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법정)

산 방 한 담(山房閑談)-마음 먹기 달렸다 2.

qhrwk 2022. 8. 22. 20:40

◈마음 먹기 달렸다2./법정스님◈

만일 누군가와 지금 다시 같은 내용의 상담을 하게 된다면 전 똑같은 말씀을 드리게 될 겁니다.

 종교가 다른 분들이라면 부처님 대신 주님이라든가 천주님이라든가 알라신으로 느끼면 편하실 겁니다.
꼭 불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또 대상이 누구건 특히나 먹을 음식을 준비할 때는 늘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생각으로 하십시오.
내 마음이 천당도 만들고 지옥도 만드는 겁니다. 관계란 이런 겁니다.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겁니다. 맞서면 서로에게 상처를 줄 뿐입니다.

부부지간에도, 친구지간에도,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혹은 동료 간에도, 애인 사이에도 맞서면 서로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나 생각을 돌려 마음을 편한 쪽으로 돌이키면 온전히 본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갑니다.
자아실현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주부가 마음공부를 착실히 한 결과 위태롭던 가정이 다시 회복되고 자식들도 어디 내 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번듯하게 성장했다고 합니다.
가정의 위기를 극복한 겁니다.

요즘 걸핏하면 이혼하기를 식은 죽 떠먹듯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혼한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매듭이 풀리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이면 내가 그런 여자, 이런 남자를 만나서 고생을 하느냐고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선을 잘못 봐서, 순간의 선택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업을 고쳐야 비로소 매듭이 풀립니다. 

해결책은 내가 먼저 자기 자신을 투철하게 들여다 봐야 합니다.

자신의 실체를 들여다 봐야 합니다.
왜 그 사람을 만나서 그렇게 사는 겁니까. ‘업’으로 얽힌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업을 고치지 않고는 매듭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자면 참고 견딜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인간의 덕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참고 견딜 줄을 모릅니다.
자녀를 하나둘 밖에 안 낳게 되면서 부모들이 아이들 뜻을 즉석에서, 다 받아 주었습니다.

그러니 참고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이렇게 성장한 사람들이 어른이 되어 한 가정을 거느릴 수 있겠습니까. 

참지 못하고 견디지 못해 이탈하는 겁니다.

부처나 보살을 먼 곳에서 찾지 마십시오.

절에 부처와 보살은 없습니다.
밖에서도 찾지 마십시오.

 내 안에 잠들어 있는 부처와 보살을 일깨워야 됩니다.

이렇게 화창하고 눈부신 봄날 꽃구경 가지 않고 뭐하러 절에 왔습니까?
뭔가 일상생활에서 성이 차지 않으니 새로운 무엇을 찾기 위해 오지 않았습니까.
《화엄경》에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셋은 결코 차별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니 부처니 중생이니 하지만 이 세상은 결코 근원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표현만 다르지 하나라는 겁니다. 

그러니 부처와 보살을 먼 곳에서 찾지 마십시오.

부처와 보살을 밖에서 만나려 말고 때로는 자기 집안으로 불러들일 수도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시들했던 관계도 새로운 활기로 채워집니다.
물질의 가옥이 정이 넘치는 가정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삶이 기쁨과 고마움으로 채워질 때 향기가 배어나게 마련입니다.
이게 바로 덕의 향기입니다.

삶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순간순간 사는 삶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 우리가 살아야 합니까?
이는 철학자만이 탐구할 명제가 아닙니다.

지금 현재,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근원적인 물음입니다.
이 몸뚱이는 유기체입니다. 

껍데기입니다.

더러 오랜만에 아는 분을 만나면 다들 저에게‘아이고, 스님 너무 야위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저는 그런 소리를 들을 적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시줏돈으로 얻어먹는 사람이 디룩디룩 돼지처럼 살이나 쪄서야 되겠습니까.
내 몸은 유기체인 동시에 껍데기이지 알맹이가 아닙니다.
콩깍지와 콩이 다르듯 말입니다. 

몸은 콩깍지처럼 덧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콩은 세월의 풍상에도 아랑곳없이 늘 새로운 싹을 틔워낼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콩깍지를 벗어난다고 해도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그런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우주의 에너지 같은 것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것이 ‘참나’입니까?
우리는 몸에 너무 집착합니다. 몸이 곧 자신의 실체인 것처럼 늘 착각합니다.

그래서 몸에 좋다고 하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뭐든 구하려 하고 기를 쓰고 먹습니다.

하지만 마음공부란 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참선하고 참회하는 일은 결코 몸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늘 절에 이렇게 오신 것은 몸이 온 것이 아닙니다.
일도 많은데 무엇이 끌어서 내 몸을 여기까지 데려왔습니까.
여기 안 올 수도 있는데 한 생각이 일어나서 이 자리에 온 겁니다.
몸은 그저 따라온 것뿐입니다.

마음공부란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간절한 염원이면서 정진입니다.
이와 같은 정진을 거치면서 사람은 인간답게 성숙해 갑니다.
특히 나이를 먹을수록 성숙해져야 합니다.
성숙하지 않고 옛날 그대로 있다면 그 사람은 전혀 향상되어 못한, 제자리걸음 상태인 것입니다.

각자 한 번 물어 보십시오.
내 자신, 자아실현을 위해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내 인생이 소모되고 있는데 과연 내 자아실현을 위해서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삶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될 것인지 거듭 물어야 됩니다.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습니다.
과일에 씨앗이 박혀있듯이 해답은 물음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물어보지 않고 그 해답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자신들의 삶을 저마다 꽃피우면서 사는 따뜻한 가정의 가계부에는  ‘촌놈 용돈 2 만원’이 아니라 ‘부처님께 용돈 20 만원’

이라고 기록될 수 있습니다.
좋은 봄 맞으십시오.

※ 이 글은 지난 2005년 4월 17일(일)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 길상사 극락전에서 설해진
법정 스님의 법문을 녹취, 정리한 글입니다.

-산방한담(山房閑談) 월간 맑고 향기롭게 2008년 0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