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전상서(前上書) (1)/ 법정 스님◈
비구 법정이 부처님께 올립니다!
한국 불교도의 한사람으로서 엎드려 참회(懺悔)를 드립니다.
제1신 : 1964년 10월 11일(음력 9월 6일)
머리말[序章]
부처님!
아무래도 말을 좀 해야겠습니다.
깊은 산[深山]에 수목처럼 덤덤히 서서 한세상 없는 듯이 살려고 했는데, 무심(無心)한 바위라도 되어 벙어리처럼
묵묵히 지내려 했는데, 이렇게 또 입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 울적한 심회(心懷)를 당신에게라도
목소리 하지 않고는 답답해 배기어 낼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먼저 저는 당신 앞에 당신을 욕되게 하고 있는 오늘 한국 불교도의 한사람으로서 엎드려 참회(懺悔)를 드립니다.
당신의 제자 된 사명을 다 하지 못하고, 오히려 당신의 이름을 팔아무위도식(無爲徒食)하고 있다는 처지에서.오늘
우리들 주변이 이처럼 혼탁하고 살벌한 것도 저희들이 해야 할 일들을 다 하지 못하고 있는 데서 연유(緣由)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이라는 이 헐벗은 땅덩이 안에서 자비하신 당신의 가르침은 이미 먼 나라로 망명해버린 지 오래 되었고,
빈 절간만 남아 있다는 말이 떠돕니다.그리고 이른바 당신의 제자라는 이름은 마치 투쟁견고(鬪爭堅固) 시대의 표본(標本) 같은 무리[群像]들로 채워져 있다고도 합니다.
당신의 가사와 발우를 가진 제자들이 오늘날 이 겨레로부터 마치 타락된 정치가들처럼 불신을 받고 있는 점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가을은 결실과 수확(收穫)의 계절이라고들 하는데, 우리에게는 결실할 밑천도 거두어들일 만한 열매도 없습니다.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이 불모(不毛)의 황무지에밝은 씨앗이라도 뿌려졌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에서,저는 이제 제
주변을 샅샅이 뒤져 헤치는 작업이라도 해야겠습니다.
말하자면, 내일의 건강을 위해서 오늘 앓고 있는 자신의 질환에 대한 진단 같은 작업을 -.
교육에 관하여[敎育의 章]
부처님!
‘대한불교조계종’이라는 깃발[旗幟] 아래에서는 걸핏하면 3대 사업이 어떻고 하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만큼 그 일은 시급한 저희들의 과업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긴요한 것이 당신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을 수 있는 인재를 기르는 교육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없다는 이 집안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일들은 지금껏 입으로만 축문처럼 외워지고 있을 뿐 실제로는 거의
무시되고 있습니다.
지금 몇몇 절[寺院]에서 벌리고 있는 강당이나 선방이라는 것도 진정한 의미에서 당신의 뜻을 이어받을 눈 밝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한낱 도량 장엄(道場 莊嚴) 정도로 차려 놓은 것에 불과한 인상들입니다.
그것은 실로 ‘교육’이라는 말조차 무색하리만큼 전(前)근대적인 유물로서, 박물관 진열장으로나 들어가야 할 쓸모없는
몸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타당한 방법론도 구체적인 계획성도 없습니다.
사제 교육의 기초기관인 강당에서 현재 수행되고 있는 그 방법이란 철저하게 훈화(訓話)적인 그러니까 한문 서당에서
상투 틀고 가르치던 그 습속을 소중하게, 너무나 소중하게 물려받고 있습니다.
한 강사가 여러 클라스(class)를 전담해 가지고 강의를 하고 있으니, 전체 학인을 명령 한 마디에 통솔하기는 편리할지
모르지만, 강사 자신의 육체적인 부담과 정신적인 실조(失調), 그리고 강의를 받은 사람들의 섭취할 건덕지가 얼마나
있을는지 뻔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 이수[履歷] 과목이라는 것이 조선 중엽에 비롯된 것이라는데, 지금의 형편이나 피(被)교육자의 지능 따위는 전혀
무시하고 또 시대적인 요구도 아랑곳없이 하나의 타성으로서 비판 없이 답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나마 얼마 동안에 배워 마친다는 정해진 기간도 없이-. 이처럼 무모한 <교육?>이 어느 다른 사회에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개의 경우, 가르치는 이나 배우는 사람들이 <종교>가 무엇인지, 혼미한 오늘의 현실에 <종교인>으로서 어떠한 사명을 해야 할 것인지를, 풍문(風聞)으로나마 가르치고 배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깨친 목소리를 듣기 위한 훈고적인 문자의 전달도 필요한 일이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현대라는 시점에서 소위
일체중생의 길잡이가 될 인재를 기르기 위한 종교교육이라면,생동(生動)할 수 있는 사명감을 불러일으켜 주는 것도 철학이 두뇌의 영역이라면, 종교는 심장의 영역일 것입니다.
메마른 심장으로서야 자신은 고사하고 어떻게 이웃을 울려줄 수 있겠습니까?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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