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성철스님] 내가 부처가 된 때 2.

qhrwk 2024. 10. 18. 07:24

 

 

♣[성철스님] 내가 부처가 된 때2♣

오직 근본요(根本要)는 어디 있느냐 하면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부터 성불한 면목,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래부터가 전체 불국토라는 것, 이것만 바로 알면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참 좋은 법이야. 우리 모두가 불국토에 살고, 

우리 전체가 모두 부처라고 하니 노력할 것이 뭐 있나, 공부도 할 것 없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무래도 안 좋은가.이렇게도 혹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근본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토(佛土)이고, 본래 해가 떠서 온 천지를 비추고 있지만 눈감은 사람은 

광명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이지만 눈감고 있으면 캄캄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알간 거울에 먼지가 꽉 끼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은 본래 깨끗하고 말갛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있는대로 다 비춥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먼지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명경(明鏡)에 때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하는 것. 여기에 묘(妙)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 부처라는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내가 본래 부처다, 내가 본래 불국토에 산다, 

이것만 믿고 '내가 공부를 안해도 된다', '눈뜰 필요없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봉사를 못면합니다. 

영원토록 캄캄 밤중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슨 자신을 가질 수 있느냐 하면 설사 우리가 눈을 감고 앉아서 광명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광명 속에 산다는 것,광명 속에 살고 있으니 눈만 뜨면 그만이라는 것, 설사 내가 완전한 부처의 

행동을 할 수 없고 불국토를 보지 못한다고 해서 본래 부처라는 것, 본래 불국토에 산다는 

그런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는 것은 눈을 뜨지 못하여 그것을 보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쓰지 못한다고 하지만 전후좌우에 황금이 꽉 차 있는 것을 알 것 같으면 눈만 뜨면 

그 황금이 모두 내 물건 내 소유이니 얼마나 반가운 소식입니까?
 이것을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현실 이대로가 절대다'하는 것입니다. 

즉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전에도 얘기한 바 있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고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인데 이 불생불멸의 원리는 자고로 불교의 

특권이요, 전용어가 되어 있다고.그러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원자 물리학에서도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리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해서 불교가 수승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원래 그런 원리가 있는데 요즘 과학이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불교에 가까이 

온 것뿐입니다.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여년 전에 우주법계의 불생불멸을 선언하셨고, 

과학은 오늘에 와서야 자연의 불생불멸을 실증함으로써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내용은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존재는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하여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무량불사를 하는 

그런 큰 존재입니다. 다만 병이 어느 곳에 있느냐, 눈을 뜨지 못하여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눈을 뜨겠느냐 이것입니다. '스님도 딱하시네.
 
내 눈은 멀쩡한데 내가 기둥이라도 들이받았는가. 왜 우리 보고 자꾸만 눈감았다.
눈감았다, 하시는고?'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껍데기 눈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한밤중에 바늘귀를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눈 가지고는 소용없습니다.

그런 눈은 안 통합니다. 속의 눈, 마음의 눈, 마음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명경에 끼인 때를 벗겨야 합니다.

 

명경의 때를 다 닦아내어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해가 대명중천(大明中天)하여 시방세계를

고루 부치고 있는 것이, 맑고 맑은 거울에 고요하게 그대로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거울의 때를 벗기고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는가?가장 쉬운 방법이며 제일

빠른 방법이 참선(參禪)입니다. 화두(話頭)를 배워서 부지런히 부지런히 참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두를 바로 깨칠 것 같으면 마음의 눈을 안뜰래야 안뜰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뻔쩍 뜨이고 맙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 번 뛰어 부처지 위에

들어간다고, 한 번 훌쩍 뛰면 눈 다 떠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일 쉬운 방법이 참선하는 방법입니다.


그 외에도 방법이 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무엇이 가리고 있어서 캄캄하게 되었는가? 

그 원인, 마음 눈이 어두워지는 원인이 있으니 그것을 제거하면 될 것 아닙니까? 

불교에서는 그것을 탐(貪), 진(瞋), 치(癡),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이 삼독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인 여기에서 중생이니, 사바세계니, 

지옥을 가느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눈을 가린 삼독, 삼독만 완전히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저절로 안밝아질래야 

안밝아질 수 없습니다. 그 삼독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근본이냐 하면 탐욕입니다. 

탐욕! 탐내는 마음이 근본이 되어서 성내는 마음도 생기고 어리석은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탐욕만 근본적으로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자연적으로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탐욕은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 '나'라는 것 때문에 생겼습니다. 

나! 남이야 죽든가 말든가 알 턱이 있나, 어떻게든 나만 좀 잘 살자, 나만! 하는 데에서 모든 

욕심이다 생기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서 자꾸 남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눈은 영영 어두워집니다. 캄캄하게 자꾸 더 어두워집니다. 

그런 욕심을 버리고 마음 눈을 밝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라는 것, 나라는 욕심을 버리고

 '남'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나 무엇을 생각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자나깨나 나뿐 아닙니까?

그 생각을 완전히 거꾸로 해서 자나깨나 남의 생각 남의 걱정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의 기준을 남을 위해 사는 데에 둡니다. 남 도우는 데에 기준을 둔단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삼독이 녹아지는 동시에 마음의 눈이 자꾸자꾸 밝아집니다.

그리하여 탐, 진, 치 삼독이 완전히 다 녹아버리면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이 다 없어져 버리는데 눈이

안보일 리 있습니까? 탐, 진, 치 삼독이 다 녹아버리는 데에 가서는 눈이 완전히 뜨여서 저 밝은

광명을 환히 볼 수 있고, 과거 무량아승지겁 부터 내가 부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시방세계가 전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하고 물으면 이렇게 답합니다.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다.' 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라는 것을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과는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는 남을 위하다가 내가 배고파

죽을 것 같지만, 설사 남을 위하다가 배가 고파 죽는다고 해도, 남을 위해서 노력한 그것이 근본이

되어서 내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밝아지는 동시에 무슨 큰 이득이 오느냐 하면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라는 것을!자기는 굶어 죽더라도 남을 도와주라고 하면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자신부터

한 번 굶어 보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70평생을 산다고 해도, 80살을 산다고 해도

잠깐 동안입니다. 설사 100살을 살면서 지구 땅덩어리의 온 재산을 전부 내 살림살이로 만든다고

해봅시다. 부처님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해서 또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온 시방법계를

내 집으로 삼고 내 살림살이로 삼았는데 그 많은 살림살이를 어떻게 계산하겠습니까?

인생 100년 생활이라는 것이 아무리 부귀영화를 하고 잘 산다고 해도, 미래겁이 다하도록 

시방법계, 시방불토에서 무애자재한 그런 대생활을 한 그것에 비교한다면 이것은 티끌 

하나도 안됩니다. 

조그마한 먼지 하나도 안됩니다. 내용을 보면 10원짜리도 안됩니다. 

그러나 10원짜리도 안되는 이 인생을 완전히 포기해서 남을 위해서만 살고 어떻게든 남을 

위해서만 노력합니다. 그러면 저 무량아승지겁, 억천만겁 전부터 성불해 있는 그 나라에 들어가고 

그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10원짜리 나를 희생하여 여러 억천만원이 넘는 참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괜찮은 장사가 아닙니까. 장사를 하려면 큼직한 장사를 

해야 합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사는 것은 공연히 10원 20원 가지고 죽니, 사니 칼부림을 하는 

그런 식 아닙니까?

아주 먼 옛날 부처님께서는 배고픈 호랑이에게 몸을 잡아먹히셨습니다. 

몸뚱이까지 잡아먹히셨으니 말할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배고픈 호랑이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 내용에는 큰 욕심, 큰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물거품같은 몸뚱이 하나를 턱 버리면 그와 동시에 시방법계 큰 불국토에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것도 그런 것입니다. 

나중에 크면 임금이 될 것이지만 이것도 가져봐야 별 것 아닙니다. 

서푼어치의 값도 안되는 줄 알고 왕위도 헌신짝같이 차버리고 큰 돈벌이를 한 것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