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십사 이상적멸분(第十四 離相寂滅分)◑
須菩提 菩薩 爲 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수보리 보살 위 이익일체중생 응여시보시
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여래설일체제상 즉시비상 우설일체중생 즉비중생
須菩提 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광語者 不異語者
수보리 여래 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須菩提 如來所得法 此法 無實無虛
수보리 여래소득법 차법 무실무허
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入暗
수보리 약보살 심주어법 이행보시 여인입암
則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有目
즉무소견 약보살 심부주법 이행보시 여인유목
日光明照 見種種色
일광명조 견종종색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善女人 能於此經
수보리 당래지세 약유선남자선여인 능어차경
受持讀誦 則爲如來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수지독송 즉위여래이불지혜 실지시인 실견시인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
개득성취무량무변공덕
◐
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니
수보리 보살 위이익일체중생 응여시보시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느니."
불교에 뜻을 같이 하여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일체의 삶을 펼쳐야 합니다.
어디 소소한 데에 구애되어 좀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크고 시원하게 인생을 꾸려가야 합니다.
인색한 마음은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무엇인가 응어리가 마음 속에 계속 남아 걸리적거리게 됩니다.
요즈음처럼 다양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을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능력껏 남을 위해 봉사하면 됩니다.
재보시(財布施)를 담당할 능력이 있으면 재보시에 힘쓰고, 법보시(法布施)를
담당할 능력이 되면 법보시를 힘껏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여의치 못하지만 시간이 충분하고 건강한 몸이 있다면
그것으로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 있는 따뜻한 부처님의 자비를
직접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중불교운동의 하나로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힘서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요즈음 우리 불교에서는
'생명 공양 운동(生命 供襄 運動)'을 펼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전생에도 도를 구하거나 중생들을 위해서 기꺼이 육신을 보시하였습니다.
그것처럼 우리 불자들도 남을 향한 자비심의 발로로 자신의 육체의 일부를
기증하는 것은 참으로 장려할 일이라 생각됩니다.
◐
如來 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여래 설일체제상 즉시비상 우설일체중생 즉비중생
"여래가 설한 일체의 모든 상은 곧 이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의 중생이라고 설함도 곧 중생이 아니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아상, 중생상, 수자상은 변화무상하고 필경은 무너질 것이므로,
즉 실상이 아니므로 이 상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하여 깨달은 부처님이 갖고 있는 마음이나
중생들이 갖고 있는 마음은 둘이 아닙니다.
마음이란 본래로 무차별하고 동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이라고 하는 것도 영원한 것이 아니고 본래로 제도되어 있고
부처님과 동일체이므로 중생은 중생이 아닌 것입니다.
◐
須菩提 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광語者 不異語者
수보리 여래 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자며 실다운 말을 하는 자며 사실과 같이 말하는 자며
거짓이 아닌 말을 하는 자며 다르지 않은 말을 하는 자니라."
우리들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줄 때에는 현명하게 판단하여 적절한 충고를 해 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똑 같은 상황이라도 그것이 내 문제로 다가오면 그만 속수무책이 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 욕심에 가려 집착했으므로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스운 예로 장기나 바둑을 둘 때 옆에서 그 대국을 지켜 보게되면 자기의 평소 실력보다
이급 정도 높게 수를 판단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대신 내깃돈을 주면서까지 훈수를 하기 마련입니다.
옆에서 보니 저 말이 곧 죽게 되어 있는데 두는 당사자들은 알아차리지 못하니
너무나 안타까워 대신 돈까지 내어 주면서 참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우리 중생들이 사물에 집착하여 인생의 진실한 모습과는 동떨어지게 작은 삶을 살아가니까,
부처님께서는 너무나 안타까워 자신의 명예를 다 걸고
"나는 진실한 말만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이렇게 다섯 번이나 반복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경전에서는 이렇게까지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상 너머에 너무나도 밝은 세계가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아둥바둥 사는 것을 보고
얼마나 우리 중생들이 애처로웠으면 이렇게까지 하였겠습니까.
그동안에 늘 '있다'는 문제를 이야기하시다가 '일체 상을 떠나는 것이 부처다'하는 것은
혁명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이 실상인데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울긋불긋한 현상에 매여 희로애락에 젖어 사는
중생들이 너무 안타까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당부 하는 것입니다.
◐
須菩提 如來所得法 此法 無實無虛
수보리 여래소득법 차법 무실무허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법인 이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느니라."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하는 이 법의 본질은 모든 사변으로부터 떠나 있고, 본래가 공적한 자리입니다.
그러니 실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없다는 가운데에서도 쓰고, 쓰고도 마침이 없는 묘한 작용이 일어나니
과연 헛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본래가 적적하여 상을 가질 수 없으니 실다움도 없고, 또 그러면서도 이렇게 끊임없이
만상이 흘러나오고 과거에 계속 자아내었고 앞으로도 마음껏 쓰고도 다함이 없을 것이니
헛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
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 入暗
수보리 약보살 심주어법 이행보시 여인 입암
則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
즉무소견 약보살 심부주법 이행보시 여인
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유목 일광명조 견종종색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러서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매
아무 것도 보이는 바가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눈도 있고 햇빛도 밝게 비쳐서 여러 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느니라."
◐
14분 까지가『금강경』의 상권(上券)입니다.
『금강경』의 주된 사상이 14분 까지에서 거의가 다 설해집니다.
특히 이 부분은『금강경』전체의 결론이라고 보아지기 때문에 평소에 갖고 있는
생각을 힘주어 설명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둠'과 '밝음'을 가지고 살짝 대비시켜 놓았지만, 여기에는 매우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눈에 보이는 현상과 우리들 의식 속에 존재하는 법에 머물러
살아가는 것은 어떤 사람이 캄캄한 곳에 들어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캄캄한 곳에 들어가 보면 그 곳에 다이아몬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그 것이 다이아몬드인 줄 전혀 알아채지 못합니다.
혹, 다이아몬드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들어가 더듬거려서 큼직한 것을 들고 나왔다 하더라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덩이를 들고 나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우리들이 순식간에 맹인(盲人)이 되어 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해서라도 집으로는 돌아가야 하겠기에 길에 나섰거만 온전히 돌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동안 아무런 의식 없이 편히 다닐 수 있었던 계단이나, 익숙했던 길들이 전부 우리들에게
상처를 줄 무기로 변합니다.
그래 가지고 성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때의 마음에 생기는 두려움이나 답답함은 도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들의 인생길이 바로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집착하여 인생을 살면,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온갖 상처투성이로 인한 가슴 아픈
일만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눈이 어두워서 있지도 않은 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집착하여 전도(顫到)된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매달려도 좋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부처님도 떠나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원히 그것에 매달리라고 할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집착해도 좋을 만큼
대상이 있어주지 않고, 우리 자신조차 변해가지 않습니까.
만약 나도, 너도, 이 세상의 온갖 사물도 끝까지 변치 않는 존재라면
영원토록 따라가고 매달릴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놓쳐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사물 하나하나, 우리들의 감정, 의식, 마음 작용, 이 모든 것들은 본질적으로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또 잠깐 동안의 인연에 의해서 모였다가 흩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고집할 수도 없고,
고집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들 눈에 실체(實體)로서 번듯이 보이고 있지만
언젠가는 흩어지고 텅 비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흩어지고 난 뒤에야 알게 되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는 동안에도 이러한 점을 꿰뚫고 있으면
상처받을 일이 없습니다.
간단한 것은 이해를 쉽게 하지만 정작 인간 관계, 특히 나를 중심으로 하는 인간 관계에 오면
'내 자식은 이러 이러해야 한다', '내 남편은 이러이러해야 한다', '내 아내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라고
기준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그만 상처 받아 마음의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苦)의 바다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모를 때에는 상처를 받으면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멀리는 조상 탓, 크게는 주변 환경, 사회 제도를 탓하고, 가까이로는 늘 상대하는 가족, 친구,
친척을 탓하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이 어리석고 눈이 어두워서 그런 것입니다.
옛날에 가슴 아팠던 그어떤 것도 결국은 내가 잘못 생각하여 그런 것이지
상대가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설사 상대가 백 퍼샌트를 잘못 하여 내가 상처 받았다 하더라도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는냐 하는 바른 자세가 되어 있다면 상처가 상처일 수 없습니다.
참다운 반야지(般若智)로서 '오관(五官)으로 판단되는 나'를 초월해 보면 천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것과 같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우리들 속에 있는데 조그만 현상에 매달려 상처 받고
살아갈 필요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평생 이 문제를 가지고서 이야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들이 변화하고 무상한 현상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햇빛이 환히 비치는 곳에서
밝은 눈을 가지고 사물 하나하나를 삺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의 눈이 환히 밝고 거기에다 햇빛까지 더없이 밝게 비추어 주니 사물사물이 학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이아몬드인지 돌덩이인지 흙덩이인지 확연히 분별할 수 있으니 창고에 들어가서 값진
다이아몬드만 들고 올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아무리 계단이 가파르고 태산 같은 장애물이 곳곳에 있다 하더라도 밝은 눈만 있으면
한 번도 부딪치거나 넘어지지 아니하여 상처받지 않고 안전하게 다닐 수가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 보면 우리 주위에는 상처 줄 거리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대로 밝은 눈이 있어 가슴 아픈 일을 넘길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새기면서 깨어 있는 삶의 길을 가고저 하니 그런 대로 우리 인생길을
평탄하게 다져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지 그 누구도 남이 대신해 주지 못합니다.
밝은 대낮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면 '이것도 인연소치지'하며 빨리 장독 뚜껑을 닫고
빨래를 걷어 소나기에 대비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 '이렇게 밝은데 왜 소나기가 쏟아져야 하나,
이상하다.'하고 소나기만 탓하고 있으면 손해볼 일뿐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사리불과 목련존자는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에 들었습니다.
포살할 때 사리불과 목건련의 자리에 당겨 앉아야 하는데 다른 제자들이 너무 마음이 아파
감히 당겨 앉지를 못합니다.부처님을 모시기 전부터 사리불과 목건련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더욱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사리불이 열반에 들었을 때에도, 목련존자가 열반에 들었을 때에도
반복하여 법문을 주십니다.
"자신에게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을지언정 다른 것을 등불로 삼지 말라."
어찌 보면 냉정한 말씀 같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연기의 법칙인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단 십 미터도 자유로이 갈 수가 없고 밝은 곳에서는 갖가지 사물을 즐기면서
어디든지 얼마든지 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살짝 건드려 놓았지만 이 속에는 이렇게도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인생길의 밝고 바른 길과 어둡고 잘못된 길이 뚜렷하게 대비되어 나타나 있습니다.
◐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善女人 能於此經
수보리 당래지세 약유선남자선여인 능어차경
受持讀誦 則爲如來 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수지독송 즉위여래 이불지혜 실지시인 실견시인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
개득성취무량무변공덕
"수보리야,
오는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면,
여래가 부처의 지혜로서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아서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하리라."
선재(善財)동자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오십삼 선지식을 친견하는 끝없는 구도의 길에 오릅니다.
갖은 고생을 하며 마지막 처소인 미륵보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륵보살이 손가락을 튕기는 작은 소리에그동안 낱낱의 처소에서 정진한
깨달음을 얻게 된 성취를 모조리 다 잊게 되는 것입니다.
선재동자는 낙담을 하며 미륵보살에게 묻습니다.
"미륵보살이시여, 저는 지금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다시 시작하는 수 밖에 더 있겠느냐.
다시 처음부터 문수보살을 만나고 차례차례 오십삼 선지식을 다시 밟아 올 수 밖에
더 있겠느냐." 라는 기가 막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 같으면 포기하고 말 일입니다.
그런데 선재동자는 그 말을 듣고 조금도 낙망하거나 게으른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다시 그 먼 일백 육십 유순을 돌아가 문수보살을 향해 걸음을 내디딥니다.
문수보살이 그것을 보고 오른손을 뻗어 선재동자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축복을 내려 줍니다.
"선재 선재라,
네가 어찌 그 순간에 싫어하지 아니하고 싫증내지 아니하고 해태(懈怠)하지 아니하고
그 길고 먼 과정을 다시 밟으려고 하는가?"
하는 거룩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한정적인 것이 아니므로 얼마든지 이럴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끝없는 구도심으로『금강경』을 받아 지니고 읽어 금강경 도리를 깨쳐가면
참다운 밝은 지혜가 생깁니다.
이렇게 되면 시비선악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게 되어
인생사의 모든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반야바라밀행자(般若波羅密行者)의 도리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불교를 믿고 공부한 보람으로 한량없고 참다운 공덕(功德)을 얻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금강경은 삶에 대한 참된 지혜가 구절구절마다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불교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무비스님의금강경강의] 제십육 능정업장분(第十六 能淨業障分) (1) | 2023.05.20 |
|---|---|
| [무비스님의금강경강의] 제십오 지경공덕분(第十五 持經功德分) (2) | 2023.05.20 |
| [무비스님의금강경강의] 제십사 이상적멸분(第十四 離相寂滅分)-1 (8) | 2023.05.20 |
| [무비스님의금강경강의] 제십삼 여법수지분(第十三 如法受持分) (1) | 2023.05.18 |
| [무비스님의금강경강의] 제십이 존중정교분(第十二 尊重正敎分) (0) | 2023.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