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다물고 귀를 가울이라♣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산 마루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속뜰에서는 맑은 수액이 흐르고 향기로운 꽃이 피어난다.
혼자서 묵묵히 숲을 내다보고 있을 때 내 자신도 한그루 정정한 나무가 된다.
아무 생각없이 빈 마음으로 자연을 대하고 있으면,그저 넉넉하고 충만할 뿐 결코 무료하지 않다.
이런 시간에 나는 무엇엔가 그지 없이 감사드리고 싶어진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맑고 잔잔한 이런 여백이 없다면 내 삶은 탄력을 잃고 이내 시들해 지고 말 것이다.
올해도 모란은 흐드러지게 피었었다.
겨울 날씨가 춥지 않아서였던지 예년보다 한열흘 앞당겨 피어났다.
모란밭 곁에서 같은 무렵에 피어난 노란 유채꽃이 모란의 자주색과 아주 잘 어울렸다.
꽃의 빛깔과 모양이 같아서 유채꽃이라 했지만 사실은 갓꽃이다.
지난해 겨울 김장을 하고 남겨둔 갓인데 봄이 되니 화사한 꽃을 피운 것이다.
철새로는 찌르레기가 맨 먼저 찾아왔다.
달력을 보니 4월 9일 쇳소리의 그 목청으로 온 골짝을 울리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아주 반가웠다.
모란이 피어나기 시작한 날 밤에 소쩍새도 함께 목청을 열었다.
4월 16일로 적혀 있다. 잇따라 쏙독새(머슴새)도 왔다.
머지않아 꾀꼬리와 뻐꾸기도 찾아올 것이다.
이렇게 철새들이 찾아와 첫 인사를 전해올때,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내 마음은 설랜다.
새의 노래는 (울음이 아니다)잠든 우리 혼을 불러 일의켜 준다.
굳어지려는 가슴에 물기를 보태 준다.지난 4월초 남쪽바다 한 가운데 외떨어져 있는 섬 백도를보고 오는 길에
거문도에 들렀었다.
거기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세워진 등대가 있는데, 그 등대로 가는 동백나무 숲길에서 밀화부리 소리를 듣고,
나는 그날 종일 행복에 겨웠었다.
자연은 이렇듯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무상으로 열어 보이고 있는데,일상에 찌든 사람들은 그런 선물을 받아들릴 줄을
모른다.받아 들리기는 그만두고 얼마나 많이 허물며 더럽이고 있는가. 받아 드릴려면 먼저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리고 귀를 기울이며 지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배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에 찌든 버릇 때문에모처럼 자연의 품 안에 안겨 있으면서도 입 다물고 귀 기울이며
지켜보려고 하지 않는다.안타까운 일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수첩을 펼쳐보니 지난4월9일오후로 적혀 있다.
할 일이 있어 외부로부터 방해받고 싶지 않은 날은 신발을 부엌에 들여 놓고 덧문을 닫아 버리는 일이 더러 있다.
그날도 읽던 책을 마저 읽으려던 참인데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 젊은 남녀 한 쌍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2시간 가까이 여자 혼자서 뭐라고 연방 지껄여댔다.
잠시도 쉬지 않고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끊임없이 쏟아 내었다.
방음이 되지 않는 한옥이라 방안에서 하던 일에 집중이 될 턱이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면서 그 지껄림이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되지도 않는 지껄임을 아무 대꾸도 없이 듣고 있는 사내 녀석의 인내력에 나는 놀라웠다.
아마 그 녀석은 사랑에 빠진 모양이었다.
사랑에 빠지면 눈도 멀고 귀도 멀어 쓰잘때기 없는 지껄임도 음악으로 오해 할수 있으니까. 문 열고 나가서 썩
내려가라고 고함이라도 쳐 주고 싶은 생각이 울컥울컥 치 밀어 올랐지만, 사랑에 빠져 골이 빈 연인들이
무안해 할까 봐 나 또한 인내력을 기를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쏟아 놓은 말을 누군가가 가까이서 듣고 있는 줄을 안다면 그렇게 도나개나 마구 쏟아 놓을 수 있을까?
그러나 명심하라
누군가 반드시 듣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무심코 하는 말이건 뜻을 담은 말이건 간에 듣는 귀가 바로 곁에 있다.
그것을 신이라 이름붙일 수도 있고,영혼이라 부를수도 있고,불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사람이 하는 말은 곧 그 사람의 속뜰을 열어 보임이다.
그의 말을 통해 겹겹으로 닫힌 그의 내면 세계를 훤히 알 수가 있다.
모처럼 꽃이 피어나고 새잎이 돋아나는 싱그러운 신록의 숲에 와서,아무 생각없이 빈 마음으로 입 다물고 귀를 기울이면서 가만히 있기만 해도 충만할덴데 사람들은 그럴 줄을 모른다.
일상에 때 묻고 닳아진 자신을 그 어느 때 무엇으로 회복할 수 있겠는가.
입 다물고 귀 기울리는 습관을 익혀라.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진리로 부터 점점 멀어진다.
말과 생각이 끊어진 데서 새로운 삶이 열린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가톨릭의 관상 수도자 토마스 머튼 심부는 그의 <관상기도>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침묵으로 성인들이 성장했고, 침묵으로 인해 하느님의 능력이 그들안에 머물렀고, 침묵안에서 하느님의 신비가
그들에게 알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런말도 하고 있다."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찾고 있지만 침묵속에 머무는 이 만이 그것을 찾아낼수 있다.
말이 많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경탄할 만한 것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의 내부는 비어 있다.
무엇 보다도 침묵을 사랑하라. 침묵은 입으로 표현 할 수 없는 열매를 그대들에게 가져올 것이다."
불교의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어리석은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므로써 그 도끼로 자기 자신을 찍고 만다."
우리는 말을 안해서 후회되는 일 보다도 말을 해 버렸기 때문에 후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한번은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면서 내 인내력을 시험한 적이 있다.
담배연기를 몹시 싫어하는 나는 기차 여행 때는 의례 금연칸을 탄다.
금연칸에는 담배를 피지 않는 사람과 부녀자들이 주로 타게 마련이다.
그날도 나는 금연칸을 선택했다.
내 자리에서 한 줄 건넌 앞자리에 어린애 하나를 거느린 30대 초반의 아주머니와 그의 친구인 듯한 그 또래의 여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열차가 한강교를 지나자 마자 아이를 거느린 아주머니가 친구를 상대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친구는 어쩌다 한마디씩 대꾸를 할 뿐 한쪽에서만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지껄여댔다.
아이도 지져운지 말 많은 엄마곁을 떠나 복도로 뛰어다녔다.
새마을 열차로 서울에서 부산가지 4시간10분이 걸리는데 부산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그 여인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계속 쏟아 놓았다.
그런 여인을 아내로 맞아 한평생을 살아갈 남자는 귀머거리가 아니면 존경할 만한 인내의 소유자일 것이다.
그날의 새마을호는 연료의 힘으로 달린것이 아니라, 그여인이 계속 솓아 놓은 '입심'으로 달린 것이 아니었을까,귀
가 멍멍해진 채 부신역에 내린 그때의 내 느낌이었다.
그 뒤로부터 나는 절대로 금연칸을 타지 않는다.
자신의 영혼을 맑히기 위해 매주 월요일을 침묵의 날로 지켜던 마하트마 간디는 이와 같이 타이르고 있다.
"먼저 생각하라. 그런 다음에 말 하라.'이제그만'이라는 소리를 듣기 전에 그쳐라.
사람이 짐승보다 높은 것은말 하는 능력을 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능력을 부당하게 행사하는 짓을 서듬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짐승만도 못하다"
이 글을 끝맺으려는 지금 첫 꽤꼬리 노래가 들려오고 있다.
5월6일 해마다 같은 시기에 찾아오는 이 놀라운 질서,자연의 소리는 사람의 소리에 견줄때 얼마나 맑고 신선한가.
우리는 자연의 소리를 배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입 다물고 귀를 기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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