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법정)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3.살아있는 부처 - 에게 해에서

qhrwk 2022. 3. 8. 06:53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3.살아있는 부처 - 에게 해에서

♣에게 해에서♣

눈 속에 갇혀 지내다가 바다를 보러 나갔다.
불쑥 생각이 일때마다 들르는 바다인데,
모처럼 맑게 갠 화창한 날씨 덕에 봄바다처럼 싱그러웠다.
염분 섞인 갯내음이 가슴을 한껏 부풀게 했다.
동해안은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어, 일망무제의 확 트인 바다를 대할 수 있다.
요즘은 해변 어디를 가나 양식장의 스티로몸으로 인해 바다 같지 않은 바다뿐인데,
수심이 깊은 강원도 쪽 동해안은 천연 그대로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아슴아슴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망망대해茫茫大海라는 말에 실감이 간다.
수평선은 하늘과 바다가 지닌 신비를 사람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만약 저 바다 너머에 있는 어떤 도시가 그대로 우리 눈에 들어온다면,
누가 수평선에 무심히 눈을 팔고 있을 것인가.

바다는 이렇게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충만감으로 우리앞에 다가선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자질구레한 것들이 이 드넓은 바다에 와서 보면
한낱 소꿉장난의 사금파리처럼 시시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반 고흐는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그 가는 회색빛 선을 좋아한다고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띄운 적이 있다.
날씨가 맑을 때는 그 가는 회색빛이 드러나지만,
흐린 날은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서부터 바다인지 그 경계를 가늠할 수 없다.
이런 날의 수평선은 예측할 수 없는 우리들의 미래처럼 저만치서 흐려 있다.

바다에 대한 내 최초의 경험과 인식은 다섯 살 때 빠져 죽을 뻔했던 일로부터 시작한다.
여름날 이웃집 형을 따라 바닷가에 나갔다가 해초의 일종인 '갯건불'을 건지려다 물에 빠진 것이다.
궁핍했던 그 시절 해변의 아이들은 그 뿌리와 줄기가 달착지근한 갯건불이라고
불린 해초를 질겅질겅 개물어 단물을 빨았다.
부두에 밧줄로 매여 있는 조그만 보트에 올라 고물에 엎드려 갯건불을 건지려다가
배가 흔들리는 바람에 그만 바다에 빠진것이다.
물에 빠진 순간 코로 물이 들어와 숨이 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함께 간 아이는 내가 물에 빠지자 무서워서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어디론지 달아나 숨어 버렸다.

그때가 여름철이라 허우적거리면서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배를 타고 와 구출했다고 한다.
내 소싯적에는(나도 늙었나 봐, 이런 표현을 하고 있으니) 유달산에 올라가
다도해 섬 사이로 떠나가는 배 바라보기를 좋아했었다.
어디론지 모르게 떠나가는 배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좀 허전하고 쓸쓸해져
나도 어디론가 멀리 떠나가고 싶은 생각이 문득문득 일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나서부터
나는 그가 살았던 크레타에 한번 가 보고 싶었다.
지난해 여름 볼일로 파리에 갔다가 드디어 그리스로 날아갔다.
파리에서 아테네까지는 비행시간 두 시간 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같은 철인들이 활약했던 도시 아테네,
한때 서양 문명의 중심을 이룬 도시국가 아테네가 오늘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
돌덩이만 남은 유적으로 나그네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옛 철인들이 자신의 철학을 군중 앞에 펼치던 그 거리가 어디쯤인지 궁금했다.
피레우스 항에 인접해 있는 시장통 아고라가 그들의 활동 무대였을 거라고 했다.
아고라는 시끌벅적하고 너절한 거리였다.
과일 가게가 늘어선 곳에서는 여기저기서 자기 물건을 사라고 큰소리로 외쳐대고 있었다.
무슨 소린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분위기에 흥이 나서 나도 우렁찬 목소리로
"싸구려 싸구려 포도 한 관에 단돈 천 원이오. 천 원!" 하고 외쳤더니
둘레가 잠잠해지며 다들 나를 보고 웃어 주었다.
아마 그들은 나를 동양에서 온 쿵푸 마스터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크레타(현지에서 '크리티'로 부른다)로 가려면 아테네에서 남서쪽으로
1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피레우스에서 이라클리온으로 가는 밤배를 타야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
"나는 피레우스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크레타섬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항구에 나가 있었을 때였다.
날이 밝기 직전인데 밖에서는 비가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르바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 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지닌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그런 사나이였다."

크레타로 가는 배는 승객 2천 명을 태울 수 있는 1만 9천 톤급호화 여객선이다.
오랜만에 듣는우렁찬 뱃고동 소리, 출발 직전 '부웅 부웅 부웅.....'하고
세 차례 기적을 울리자 곁에 정박한 같은 회사의 비에서도
세 번 화답을 하고, 친지들을 싣고 전송나온 승용차들마다 경적을 울렸다.

에게 해의 물빛은 짙은 감청색, 석양에 비낀 바다빛은 듣던 대로 포도주빛이었다.
지중해의 물빛은 투명한데,
에게 해는 신화라도 잉태하고 있는 듯 신비롭고 어둡다.
갑판에 나가 저녁노을을 바라보다가 선창 안으로 시선을 돌리니,
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텔레비전에서 북한 김일성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고 있었다.
땅을 치며 울부짖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게 꿈이 아닌가 싶었다.
우리 한반도에서 한쪽의 역사가 막을 내리는 장면을 에게 해에서 보게 되다니
그 감회가 실로 미묘했다.

오후 8시 20분에 떠난 배는 열 시간 항해 끝에 이튿날 아침 6시 30분 크레타에 도착했다.
이라클리온에는 카잔차키스를 기념하는 곳이 세 군데 있다.
역사 박물관 안에 '카잔차키스의 방'이 따로 있는데,
거기 장서와 그가 쓰던 책상과 의자, 지팡이, 만년필, 친필 원고,
그의 저서와 편지, 사진 등이 전시되어있다.
또 유스 호스텔 가까이에 카잔차키스 거리가 있는데,
좁은 골목길 18번지는 한동안 그가 살았던 집이다.
지금은 주인이 바뀌어 밖에서만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성루에 그의 묘가 있는데,
그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

이라크리온에서 남쪽으로 올리브와 포도밭으로 둘러싸인 메마른 언덕길을
10킬로미터쯤 가면 메시아 마을 밀티아에 카잔차키스의 생가가 있는데,
그의 기념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여러 나라 말로 번역 출간된 그의 저서와 사진, 화보, 원고와 연극 푸스터며 초상화,
그라마와 오페라 등의 자료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화<그리스인 조르바> 의 주역을 맡은 앤터니 퀸이 미망인 엘레나 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에 그가 서명한 글씨도 있다.

"조르바 역을 맡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작품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한 사람의 친구를 만난 느낌입니다."
나는 어떤 작품을 읽고 나서 그 작가가 좋아지면 그의 작품을 모조리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성미를 한때는 지니고 있었다.
멀리 크레타까지 가서 카잔차키스의 자취를 더듬어 본 것도
그 고장 그 풍토에서 조르바를 느끼고 싶어서였다.

나는 크레타에서 에게 해의 신비스런 물빛에 이끌리어 산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바다에 들어가 수영을 했다.
여장을 푼 곳이 비치 호텔이라 수영복 차림으로 바다에 뛰어들 수 있었다.
국내에서라면 엄두도 못낼 일인데 에게 해는 그만큼 너그러웠다.
바다는, 너그러운 바다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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