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법정)

산 방 한 담(山房閑談)-내 구도의 서(書)

qhrwk 2022. 8. 29. 07:51

◈내 구도의 서(書) / 법정스님◈


무릇 수행자는 자기 관리가 철저해야 합니다.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속물이 됩니다.
우리는 속물이 되기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특히 나이 들수록 자기 관리를 엄격히 하십시오.

누가 곁에서 충고를 해 주지 않으므로, 스스로 자기 삶을 철저히 단속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출가 수행자의 본분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누가 와서 어떤 부탁을 할 때 자기의 역량이 되면 도와줄 수 있겠지만, 그럴 능력이 없고 자기 그릇의 한계를 

느낀다면 스스로 자제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 관리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자기 관리를 위해서는 인정사정 두지 마십시오.
인정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인정과 자비심은 다릅니다.

우리들의 청정한 본성이 곧 자비심입니다. 

자비심은 우연히 생겨나지 않습니다.

참선 잘하고 경전 잘 암송한다고 해서 자비심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남과의 관계 속에서 자비심이 길러집니다.

자비심과 보리심을 기르는 것은 수행자에게는 본질적인 길이며 핵심입니다.
보리심은 진리를 깨달아, 그 깨달음으로 모든 존재를 구하겠다는 원입니다.

불교에서는 흔히 지나가는 짐승을 보면 “발보리심 하라”고 말합니다.
(여시축생발보리심如是畜生發菩提心‘너는 비록 짐승이지만 보리심을 일으키라’고 가르치는 말)

옛날 어느 스님에게서 들었는데, 하루는 지나가는 소에게 “발보리심 하라”고 말하니까 그 소가 스님을

쳐다보면서 “음매-”하는데,마치 “너는?”하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크게 자책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보리심을 발했을 때, 남에게 보리심을 발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 전해집니다.
보리심과 자비심은 그토록 따뜻한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전해집니다.
이기심은 냉혹하고 차디찬 것입니다.

이기심은 자기 자신도 견디지 못하고 남도 차갑게 만들지만, 자비심은 자기 자신도 훈훈하고 이웃도

 따뜻하게 만듭니다.

전에도 한번 제가 운문사에 와서 객실에서 잤습니다. 

그 방은 보일러 장치가 매우 잘 되어 있습니다. 

차가운 곳을 좋아하는 사람은 차가운 부분,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은 따뜻한 부분에서 잘 수 있는, 

방바닥의 차갑고 따뜻함이 확실하게 나눠진 방입니다.

 

저는 저 자신이 차디차기 때문에 따뜻한 곳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따뜻한 부분에서 잤는데,그 방에서 자면서 ‘이 방이 법문을 하는구나. 중생들의 근기에 맞도록 냉난방을

나누어 놓았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무엇이든 건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깊이 생각하면 그곳에 다 뜻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한테 이롭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한국 불교에서 지혜를 우선시하고 자비를 소홀히 하는 것은 잘 못된 일입니다.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닙니다.

청정한 한마음에서 나오는 가닥입니다.

굳이 차례를 이야기하자면 자비심에서 지혜가 싹틉니다.


자비가 없는 지혜는 지극히 메마른 것입니다.
한국 불교는 깨달음을 우선시하면서도 깨달음의 행을 할 줄 모릅니다.
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지, 깨달음의 행 없이 정상에 이를 수 없습니다. 

끝없는 자비의 행을 통해 지혜가 싹트고, 지혜와 자비가 하나가 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의 길입니다.

제가 의지하고 늘 수지독송(受持讀誦 경전이나 책을 항상 잊지 않고 지니며 소리 내어 읽음)하며 곁에 두고

스승으로 삼는 서적을 몇 권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입니다.
제가 중이 된 지 반세기가 되었지만 아직도 가끔 <초발심자경문>을 읽습니다.

 

절에 들어와 처음 은사 스님 앞에 꿇어 앉아그 전날 배운 것을 외워 가며 익혔던 글입니다.

단지 글만 풀이하고 해석한 것이 아니라, 옛 수행자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행했는가 하는 것을 그 글을 통해

 낱낱이 배울 수 있었기에, 늘 그 가르침이 저한테 남아 있습니다.

백지상태로 처음 절에 와서 배우는 교훈이 <초발심자경문>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초발심자경문>을 읽으면 새롭습니다.
지금도 7월 보름 하안거 해제일이 되면 제가 계를 받은 그 날로 돌아가 예불끝에 꼭 <초발심자경문>을 독송합니다.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고,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지니기 위함입니다. 또 제가 거처하는 오두막 불단에도
<초발심자경문>을 늘 모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서산 스님이 경전과 조사 어록을 보다가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뽑아 놓은 <선가귀감>입니다. 

저는 풋 중 시절 해인사에서 <선가귀감>을 처음 보았습니다.어떤 노장 스님이 그 책을 가지고 있었는데,눈이

번쩍 뜨이고 신심이 나는 책이었습니다.
환희심이 들었습니다.저는 그 즉시 아랫동네로 뛰어 내려가 공책 한 권을 사다가, 깊은 밤 잠자는 시간에 지대방

(절의 큰방 머리에 있는 작은 방,이부자리, 옷 또는 승려가 행장을 넣어가지고 다니는 지대 따위를 두는 곳)에
들어가 호롱불을 켜고 그 책을 한 줄 한 줄 공책에 베껴 적었습니다.

그 다음은 <숫타니파타>입니다. 이

것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경전의 체계를 갖추기 전, 부처님이 초기 교단에서 말씀하신 것을 엮어 놓은 근본
경전입니다. 

 <아함경>이 생기기 이전의 경전이기 때문에 표현이 매우 소박합니다.
어떤 법문을 들으면 마치 부처님의 육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초기 교단의 수행자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또 초기 교단의 수행자들에게 부처님은 어떤 가르침을 폈는가, 그 당시에는

 어떻게 수행을 했는가 하는 것을 <숫타니파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장로게(長老偈)입니다.
<장로게>는 초기 수행자들의 수행담을 이야기한 책입니다.
<장로게>가 있고 <장로니게(長老尼偈)>가 있습니다.
이 책도 저의 구도의 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책은 도겐(道元) 선사가 사석에서 펼친 가르침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분의 시자(어른 스님을 모시고 시중 드는 사람)가 고운 에조(孤雲懷奘) 스님인데, 도겐선사보다 나이가 두 살 위입니다.
다른 교단에 있다가 도겐 선사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아 시자가 되었습니다.
이분이 도겐 선사가 그때그때 사석에서 제자들을 위해 법문한 것을 기록해서<정법안장수문기(正法眼藏隨聞記)>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정법안장(正法眼藏)>은 도겐 선사 자신이 기록한 법문입니다.
이 <정법안장>에 ‘행지(行持)’ 편이 있는데,수행자가 지녀야 할 행위에 대해, 옛 조사들부터 중국 선종사에 나오는 분들이 어떻게 수행했고 어떻게 교화했는가 하는 것이 실려 있습니다. 

<정법안장> 중에서도 저는 이 행지 편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길상사 주지실을 만들 때 무슨 이름을 붙일까 하다가‘행지실’이라고 한 것입니다. 주지를 하려면 바른 행을 

지니라는 뜻에서입니다.

저는 구도의 서로 이 다섯 권의 책에 늘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 학인 스님들도 저마다 구도의 서(書)로써 중노릇하는 데 든든한 배경 삼기를 바랍니다.

<2005년 10월 20일 운문사 초청 법문 중에서>

-산방한담(山房閑談) 월간 맑고 향기롭게 2009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