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전상서(前上書) (2)/법정스님◈
또 당신의 제자 된 사람이 당신의 가르침에는 아예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고, 비좁은 자기 나름의 소견에만 사로잡힌
이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선방이란 곳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본래 의지(意志)를 곡해한 듯 전혀 당신의 가르침에 대한 기초 교육도 없는
이들을 함부로 받아들여 선(禪) 자체에 대한 오해마저 초래케 하는 수가 흔히 있습니다.
선(禪)이 수행의 구경(究竟) 목적이 아니고, 그것이 깨달음(覺)으로 향(向)한 한낱 방편일진대, 보다 탄력 있는 시야쯤은
갖추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첫 문에 들어선 초발심자(初發心者)에게 있어서는 -.<막존지해(莫存知解)>라는 말과‘배우지 않아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과는 그 궤(軌)가 분명히 다른 줄 압니다. 흔히 참선 자가 선에 <참(參)> 하기 보다는 선에 <착(着)> 하기가 일쑤이고,따라서 종교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벽(壁) 속에 스스로를 가두면서도, 그것으로서 오히려 자기 위안[自樂]을 삼는 것은 모두 이러한 결함에 그 중요한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당신이 만약 오늘 이 사회에 계신다더라도 당신의 제자들을 이렇게 무모한 방법으로 가르치시겠습니까?
어설픈 화신(化身)들이러한 교육 이전의 불합리성 때문에 이 나라의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市井]에 있는 절간에 가면
기이한 현상이 있습니다.
젊은 우리 사미승들이 그늘진 표정으로 2중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흔히 목격합니다.
절에서는 승복[緇衣]을 입고 절문 밖에서는 세속 옷[俗衣]를 입는 -. 마치 낮과 밤을 사이하여 치장을 달리하는 박쥐라는
동물처럼.
부처님 앞에서 목탁을 치던 한낮의 손이 해가 기울면 학원[學館]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
배우고 싶은 일념에서 이처럼 어설픈 향학(向學)의 욕구를 절간에서는 채울 수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또 그들 학비[學資]의 출구[出路]란 것이 대개 떳떳한 것일 수가 없습니다.
3보에 희사한 정재(淨財)가 잘못 유실될 수도 있을 것이며, <낯을 익혀 둔> 신도들이 떨어뜨리고 간 지폐에
의존하는 수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도가 돈을 쥐어줄 때 그것으로서 세속의 업(業)을 익히라고 내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순수할 수 없는 조업(造業)으로 그 건전한 회향(廻向)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잘못하면 주는 편이나 받는 편이 함께 지옥에 떨어지는 업(業)만 익히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
모처럼 어린 마음으로 구도(求道)의 문안에 들어섰던 그들이 도업(道業; 佛道 修行)을 이루기에 앞서 다시 세속을
기웃거려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산사에서 간신히 이수과정을 마친 학인들이 불교 외부 학문[外典]을 갖추기
위해서라는 명분아래 하산한 뒤로는 거의가 돌아오지 않는 승려[不歸의 僧]가 되고 맙니다.
이러한 숫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미래를 기대해야 할 젊은 세대 사이에 -. 이와 같은 유쾌하지 못한 현상이 어찌 그들만의 탓이겠습니까?
이런 일을 언제까지고 모른 체하고만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잘못된 너무나 잘못된.
부처님!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습니다.
요즘 한국불교계에는 ‘급조 승려[急造僧]’이라는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낱말이 나돌고 있습니다.
승려라면 일반의 지도적인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 자질 여부는 고사하고 일정한 수업도 거치지 않고 활짝 열려진 문으로 들어오기가 바쁘게 삭발과 의상 교체가
너무나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제자로서의 품위나 처신이 말할 수 없이 진흙탕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낙후된 경제사회에서 부도가 나버린 공(空)수표처럼 -. 더구나 이들이 절을 주관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그저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그들이 언제 수도(修道) 비슷한 거라도 치를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그러기에 가출 이전의 세속적인 행동거지가 그대로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신문의 사회면에서는 가끔‘사이비 승려’라는 기삿거리와 더불어 세상의 웃음을 사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어떤 절에서는 처음 입산하려는 사람의 학력이 대학 출신이거나 좀 머리가 큰 사람이면더 물을 것도 없이
문을 닫아버립니다.
무슨 자랑스러운 가풍이나 되는 것처럼 -. 거절의 이유인 즉 “콧대가 세서 말을 잘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표면적인 구실에 지나지 않고 사실은 다루기가 벅차서일 것입니다.
우선 지적인 수준이 이쪽보다 우세하기 때문에 하나의 열등의식에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한 반증으로서 인간적인 기본 교양도 없는 만만한 연소자는, 그나마 노동력이 필요할 때 틈타서 받고 있는 실정이니
말입니다.
부처님!
이와 같이 구도자로서의 자질과 미래상이란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우매한 고집들이 수도장을 경영하고 있는 동안,
당신의 가르침인 한국불교의 표정은 갈수록 암담할 수밖에 무슨 길이 있겠습니까?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쫓아낸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나 비대하게 설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종단의 의결기관인 중앙종회에서는몇 군데 계획적인 수도장으로서 총림을 두기로 했다지만, 이러한 무질서가 건재하고 있는 소지(素地)에서 우리는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계속)
이 글은 법정 스님께서 30대 초반인1964년 10월 11,18, 25일 3회에 걸쳐 <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에 기고한
<부처님 前上書>를 풀어 옮긴 것이다.
1962년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하였지만, 당시의 한국불교는 비구-대처 정화분규 끝에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편집자 주-
-산방한담(山房閑談) 월간 맑고 향기롭게 2011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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