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은 책 이야기/ 법정 스님 ◈
불일암에서 몇 장 들추어 보다가 시들하게 여겨져 그만둔 책을 이곳 오두막에서 다시 펼쳐보고 커다란 감동을 받는
일이 더러 있다.
나카무라 고지의 「청빈의 사상」에서 그 청빈한 삶을 극구 찬양한 양관 화상(良寬和尙, 1758~1831)이 있는데,
그 스님이 써놓은 시가(詩歌)를 중심으로 엮은 일화집으로 「양관 이야기(良寬物語)」가 있다.
그가 한 산중의 보잘것없는 초암(草庵)인 오홉암(五合庵)에서 지낼 때다.오홉암이란 하루 다섯 홉씩 한 사람이
겨우살아갈 만한 식량을 본사에서 대준 데서 온 이름이다.
그러나 양관이 이곳에서 지낼 때는 그 다섯 홉의 식량마저 공급이 끊겨 손수 마을에 내려가 탁발을 해다가 근근이
연명을 해야만 했다.
이런 가난한 암자에 하루는 도둑이 들었다.
낮에는 깔고 앉아 좌선을 하고 이불이 없어 밤에는 덮고 자는데, 도둑은 그 방석을 훔쳐 가려고 했다.
스님은 도둑인 줄 알면서도 그가 놀랄까 봐 모로 누워 그 방석을 손쉽게 가져가도록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나온 어느 날 한 사나이가 이불 짐을 메고 스님을 찾아온다.
사나이는 몇 해 전 가난한 암자에서 방석을 훔쳐 간 도둑이 바로 자신이라고 하면서 용서를 빈다.
그때 그는 스님이 일부러 자는 척하면서 방석을 손쉽게 가져가도록 한 사실을 알고 더욱 가책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분이 어떤 스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불 대신 몸에 두른 방석을 훔쳐 온 자신을 두고두고 자책 하면서몇 해를 두고
벼르다가 아내와 의논하고 이불을 한 채 만들어 왔단다.
그의 청빈과 너그러움이 말 없는 가운데 도둑을 감화시킨 것이다.
욕심이 없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구하는 바 있으면 만사가 궁하다.담백한 나물밥으로 주림을 달래고누더기로써
겨우 몸을 가린다.
홀로 살면서 노루 사슴으로 벗하고아이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논다.
바위 아래 샘물로 귀를 씻고산마루의 소나무로 뜻을 삼는다.
양관의 시다.
수행이란 말은 곧 세속적인 욕망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욕망이 없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사는 것을 뜻한다.
수행자는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 그는 완전히 그것에 몰입한다.
아무것도 그의 뒤에 남겨 두지 않는다. 그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먹고 있을 때는 먹는 행위 그 자체가 된다. 일할 때도 또한 일 그 자체가 된다.
그는 정신적으로는 누구보다도 풍요롭게 살며, 그의 삶은 활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양관은 32세 때 스승에게서 깨달음의 인정을 받은 후로는 아무도 살지 않는 퇴락한 빈 암자만을 골라 가면서,
그 어디에도 매인 데 없이 한낱 가난한 탁발승으로서 살아간다.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은 73년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가 원통사라는 절에서 스승을 모시고 수행 중일 때 그 절에서 30년을 두고 묵묵히 일만 하는 한 스님을 보고 큰 감화를
받는다.
그는 다른 스님들처럼 참선도 하지 않고 경전도 읽지 않고 오로지 밥 짓는 일과 밭일만을 할 뿐이다.
묻는 말에나 마지못해 대답을 하는 그는 아침이면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 물을 긷고 밥을 지으며 자신이 가꾼 채소로
맛있는 찬을 만들고 국을 끓인다.
대중이 선실에 들어가 참선할 때 그는 혼자서 넓은 식당과 주방을 깨끗이 쓸고 닦는다.
남들이 싫어하는 변소 청소도 자신이 맡아서 한다.
그리고 잠시 틈이 나면 밭 가에서건 공양 간에서건 그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 뿐 결코 허리를 바닥에 대고 눕는
일이 없었다.
바보처럼 여기던 양관도 뒷날 그가 진정한 수행자였음을 알아차리고 그의 덕을 기린다.
양관의 의식 속에는 그의 그림자가 늘 어른거렸을 법하다.
한 사람의 인간 형성에는 이렇듯 이름 없는 조연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 조연자는 주연자의 삶을 통해서 거듭 꽃피어난다.
당신은 조연인가 주연인가. (1993)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중에서>
-산방한담(山房閑談) 월간 맑고 향기롭게 201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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