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법정)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1. 눈 고장에서 - 과일을 잘 고르는 엄마

qhrwk 2022. 2. 19. 07:27

 


♣ 1. 눈 고장에서 - 과일을 잘 고르는 엄마♣

볼일이 있어 인간의 도시에 나가 머무는 기회가 있을 때, 나는 가끔 꽃시장을 찾아가
둘러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른 아침 시장안의 싱그러운 빛깔의 잔치와 그 풋풋한 향기도 좋지만, 꽃을 사고파는
사람들의 그 모습 또한 꽃에 못지않게 아름답다.
비릿한 어물전이나 고깃집 같은 데서 대하는, 조금은 탐욕스럽고 거칠게 보이는 그런
얼굴을 꽃시장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엣말이 있는데,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뜻이다.
밝은 것이 됐건 어두운 것이 됐건 어디엔가 가까이하면 그만큼 그 영향을 받는다는 교훈이다.
꽃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꽃향기와 그 속성을 닮아 갈 것이다.
우리말에 '꽃다운 마음씨'란 꽃과 같이 아름답고 예쁜 마음씨를 가리킨다.

벌써 오래 전 일인데, 내가 주관하는 한 경전 모임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차례씩 주부들 10여 명이 모이는 조촐한 자리였다.
물론 종파적인 종교에서 떠난 모임이기 때문에 아무나 와서 참여할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곱게 간직되어 있는 것은, 그 중에 한 엄마가 교탁에 늘 새로운 꽃을
꽂아 두었었다.꽃을 앞에 두고 경전을 읽어 나가면 아무리 딱딱한 경전도 부드럽게
읽힌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의 체험으로 알았다.
그런데 그 엄마가 결석한 때에는 아무도 대신해서 꽃을 가져다 꽂는 사람이 없었다.
한두 번쯤은 그 엄마를 믿고 그런다 치더라도 그 엄마가 장기간 해외에 나가 있는 줄
알면서도 꽃을 꽂는 사람이 없었다.

모르긴 해도, 평소 자신의 집에 꽃을 꽂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남의 집에 꽃을
가져가는 일은 별로 없을 듯싶다.
그 무렵 다른 엄마한테서 들어선 안 일인데, 꽃을 가져다 꽂던 그 엄마는 밖에서 일을
보다가도 오후 세 시만 되면 서둘러 귀가한다는것이다.
그 이유는 초등학교 3학년인가에 다니는 아이가 집에 돌아오기 전에 귀가하여 아이가
먹을 간식을 미리 준비해 두고 기다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좋은 밭에서 좋은 곡식이 자라듯이, 좋은 엄마한테서 좋은 아이가 자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자취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보는 눈을 내 나름으로 지니게 되었다.

주방에 들어와 몸 놀리는 동작만 보고도 그가 음식을 제대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인지
엉터리인지를 당장 판결할 수 있다.
내 편견일지 모르지만, 과일을 잘 고르는 엄마라면 살림도 잘할 거라는생각이 든다.
과일을 제대로 고를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깎는 일도 시원찮을 것이고 그릇에 놓는 솜씨
또한 그저 그럴 것 같다. 우리가 손님으로 갔을 때 주인이 과일을 깎아서 내오는
것보다는 현장에 통째로 가져와 깎는 것을 보는 일은 즐겁고도 먹음직하다.


음식을 입으로만 먹는 것은 짐승스럽다.
그 빛깔과 모양을 눈으로 보면서 즐기기도 하고,
향기를 맡으면서 과일의 속뜰을 넘어다볼 줄도 알아야 한다.
몇 해 전 유럽을 여행하면서 겪은 일인데, 동행자 중 한 사람은 그 고장 태생으로
우리나라에서 10년 가까이 출가 수도생활을 한 경력이 있다.
지금은 결혼해서 남편과 함께 명상관계의 일을 보면서 지내고 있는데, 이 '아줌마'는
전혀 과일을 고를 줄을 몰랐다.

번번이 설익었거나 맛이 없는 것만을 골랐다. 그의 남편도 잘 아는 터라 그 집에 들러
하루를 쉬었는데, 그 아줌마의 주방 솜씨는 예측했던 대로
앞으로 많이많이 배우고 익혀야 할 수준이었다.
과일을 제대로 고르려면 과일이 맺히기 전의 그 꽃향기까지도 맡아 낼 수 있을 만큼
투명하고 섬세한 감각을 지녀야 한다. 이런 투명하고 섬세한 감각을 지닌
엄마 곁에서 좋은 아기가 자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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