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법정)

맑고 향기롭게 3.단순하고 간소한 삶-겨울 채비를 하며

qhrwk 2022. 6. 28. 11:17

♣겨울 채비를 하며♣

서리가 내리고 개울가에 살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내 오두막에서도 일손이 바빠진다. 

캐다가 남긴 고구마를 마저 캐서 들여야 하고. 겨울 동안 난로에 지필 장작을 골라서 추녀 밑에 다로 쌓아 놓아야 한다.
장작의 길이가 길면 나로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짧은 걸로 가리고 통으로 된 나무는 쪼개 놓아야 한다.

그리고 불 쏘시재로 쓰기 위해 관솔이 밴 소나무 장작을 잘게 쪼개 놓은다.

산중의 겨울은 댈감만 넉넉하면 어떤 추위도 두렵지 않다.

양식이야 그때그때 날라다 먹으면 된다. 

겨울 동안 수고해 줄 무쇠난로를 들기름 걸레로 닦아 주고, 연통의 틈새도 은박 테이프로 감아 주었다.
나는 기질적으로 미적지근한 날씨보다 살갗이 얼얼한 쌀쌀한 날씨가 좋다.
내 삶에 긴장감이 돌기 때문이다. 팽팽하게 긴장감이 돌아야 산중에서 사는 맛이 난다.

내가 홀로 사는 이유는 누구의 도움이나 방해를 받음 없이 홀가분하게 내 식대로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이 있을 때 전에 살던 암자에 내려가 이틀니나 사흘을 머물다 오는 일이 있는데, 남이 해 놓은 밥을 얻어먹는 편함과

여럿이 먹는 즐거움이 없는건 아니지만, 내 생활의 리듬의 느슨해지는 것 같아사흘 이상 머물지 않는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끊임없이 가구고 챙겨야 한다.
안팎으로 자신의 현 존재를 살피고 점검해야 한다. 핸들을 잡고 차를 몰고 가듯이 방심하지 말고,자신을 운전 해

가는 것이다.

자기 나름의 투철한삶의 질서를 지니지 않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꼴물견이 되기 쉽고 추해진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늘 새롭다,새로워지려면 묵은 생각이나 낡은 틀에 갇혀 있지 말아야 한다.

어디에건 편하게 안주하면 곰팡이가 슬고 녹이슨다.
어느날 일 끝에 개울가에서 흙 묻은 연장을 씻다가, 끝없이 흐르는 이 개울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한번 찾아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신발을 갈아 신고 지팡이를 짚고 나섰다. 두시간 가까이 상류로, 상류로 올라갔지만 그 흐름은 끝이 없었다.

이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하, 이 세계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 졌는데 개울물의 근원을 찾아 무엇하겠는가.'흙과 물과 바람, 

이 네가지 요소로 이 몸도 이루어졌고,우리가 몸 담아 사는 세상도 또한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졌다.

이 네가지를 떠나서는 우리가 살 수 없다.흙과 땅이 없다면 어디에 기대고 살겠는가.물과 불 없이, 바람과 공기 없이

어떻게 살수 있는가.이 가을에 새삼스럽게도 흙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고랭지에서는 상품가치가 없는 채소는 방치해 버린다.
오두막으로 올라오는 길에 배추밭이 있는데, 팔고 남은 이삭이 많아 가을 내내 뜯어다 국도 끊이고 김치도 담가 먹는다. 

흙이 아니면 어디서 이런 신선한 채소를 얻을 수있겠는가.

오르내리면서 한동안 계분 냄새와 농약 냄새를 맡은 그 보상으로 이런 이삭을 주워다 먹는구나 싶었다.

눈이 내려 쌓이고 강추위가 오기 까지는 이삭 배추의 해택은 계속해서 입게 될 것이다.
가을이면 습한 개울가에 진남빛 용담이 핀다. 그 뿌리가 용의 쓸개보다 더 쓰다고 해서 용담이란 이름이 생겼다는데,

 그 용을 누가 보았단 말인가. 또 그 쓸개의 맛은 누가 보았는가.

이름에는 그런 허무맹랭한 것이 더러 있다.어째든 가을 야생화 중에서 용담은 산중의 귀한 꽃이다.

그런데 이 용담은 늘 입을 다문채 있다. 활짝 피어 있는 걸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식물도감을 보아도 대부분 봉우리로 있는 것만을 싣고 있다.물을 길러 개울가로 갈 때마다 발치에 유난히 어린 용담이

한 그루 눈에 띄었다.

그때마다 눈여겨 보면서 "잘 있었니?" 하고 안부를 묻곤 했다.

둘레에 많은 용담이 꽃봉우리를 머금고 있는데, 그 한그루만 외떨어져 여리게 올라와 있었다.

나는 어느날 그 용담에게 두런두런 말을 걸었다.
"아직 내 방을 구경 못했는데 문좀 열어 볼래?"
그 이튼날 물을 길러 개울가에 갔더니 마침내 그 용담이 문을 열어 주었다.
희고 가녀린 꽃술이 보였다. 처음으로 본 용담의 꽃술이다. 그 용담은 ,그토록 가녀린 용담은 다른 용담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난 후까지도 자리를 지키면서 나를 맞아 주었다.

사람의 눈길과 관심이 식물의 세계와 교감 할 수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식물하자 루터바뱅크는 이렇게 말 한적이 있다.
"식물을 독특하게 길러내고자 할 때면 나는 무릅을 끓고 그 식물에게 말을 건낸다.
식물에게는 20가지도 넘는 지각 기능이 있는데, 인간의 그것과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지난 여름 절 마당 한쪽에 버려진 덩굴 식물이 눈에 띄어 그걸 주워 화분에 심어 두었다. 

최근에야 그 이름이 '싱고니음'이란 걸 알았다. 

그때는 잎파리가 2잎뿐이었는데 한잎은 이내 시들고 말았다. 

날마다 눈길을 주면서 목이 마를까봐 물을 자주 주었다.

덩굴은 한참만에 기운을 차리고 새 줄기와 잎을 내 보였다. 

받침대를 세워주고 차 찌꺼기 삭힌 물을 거름 삼아 주었다.

겨우 한잎뿐이던 것이 지금은 30여개나 되는 이파리와 2자반이 넘는 줄기로무성하게 자라났다. 

보살핌에 대한 그 보답을 지켜 보면서, 식물은 우주에 뿌리를 내린 감정이 있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식물은 인간에게 유익한 에너지를 내 보내고 있는데. 투명한 사람만이 그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기운이 달리면 숲 속으로 들어가 두 팔을 활짝 벌린채 소나무에 등을 기대고 기운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살아 있는 생명채를 가까이해야 삶에 활기가 솟는다.
식물에서 삶의 신비를 배우고 기운을 받아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