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살아있는 부처 - 연꽃 만나러 가서
지난번 태풍보다 앞서 내린 폭우로 다리가 또 떠내려갔다.
해마다 한두 차례씩 겪는 일이라 이제는 놀라거나 마음 쓸 일도 못 된다.
물이 빠질 때까지 밖에 나가지 말라는 소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지니게 되었다.
약속도 예정된 일도 없으니 길이 끊어져도 불안하거나 초조해 할 건더기가 없다.
언젠가는 신문 원고 마감 때문에 허리께까지 불어난 개울물을 건너느라고 혼이 났었는데 요즘에는 그런
얽힘에서 벗어나 있으니 이 또한 홀가분하다.
무슨 일이고 얽힌다는 것은 그만큼 부자유스럽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얽힘이 없어 거리낄 게 없는 것을 해탈이라 하던가.
쌀독에 아직 쌀이 남아 있고, 밭에 감자와 풋고추와 된장이 있어 굶주릴 염려 없고, 땔감 또한 넉넉하니
걱정 근심이 없다.
벌레도 끼지 않고 실하게 자라던 케일은 노루가 몇 차례 와서 깨끗이 먹어 치운 바람에 식단도 한결 간소해졌다.
예년 같으면 가을철에 뜯어먹을 채소를 조금 갈아야 하는데 올해에는 노루 덕분에 밭 갈고 씨뿌리고 가꾸는
수고도 덜게 되었다.
농사일에 서투르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노루 핑계로 일손이 한결 가벼워졌다.
밖으로 나가는 길이 한동안 이어지지 않는다 하더라고, 읽을 책이 있고 마실 차가 있고, 또 어둠을 밝힐 기름과
초가 있으니 살아가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타오르는 지적 호기심이 있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와 인식에 귀를 기울인다.
최근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일기초 日記秒>를 다시 읽으면서, 나는 쓰다 말다 한 산거일기山居日記를
다시 챙기게 되었다.
이 오두막에 들어 지내면서는 영화를 거의 보지 못했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가 만든 영화는 한 편도 접해 보지 못했다.
그에 대한 소개와 <일기초>를 읽으면서 삶의 열기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일기는 1970년에서 1986년 생을 마치기 직전까지 기록된 것인데,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작가, 사상가들에
대한 흥미로운 성찰과 작품계획과 그 일지, 가족관계, 그 자신의 작업환경, 구 소련의 영화 당국과의 갈등,
현대 문화와 사회에 대한 예리한 성찰 등을 담고 있다.
솔직하고 따뜻한 그의 인간성에 친화력을 느끼게 된다.
1977년 5월 28일자 일기에 그는 '차다예프의 철학적 편지'를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더럽히는 온갖 유치한 호기심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무엇이든지 새로운 것이라면 정신을 빼앗기는 고질적인 경향, 화젯거리를 찾아다니며
그 결과로 다음날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기다리면서 늘 들떠 있는 그 병적인 경향을 뿌리뽑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평화와 행복이 아니라 실망과 역겨움만을 안게 될 것이다.
모든 소음, 외부에서 진행되는 온갖 메아리에 대해서 그대의 문을 굳게 단속하라.
그대가 충분한 결의를 지녔다면 경박한 문학도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글로 씌어진 소음밖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소 긴 인용이지만 자칫 속물 근성에 빠져들기 쉬운 오늘날 우리들 삶의 현실을 비춰 주고 있는 내용이다.
어느 날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인간은 굉장히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가장 중요한 것, 자기 존재의 의미에 대해선
여전히 불확실하다. 이것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는 50회 생일을 앞두고 이렇게 탄식한다.
"내일, 아니 오늘 두 시간만 지나면 나는 쉰 살이다. 맙소사, 내 인생이 이다지도 빨리 지나갔다니..."
우리가 산을 건성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산은 그저 산일 뿐이다.
그러나, 마음을 활짝 열고 산을 진정으로 바라보면 우리 자신도 문득 산이 된다.
내가 정신없이 분주하게 살 때에는 저만치서 산이 나를 보고 있지만, 내 마음이 그윽하고 한가할 때는
내가 산을 본다.
대상과 그를 인식하는 주체가 따로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가 될 때 갈등과 불화는 사라진다.
뜰가에 해바라기가 오늘 아침 처음으로 두 송이 피어났다.
오, 해바라기네 하고 나는 탄성을 질렀다.
사나운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꿋꿋하게 자라 자신의 속얼굴을 꽃으로 열어 보인 것이다.
탐욕스런 사람들에 의해 날로 더럽혀지고 허물어져 가는 이지구촌에 철 따라 피어나는 꽃이 없다면 얼마나
살벌하고 삭막할 것인가.
꽃이 피어나는 이 생명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오늘의 인간들이 겸허하게 맑은 눈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덜 훼손되고 살기 좋은 동네가 될 것이다.
지난 8월 중순 연꽃을 만나기 위해 천릿길을, 왕복 2천리 길을 다녀온 일이 있다.
머나면 길인데도 그만한 가치가 있고도 남았다.
10만 평이나 되는 드넓은 저수지에 백련白蓮이 가득 피어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 다음날로 부랴부랴
찾아 나섰다.
전남 무안군 일로읍 복룡리 복룡저수지. 끝이 가물거리는 33만여 제곱미터 넓이에 백련이 빽빽히 들어차 있었다.
실로 장관이었다.
전주 덕진 연못은 홍련뿐인데 이곳은 백련 일색이었다.
홍련은 흔하지만 백련은 귀하다. 그리고 꽃의 모습이 백련 쪽이 훨씬 격이 있다.
어째서 이런 세계적인 규모의 백련이 지금껏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을 길잡이 해준 바로 이웃 면에 사는 몽평요의 주인도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단다.
궁벽한 시골에서는 식용으로 연뿌리를 캐서 이용했을 뿐 연꽃의 아름다움에는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무안군에서 예산을 들여 그 진입로와 조경시설 등을 내후년까지 완비할 거라고 하면서, 한창 도로를
넓히는 중이었다.
해마다 연꽃이 피어나는 7, 8월이 되면 다녀가기로 마음먹고 발길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 광주시에 매곡동 선임이네 집에 백련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선 걸음에 찾아갔었다.
연못에 피어 있는 백련은 실로 황홀했다. 앞서 본 것보다 꽃도 훨씬 크고 향기도 더욱 맑았다.
너울너울한 잎과 정갈한 꽃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바로 그 꽃에 그 잎이 있다.
여러 꽃향기 중에서도 영혼에까지 스며드는 듯한 신비스런 향기는 단연 연꽃일 거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런 연못가에 조촐하게 정자를 지어 아침저녁으로 연꽃을 가까이서 느끼고 지켜보면서 은은한 꽃향기로
숨결을 고를 수 있다면 참 행복하겠구나 싶었다.
중국 북송北宋시대의 학자 주무숙周茂叔은 그의 <애련설愛蓮說>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내가 오직 연꽃을 사랑함은, 진흙 속에서 났지만 거기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기 때문이다. 속이 비어 사심이 없고, 가지가 뻗지 않아 흔들림이 없다.
그 그윽한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그의 높은 품격은 누구도 업신여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연은 꽃 가운데 군자라 한다."
연은 하나도 버릴 게 없다. 그 뿌리는 식용과 약으로 널리 쓰이고, 잎은 음식을 싸서 찌는 데 쓰이며, 그 열매인
연실은 신선들이 즐겨 먹는 음식으로 혹은 약재로 예전부터 쓰였다.
그리고 꽃과 향기는 나같이 철이 덜 든 사람을 천리 밖에서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있다.
한여름 더위를 모르고 지내다가 연꽃 만나러 갔던 그날은 더위 속에 땀깨나 흘렸었다.
그러나 정든 사람을 만나고 온 듯한 그런 두근거림과 감회를 느끼면서 살아 있는 기쁨을 누렸었다.
이 다음 생에 어느 산자락에 집을 짓게 되며, 꼭 연못을 파서 백련을 심고 연못가에 정자를 지어 연꽃 향기
같은 삶을 누리고 싶다.
아,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부풀어오르네!
<9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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