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법정)

산 방 한 담(山房閑談)- 노년의 아름다움

qhrwk 2022. 8. 22. 21:08


◈노년의 아름다움 / 법정스님◈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여름철 그 무더위도 처서를 고비로 한풀 꺾여 가을에 밀려간다.
순환의 법칙, 이 우주 질서가 지속되는 한 지구는 살아 숨 쉰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그때가 있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하늘이 높아지고 물이 맑아져 차 맛도 새롭다.
어제 아침 가을에 어울리는 다기로 바꾸었다.
지난 해제 날 보원요의 지헌님이 새로 빚어 가져온 찻잔에 초가을의 향기를 음미하면서 모처럼 산중의 맑은 한적을 누렸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 작품도 작가는 그 작품에 절반의 혼밖에 불어넣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나머지 절반의 혼은 소장자, 즉 그 작품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잘 활용하는 사람에 의해서 완성된다.
때깔이 고운 이 찻잔은 보원요 나름의 기법으로 최근에 빚어진 것인데 찻잔의 크기도 알맞고, 잡음 새도 좋고,
전도 원만하고, 굽도 넉넉해서 보고 매만지기만 해도 즐겁다.


이 찻잔은 앞으로 내 눈길과 손결에 의해서 세월과 함께 완벽한 그릇으로 형성되어 갈 것이다.
요즘 <게로록(戒老錄)>, 노년에 경계해야 할 일들을 읽고 있는데 나 자신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하는 글이다.
돌이켜 보니 나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같은 말을 되풀이해 왔다.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는 것은 지나간 시간의 늪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 또한 노쇠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현상은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과 탐구의 노력이 결여되었다는 그 반증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의 꿈과 이상을 저버릴 때 늙는다.
세월은 우리 얼굴에 주름살을 남기지만 우리가 일에 대한 흥미를 잃을 때는 영혼이 주름지게 된다.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탐구하는 노력을 쉬게 되면 인생이 녹슨다.
명심하고 명심할 일이다.

흔히들 노후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아직 오지 않고 있는 이 다음 일이지 지금 당장의 일은 아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소리일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을 자신의 분수에 맞게 제대로 살고 있다면
노후에 대한 불안 같은 것에 주눅 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은 과거도 미래도 없는 순순한 시간이다.
언제 어디서나 지금 이 순간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해 보니 내가 이 세상을 의지해 살아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이 지구의 자원을 많이 소비하고
그만큼 지구환경을 오염시킨 것 같다.
오늘과 같은 두려운 기후 변화는 지구 환경을 허물고 교란시켜 온 우리들 자신의 소행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구인들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될 수 있는 한 이 지구를 오염시키는 일을 삼가야 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간소하고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꼭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 더미에 짓눌려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 살림살이를 시시로 점검하고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한 해가 다 지나도록 손대지 않고 쓰지 않는 물건이 쌓여 있다면 그것은 내게 소용없는 것들이니 아낌없이 새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부자란 집이나 물건을 남보다 많이 차지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불필요한 것들을 갖지 않고 마음이 물건에 얽매이지 않아 홀가분하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부자라 할 수 있다.

한밤중 잠에서 깨어나 별빛처럼 또렷한 의식을 가지고 그날그날 삶의 자취를 낱낱이 살피고,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세상의 눈으로 자신을 비춰 보는, 이런 일들을 통해 노년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다.
노년의 아름다움이란 모든 일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남에게 양보할 수 있는 너그러움에 있음을 잊지 말 일이다.

-산방한담(山房閑談) 월간 맑고 향기롭게 2008년 0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