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담배는 그런 것이다
국민의 5분의 1 이상이 상시적 흡연자인데도
그들을 위한 대책은 금연의 일방적인 압박뿐이라는 것은 유감이다.
때론 폭력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광활한 들 한가운데에서 혼자 담배를 피울 때에도 죄짓는 기분이 든다.
그들은 “죄인” 또는 “기형”이다.
지하철이나 하수도 환풍구를 들여다보면 담배꽁초가 수북하다.
고층빌딩 앞 화단 귀퉁이도 그렇다. 버릴 데 없으므로,
행여 누가 볼세라 ‘죄의식’을 느끼면서꽁초를 버리는 불쌍한
기형의 손, 손, 손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이중의 고통을 받는다.
시가를 물고 있는 처칠과 굴뚝처럼 담배연기를 품어내던 아이젠하워가 떠오른다.
독설가 오스카 와일드는 언제나 호주머니에 불룩하게 담뱃갑을 넣고 다녔으며
시인 오상순이나 영화감독 유현목은 살아생전 하루 3갑 이상의 담배를 피웠다고 듣는다.
몰리에르는 담배를 가리켜 ‘신사의 정열’이라고 예찬했고,
린위탕(임어당)은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절대 아내와 다투지 않는다”고
지적했으며, 작가 김동인은 “근심이 있을 때 한 모금의 연초는 그 근심을 반감하고,
권태로울 때 그것은 능률을 올리게 하며,피곤할 때 그것은 피곤을 사라지게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고된 노동이 끝났을 때, 창조적인 작업의 고통스런 단애와 직면했을 때,
인생을 실패했다고 여길 때,
나 혼자뿐이라는 절상의 고독과 마주쳤을 때,
죽고 싶을 때, 담배 한 개비가 주는 위로와 치유, 또는 부활을 위한 신비한 발화,
향기로운 성찰을 한번이라도 고려해본 적이 있는가.
노무현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바로 그때,
금연을 오랫동안 시도했으나 완전 성공하지 못했던 그의 호주머니에 정말 담배가
있었다면, 그리하며 그 바위 위에서 한 개비의 담배를 피울 만큼 시간을 벌었다면,
어쩌면 그는 죽음으로 가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상상해본다.
누군가에게 담배는 그런 것이다.
천만 흡연자들이 몸에 안 좋은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 자신만 알고 있는 내적 개연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살을 시도했다고 벌금을 물릴 수는 없다.
과음했다는 것만으로 ‘국민건강’을 고려해 거리에서 추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오로지 ‘금지’하는 것만으로 성공한 정책은 본 적이 없다.
인간은 불가사의한 영혼을 지닌 문화적인 동물이다.
담배는 비의적인 영혼과 다양한 문화, 팍팍한 삶의 언저리에 두루 놓여 있다.
피우려는 자의 권리도 배려해야 한다.
글 -박범신
'향기로운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소하고 개인적인 슬픔 (0) | 2022.02.17 |
---|---|
우리 시대의 역설 (0) | 2022.02.17 |
왜 닐바나를 찾지 않는가 (0) | 2022.02.17 |
세상에는 일곱 종류의 아내가 있다 (0) | 2022.02.17 |
내 안에 미움을 만들지 마세요 (0) | 2022.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