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겨 읽는 책이란 무엇일까? ♣
직업이 책읽는 사람이 책에서 즐거움을 찿는다는것은 에스키모인이 눈(雪)을 즐긴다는것이나 비슷한말이
되겠으나 어차피 아는게 책밖에 없으니 한편으로는 그안에서 즐거움을 찿을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렇다고해서 "읽어야하는" 모든 책이 다 즐거이 읽히는것은 아니다.
치밀한 논리에 경탄하고, 기발한 착상에 놀라고, 내용이 갖는 의미의 심중함에 찬탄을 금치못하는 그러한 책들은
많치만 그렇다고 다시 꺼내 읽는 경우는 많치 않다.
그런데 책더미속에서도 항상 꺼내어 되읽게하는 책이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즐겨읽는 책이다. 나에게 그러한 책은 무엇일까?
몇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우선 법정스님의 "산방한담(山房閒談)"을 들고싶다.
"산방한담"은 물론 세계적인 명저도 아니고 그 분의 책으로서 가장 잘 알려진 책도 아닐것이다.
조계산 불일암에서 홀로 지내면서 그때 그때 생각과 느낌을 썻다는 그야말로 그저 한가로운 책이다.
그러나 그 한가로움이 나로하여금 그 책을 다시 펼치게하는것이다.
회원들가운데도 법정 독자들이 많겠지만 그의 글에는 정말 어느땐 배 한조각 서걱 베어 물었을때의 시원함이 있고,
어느땐 대숲에 부딪치는 청량한 바람소리가귀에 들리기도 하는 환청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산방한담은 엄숙한 지혜나 교훈으로 우리를 주눅들게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값싼낭만이나 서정으로 자신을
가볍게하지도 않는다.
그 책을 손에 잡으면 내 손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지고, 나를 무장시키고있는 너무 지나친 지식의 무게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이렇게 살면 되는것을, 이렇게 느끼면 되는것을, 이것만 알면 되는것을 왜 우리는 너무 복잡하게, 너무 예민하거나
무감각하게, 너무 많이 그렇게 살며 느끼며 알고저 하는가...하는 회한을 슬그머니 들게한다.
물론 그는 단순히 글을 쓰지 않는다.
그는 글을 살고, 삶을 쓴다.
글과 삶이 전혀 유리되어 있지않은 경지를 우리는 그에게서 보게된다.
그 만이 살고있는 깊은 산속에서 그와 자연은 남은 알수없는 한가로운 경지의 연애를 하고 있는듯하다.
거의 모든 글들은 이 비밀스러운
"연애담"으로 시작하고있다. 그의 "산방 연애담"을 몇 귀절 여기에 소개하고 싶다
"침묵의 숲이 잔기침을 하면서 한 꺼풀씩 깨어나고 있다.
뒤꼍 고목나무에서 먹이를 찿느라고 쪼아대는 딱따구리 소리가 자주 들리고 산비들기의 구우구우거리는 소리가
서럽게 서럽게 들려오고 있다"
(꺼꾸로보기 p 15)
"장마철이라 앞산에는 연일 안개가 자욱하게 서려있다. 안개속에서 이따금 후두둑낮도깨비가 수작을 떨듯 비를 뿌린다"(안개속에서 p 25)
"오후의 입선 시간, 선실에서 졸다가 대숲에 푸실푸실 싸락눈 내리는 소리를 듣고혼침에서 깨어났다" (빛과 거울 259).
"오늘은 비바람이 몹시 몰아치고 있다, 앞마루에 비가 들이치고 창문에도 이따금씩 모래를뿌리는듯한 소리가
난 섬돌위에 벗어놓은 신발을 들여 놓으려고 밖에 나갔더니 대숲은 머리를 풀어 산발한채 폭풍우에 시달리고
있다" (이 비바람 개이면 263)
"오늘은 바람이 몹시분다.
까칠까칠한 삭풍이 혼이 빠져버린 가랑잎을 이리저리 몰아가고 저리 몰아간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집뒤 굴참나무에서 똑똑똑 쪼던 딱따구리 소리도 오늘은 들리지 않는다.
햇볕이 밝은 창아래 놓아둔 이끼돋은 돌은 한결 새파랗다"
(날마다 새날을 308)
"새벽예불을 마치고 밖에 나가니 반쯤 이즈러진 달이 후박나무에 걸려있다.
빈가지만 남은 그림자를 땅에 드리우고 서있는 나무는 깊은 명상에 잠겨 있는 듯 하다.
달이 나무에 대고 뭐라고 소근거리는것 같은데 귀가 밝지 못해 잘 알아들을수 없다.
아니다 귀는 열려있지만. 내가 이제껏 달과 나무를 참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세계에 끼어들수 없는것이다.."
(사랑의 다리 325)
"바람소리 물소리가 똑같은 자연의 소리인데도 받아들이는 느낌은 각기 다르다.
숲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때로는 사는일이 허허롭게 여겨져 훌쩍 어디론지
먼길을 떠나고싶은 그런 충동을 느낄때가 있다.
그리고 폭풍우라도 휘몰아치는 날이면 스산하기 그지없는 내속은 거칠은 들녁이 된다"
(바람소리 물소리 335)
참으로 서정이 넘치는 명문들이 아닐수 없다.
여기에 다 소개할수없어 생략하지만겨울 숲(249-253)과 저녁노을(303-307), 날마다 새날은 (308-312)은
이 책중에서도 압권이라고 느껴진다.
글도 아름답지만, 이러한 글을 읽으면서 정서의 공감을 나눌수있는 민족도 행복하다고 생각된다.
사실 직업상 , 경험상 많은 나라와 언어를 경험해보았지만, 이것을 번역해본들 공감이 가능할찌 모르겠다.
이러한 경험을 가능케하는 한국의 자연이 고맙기 그지없다.
우리의 자연에서 바람도 비도 눈도 너무 지나치게 압도적이거나 폭군적이어서
공포를 조장하는 정도까지는 아니기때문이다. 그것도 산속에서 지붕이 날아갈
걱정없이,냇물이 집기둥을 뽑아내리라는 위협없이 한가로이 창가에 앉아
소리에 귀를 울일수있는 나라는 사실 그리 많치않다. 이러한 자연이 있기에
이처럼 아름다운 글이 또한 가능한것이다.
그러나 법정의 글이 단순한 서정운문을 넘어서는 이유는 그것이 자연찬미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글의 아름다움은 자연에서 끝난다.
그의 글은 후박나무로,새소리로, 저녁노을로, 안개로, 비바람으로,
저녁예불후의 달(月)로 시작해도 거기에는 생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고
자기 부끄러움이있고, 날카로운 꾸짖음이 있다.
그가 세상을 향해, 인간을 향해 던지는 언어는 매섭다. 꾸짖음의 대상이 분명하고 직설적이다.
사실 사진으로보면 그는 결코 포근하게 보이는 모습은 아니다.
그의 눈은 매우 형형 강렬하다. 범접할수 없는 냉기까지 느껴진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의 매서움은 무슨 그만의 유일무이한 大覺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우주를 호령하는 듯한 大覺의 오도송의 거만함도 없거니와, 주창자 집고 단에 올라 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내지르는 禪房의 괴이한 할도 없다.
그의 매서움, 그의 도덕적 권위는 그 만이 자연으로부터 깨달은 소박한 지혜로부터 오고있다.
그의 지혜는 면벽 10년으로부터 나오는 지혜가 아니라, "뒷산에 올라 해지는 광경을 보고" 난뒤 나오는 지혜이다.
그의 지혜는 섬돌위에 벗어놓은 신발을 들여놓으려고 나갔다가
"머리풀어 산발한채 폭풍우에 시달리는 대숲"을 보고 나오는 지혜이다. 하여 그의 지혜는 무슨 거창한 우주론이나,
후천개벽론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의 지혜는 맥빠진 중용이나 雙非論이나 無無論, 亦無無盡論같은 추상적유식론으로 빠지지 않는다.
그저 소박하고 담백한 지혜이다.
그러나 소박하되 힘이있고,담백하되 분명하다. 이 지혜로부터 세상과 중생을 꾸짖는 애정이 나오는 것이다
사실 살펴보면 그 꾸짖음의 내용 역시 무슨 거창한것도 아니다.
미망을 버리고 성불하라느니,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만이 유일한 진리라느니 하는 그러한 높은 목청도 없다.
그가 분노하고 그가 꾸짖는것은 의외로 "뻔한 공중도덕이요 예절"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오랫만에 버스타고 나들이하다가 창문을 넘어 들어와 자리잡는 승객, 금연칸에서버젓이 담배피는 젊은 친구,
살아있는 장미를 소포를 보낸 상순이, 약수터의 난장판,山居까지 찿아와 글씨를 써달라고 조르는 대학생들에
혀차는 소리들이다.
하지만 문제가 종교내부로 향하면 톤이 달라진다.
"윤달이 드는 해마다 성행하는 예수재(豫修齋)는 불교를 욕되게하는 혹세무민의 장삿속이고, 방생회라는것은 죄없는
고기들을 괴롭히는 허울좋은 야유회" 일뿐이라는 준엄한 비판이 있다.
산승의 비타협적인 고고함이 잘 느껴지는 부분이다.
법정은 또한 지난했던 민주화 투쟁과정에 참여했던 많치않던 불교인이었다.
나는 사실 그의 글을 불교잡지가 아닌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나,김재준의 "제 삼일"에서부터 접하기 시작했었다.
광주민중항쟁후인 80년 8월에쓴"한줌의 재"라는 글에는 "세상이 상처투성이로 신음하고 있는데 일신의 안정과
자유를위해 돌아앉아 정진한다는것은 범죄적인 안일이 아니면 그야말로 웃기는일로밖에 여겨지지않는다"는
그의 고백이 있다.
피빛어린 당시 오월에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이른바 종정법어로 세상을 희롱한것과비교가 되지 않을수 없다.
이처럼 그의 글에는 세상에 대한 미련도 없지만 단절도 없다.
말하자면 세상과 자연이, 침묵과 말이, 초탈과 참여가 적절하게 배열되어있다.
그것이 그의 진솔한 삶의 모습인것이다.
그는 지식인도 정치인도 아닌 한 산승이기 때문에 그 이상을 그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오히려 실례일 것이다.
그러나 僧으로써 참여와 초탈을 함께 아우르는 그는 성철과 진관(대표적인 현실참여승)의 사이쯤에 있는 독보적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때보다도 부처님 오신날과 광주민주항쟁이 함께있는 5월에 그의 글이 다시 그리워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글은 이처럼 아름다움, 매서움, 솔직한 자기비판으로 우리를 감동 시키거니와, 그와 같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펜을
가다듬고 필력만을 높인다고 되는것은 아닐것 같다.
그의 삶을 살아야 비로소 가능할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에 붓을 담구고 세상위에 써내려가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의 글을 배우는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배우는 일이다.
무소유, 텅빈 충만, 한가로움...어찌보면 진정으로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은 사실은 그의 글이 아니라 그의 그러한 삶이다.
"후박나무에 걸려있는 반쯤 이즈러진 달"을 볼수있는 한가로움이 있는 그의 삶이요, "잔기침을 하면서 한 꺼풀씩
깨어나고" 있는 숲을"가질수 있는" 무소유의 삶이다.
굴참나무위의 딱따구리 소리가 들리는지 들리지 않는지 알아가며 살아가는 그 마음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것이 속인에게 과연 가능할수 있을까?
"한가로움"은 결코 한가로운 문제는 아닌듯하다. 하지만 빗소리건, 바람소리이건 소리를 들으며, 혹은 "푸실푸실" 내리는 눈을 보며, 그와 차 한잔쯤의 한가로움은허용될수있는 기회가 언제인가 오게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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