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스님은 금강산에 있는 선원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용맹스럽게 정진을 계속했다.
밤에는 눕지 않고 앉은 채 공부하고, 오후에는 먹지도 않았다.
승가에서는 하루 두끼만 먹고 오후에는 먹지 않는 것이 예전부터 내려오는 규칙이다.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일 줄 모른다고 해서 이때부터 ‘절구통 수좌(首座)’ 라는
별명이 생겼다. 수좌란 흔히 참선하는 스님을 가리키는 말인데 원뜻은이렇다.
‘능히 오욕을 끊으므로 우두머리라 하고(能斷五欲 謂之首), 우뚝하여 움직이지 앉으므로
자리라 한다(如女不動 謂之座).‘
중이 된 지 다섯 해,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스님은 초조했다.
자신의 두터운 숙세의 업장(業障)과 무능을 한탄했다.
대중이 여럿이서 거처하는 처소에서는 마음껏 정진하기가 어려웠다.
스님은 생각 끝에 토굴을 하나 짓기로 했다.
곳은 금강산 법기암(法起庵) 뒤. 구조는 단칸방. 한 구석에 대소변을 볼 수 있는 구멍을
뚫어 밖으로 내고, 밥이 들어올 수 있는 조그만 창문 하나만을 내었다.
그리고 스님이 방에 들어 앉은 뒤 밖에서 벽을 바르도록 일렀다. 1930년 늦은 봄,
스님의 나이 마흔 세 살 때. 깨닫기 전에는 죽어도 다시는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라
맹세를 하고 토굴에 들어갔다. 그것은 결사적인 각오였다. 그때 가지고 들어간 것은 입은
옷에 방석 석장 뿐. 하루 한끼씩 공양을 들여보내 줄 것을 당부했다.
이제 스님에게는 기쁨도 슬픔도, 편하고 괴로움도, 먹고 입고 자는 일도 다 아랑곳 없었다.
오로지 뭇자 화두를 깨뜨리기 위한 용맹정진이 있을 따름이었다.
일체 인간의 풍습권 밖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암자의 토굴과의 거래는 하루 한끼씩 공양을 토굴안으로 들여주는 일, 그 전날 빈 그릇을
챙기고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주는 일 뿐이었다. 인기척이 없는 토굴 안에서는 자는지
정진을 하는지 혹은 앓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 전날 밥 그릇이 비어 있는 걸 보고 살아있다는
것을 짐작할 따름. 그러니 밖에서는 토굴 안의 동정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도 지나갔다. 그리고 새봄.하루는 시자가 공양을
가지고 가니 그 전날 놓아둔 공양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스님, 왜 공양을 안 드셨습니까?"이 소리에 스님은 비로소 어제의 공양이 창구에 있는 것을
의식했다. 그 전날부터 공양이 온 줄도 모르고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1931년 여름, 비가 개인 어느날 아침.드디어 토굴벽이 무너졌다.
1년 6개월 만에 벽을 발로 차 무너뜨리고 토굴 밖으로 나온 것이다.
필사적인 정진 끝에 열린 바가 있었다.
더 의심할 것 없이 이만하면 나가도 되겠다는 신념이 생긴 것이다. 과거와 현재 또는 미래의
무수한 수행자들이 오로지 ‘이 일’을 위해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정진을 한다.
지혜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밥도둑을 면할 길이 없다.
눈은 가로 째지고 코는 곧게 뻗은진짜 소식을 알아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발길을 제대로 떼어 놓을 수 없었다.
일년 반만에 걷는 걸음이라 어린애처럼 비틀비틀 걸음마를 해야 했다.
머리와 수염은 텁수룩하게 길었고 손톱과 발톱도 일년 반을 자랐다.
그새 세수한번 하지 않았는데도 얼굴만은 환하게 빛났었다고 한다.
그때의 심경을 글로 읊었다. 그것은 오도송(悟道頌)이었다. 마흔 네 살 때의 일.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타는 불속 거미집에는 고기가 차를 달이네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海底燕巢鹿抱卵火中蛛室魚煎茶此家消息誰能識白雲西飛月東走
이에 석두화상께서 이런 사좌전송(師佐傳頌)을 내린다.
봄이 오니 온갖 꽃 누굴 위해 피는고동으로 가면서 서로 가는 이익 보지 못하네
흰 머리 자식이 검은 머리 아비에게 나아가니두 마리 진흙소가 싸우다 바다에 들어간다.
春至百花爲誰開東行不見西行利白頭子就黑頭父兩個泥牛戰入海
1932년 4월 초파일 유점사에서 동선(東宣)화상을 계사로 구족계(具足戒)와 보살계를 받았다.
마흔 다섯 때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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