게도 달려가고, 국왕에게도 달려가고, 장군에게도 달려가고, 장사꾼에게도 달려가고, 누구에게도 달려가십니다. 제자의 피고름을 손에 묻혀가며 죽어가는 제자를 손수 간병하시는 부처님, 이런 부처님을 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발견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부처님을 몰랐습니다. 인간 부처님이라고 말은 했지만, 실제로 어떻게 인간적으로 살았는지 정보를 많이 알지 못했습니다. 부처님은 바로 이렇게 사셨어요. 세계 3대 성인, 성자 중에 이런 분 계십니까? 이렇게 하신 분은 역사적으로 없습니다. 악취풍기는 옷을 빨아 갈아입히시는 부처님, 죽음의 순간 끝까지 함께 하시는 부처님, 친히 염하시고 장례 치르시는 부처님, 험한 병간호를 몸소 하시고도 잠잠히 미소하며 중생을 살피시는 고타마 부처님, 죽은 이후까지를 환히 밝히시는 부처님........ 장례 후 제자들이, 팃사 비구가 죽어서 어느 세계에 태어났는지를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팃사비구는 어디에도 태어나지 않았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왜? 팃사 비구는 해탈열반에 들었기 때문에,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어서 천당간다는 그런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천당가도 중생의 성질은 그대로 계속됩니다.

이렇듯 다정하신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는 팃사 비구 이야기 하나뿐이 아닙니다. 경전 속에 가득 가득 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모르고, 그런 공부를 안하고, 그 심각한 부처님, 거룩한 부처님만 찾아왔습니다. 그런 부처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까마득한 그런 신이 아닙니다. 이런 인간적인 부처님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 머릿속에 잘못 꽉 박혀 있는 붓다에 대한 이미지, 이 자리에서 모두 타파하시길 바랍니다. 이미지, 상이라는 것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부처님 하면 떠오르는 그 거룩하고 아득한 이미지 때문에, 우리가 부처되기가, 성불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그렇게 상을 깨라, 상을 깨라... 합니다.


6. 초기불교의 이상 - 아라한, 열반

불교수행의 이상은, 목표는 무엇인가? 초기불교에는 아라한이 이상입니다. 줄여서 나한이라 합니다. 아라한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윤회에 들지 않는 사람', '다시 태어나지 않는 성자'입니다. 아라한이 이상이었고, 다른 말로는 열반이 이상이었습니다. 열반이란 '번뇌의 소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탐욕의 소멸'입니다. 번뇌가 소멸되면 윤회에 들지 않습니다. '아라한이 된다'는 말이나 '열반을 성취한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열반을 성취하면 번뇌가 소멸되고(탐욕이 소멸되고)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초기불교의 이상이었습니다.


7. 부파불교의 이상 - 무여열반

그런데 부파불교에 와서, 스님들은 분석하고 책을 써내는 학문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래서 열반도 분석하여, '유여열반'이 있고 '무여열반'이 있다고 나눕니다. 무여(無餘, 찌꺼기가 없는), 무여열반은 '완전한 열반'이란 뜻인데, 무엇이 '찌꺼기가 없는 완전한 열반'일까요? 부파불교 학자들이 구사론이란 논문에서 말하기를, 육신이 소멸되어야 완전한 열반에 도달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지금도 흔히 설법들을 할 때, 무여열반(완전한 열반)은 육신이 소멸되어야 이루어진다는 소리들을 실제로 많이 합니다. 학자들도 그렇게 강의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부처님이라도 육신이 있는 한 번뇌는 어쩔 수 없다', '팔십세 구시나가라에서 육신이 소멸되었을 때 부처님도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이런 망발이!! 그러면 그 이전의 부처님의 45년은 헛것이고, 엉터리, 미완성입니까? 어떻게 전문적으로 공부한 학자들이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열반에 이르려면 빨리 죽어야겠지요, 아니,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게 제일이겠지요. 이것은 부파불교시대의 이야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절대 그런 말하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이 너무 연구를 많이 하다보니, 너무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또 분석하다보니 그런 이야기까지 하는데 그것은 큰 오류입니다.


8. 대승불교의 이상 - 성불

대승불교에 와서, 그런 소극적 은둔주의로는 안되겠다는 자각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안태어나는게 행복이고, 완전히 죽는 게 열반이고, 그게 이상이라 하니 대중들이 힌두교나 다른 종교로 다 달아나고 불교는 텅텅 비게 됩니다. 그래서 인도불교가 망한 겁니다. 부처님의 본래 뜻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일으킨 것이 대승운동이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이상을 제시하게 됩니다. 그것이 성불입니다. 우리도 부처님 되자! 법화경 오백제자 수기품에 보면 모든 사람들이 성불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성불이 약속이 되어 있는 아주 복 받은 분들이세요. 부처님께서 그렇게 수기를 하셨습니다. 제일 처음에 어느 제자가 물으니까, 그래 그대는 성불할 것이다, 그 옆에 있는 다른 여자가 또 물으니까, 그래 너도 성불할 것이다, 나중에는 일체중생이 다 성불할 것이다라고 수기하십니다.


9. 변성성불설 폐기처분

'여자 몸으로 성불할 수 있는가 없는가?' 오랫동안 여자 몸으로는 성불이 안 된다 했습니다. 성을 바꾸어야, 다음 생에 남성으로 태어나서야 성불할 수 있다는 변성성불설이 오랫동안 내려왔고, 지금도 이렇게 주장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주 잘못된 생각이니까, 이 자리에서 확 날려버리세요. 여자 몸 그대로 아라한이 될 수 있고, 열반할 수 있고, 성불할 수 있습니다. 조금도 하자가 없습니다. 인류역사상 이렇게 열린 종교는 없습니다. 경전을 다 남자들이 썼으니, 남성 중심적으로 편벽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처님의 말씀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불은 성에 관계없이 평등합니다.


10. 성불은 '무엇이' 가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

대승불교에 와서 성불의 의미를 높이 내세웠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성불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불은 '무엇이 되는가'가 아닙니다. 이룰 성(成)자를 쓰니, '무엇을 이루는가', '무엇이 되는가'라고 묻는데,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성불은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라고 물어야 됩니다. what is가 아니라 how to라 물어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무엇'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어떻게'를 묻는 것이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무엇'이라 하면, 어떤 존재를 특징지워버립니다. 불교는 무아, 무자성의 원리이기 때문에, 어떤 존재도 특정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그런 거 없습니다. '죽어서 무엇이 윤회하는가' 그런 질문은 틀렸습니다. 그 질문 자체가 불교에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윤회합니까?' 그렇게 물어야 됩니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그렇게 물어왔고, 무엇이 윤회하는가, 윤회의 기초가 무엇인가 끊임없이 논쟁을 벌려왔습니다.

“어떻게, 어떤 조건이라야 윤회합니까?”
“탐진치에 걸리면 윤회합니다.”

이런 겁니다. 발상의 대전환! 여러분은 무엇도 아닙니다. 김아무개, 박아무개, 그것은 가명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기 머릿속에 딱 박혀 있는 김아무개 박아무개 라고 하는 그 상을 철저히 파괴해야합니다. 나는 무엇인가... 영혼인가 육체인가... 얼마나 고민합니까? 대답은, 그 무엇도 아닙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성불입니까? 결론, 부처님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동, 감동에 가득한 뜨거운 박수 짝짝짝)

<2007년 신년법회 중>




김재영 : 동방불교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