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은혜 속에서/ 법정스님◈
옛 문헌을 보면 ‘병 비구(病比丘) 아무개’라는 표현이 더러 눈에 띈다.
전에는 무심히 스치고 지나쳤는데 막상 내 몸에 병이 드니 이런 표현이 새롭게 다가선다.
이 몸으로 늘 건강할 수만은 없는 줄 알면서도 병고에 시달리게 되면 안으로 곰곰이 생각을 돌이키지
않을 수 없다.
중생의 병은 업에서 온다고 했는데, 내가 일찍이 무슨 업을 지었기에 오늘 이런 병고에 시달려야 하는가 싶다.
《유마경》에서 유마거사가 ‘이웃이 앓으니 나도 앓는다’는이 표현이 얼마쯤 위로가 된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생로병사 중에 늙음과 질병을 치르면서 인생의 순환주기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병든 비구가 아니라도 누구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삶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니 병고 속에서 현재의 내 삶은 존재한다.
20년 가까이 지내고 있는 외진 산중이라, 둘레의 많은 이웃들이 나를 찌들지 않게 거들고 있다.
감사할 뿐이다.
이른 봄 뜰에 가득 핀 노란 민들레를 시작으로 흰 진달래가 문을 열고 벼랑에 붉은 진달래도 한 차례 다녀간 뒤 철쭉과
모란, 고광나무가 꽃을 피웠다.
붓꽃과 달개비와 함께 요즘은 작약이 볼 만하다.
작약은 분홍, 진분홍, 연분홍이 있다.
그보다 여린 살 분홍(베이비 핑크)이 있는데 그 중에도 자줏빛과 살 분홍의 조화에 눈이 번쩍 뜨인다.
작약은 모란보다 꽃잎이 여리고 투명해서 눈길이 자주 간다.
작약이 지고 나면 산수국이 뒤를 이어 내 발길을 끌어들일 것이다.
이 산중에 이런 꽃들이 있어 병자의 일상을 부드럽게 받쳐주고 있음에 거듭 감사드린다.
때로는 한밤중 소나기가 잠든 숲을 깨우며 지나가는 소리에 나도 잠결에서 깬다.
숲을 적시는 밤비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한밤중 적막의 극치다!
며칠 전까지도 창호에 새벽 달빛이 찾아들었다.
뜰가에 심은 단풍나무가 그새 많이 자라 그 잎사귀가 그림자를 드리워 일렁이었다.
누운 채 이런 창문을 바라보면 내가 마치 물속에 잠겨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달과 나뭇잎과 창호가 함께 어울려 새벽의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장마가 올 거라고 하는데 아직 이 고장은 연일 맑은 날씨다.
맑은 날씨 덕에 낮으로는 개울가 바위에 앉아 햇볕을 쪼이는 일을 즐기고 있다.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맡기고 산울림 영감처럼 좌정하고 있으면 햇볕이 내 등에 내려와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준다.
더러는 꾸벅꾸벅 졸다가 번쩍 정신이 들기도 하는데, 이 몸이 자연의 일부임을 실감한다.
어제는 작은 폭포 아래서 웬 물새가 노는 걸 보고 내 눈이 침침해서 잘 못 봤는가 싶어 눈을 비비고 유심히 보니
물새가 부화된 지 얼마 안 된 병아리 만한 새끼 아홉 마리를 거닐고 놀고 있었다.
이런 정겨운 모습은 아무 산중에서나 보기 드물다.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그날 하루 일용할 양식으로 삼을 만하지 않은가.
병 비구 아무개의 둘레에 이와 같은 자연의 고마운 벗들이 있어 아직은 기죽지 않고 건재함을, 궁금해하는 이웃들에게
전한다.
다들 건강하고 건강하기를.
-산방한담(山房閑談) 월간 맑고 향기롭게 2009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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