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의 삶을 살라♣
비오는 산방 다실에 앉아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추적추적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홀로 차 한 잔 마시는 즐거움은 산사에 사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이럴 때는 홀로 이 대자연의 연주를 감상하며 차향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요즘처럼 이런 비가
며칠이고 내내 쏟아지는 날은 이따금 맑은 차 한 잔 함께 나눌 도반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이런 날, 도반이 그리운 바로 이런 날, 어떻게 알았는지, 마음이 통했는지 먼 곳에 있던
그리운 벗이 찾아올 때면 그 반가움은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그럴 때는 그저 서로 마주보며 따뜻한 차 한 잔에 미소를 띄워 보내는 것만으로도 둘 사이에
짠한 침묵의 교류가 흐른다.
오히려 말로써 시시콜콜한 잡담을 늘어놓게 되면 첫 만남의 향기가 이내 흩어지기 쉽다.
‘잘 지냈냐’는 말 한 마디와 따뜻한 눈빛을 들을 때 ‘그저 그렇게 살고 있다’는 답과 함께 따뜻한
차를 한 잔 우려 내 주면 그것으로 이 진한 감동과 너울은 차향이 되어 피어오른다.
얼마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어떻게 알게 된 수녀님이 계셨는데 먼 길 마다않고 불쑥 찾아 와 오래도록 차 향기에 취하게
해 주셨다. 퍽이나 발랄하고 허물이 없어 처음 뵈었을 때부터 전혀 부담 없이 이런 저런 넉두리를
늘어 놓아도 좋을 것 같은 그런 분이셨다.
수녀복을 정갈하게 입고 계시면서도 수녀님 같다기 보다는 그냥 편한 누이 같기도 하고 동네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이웃 같기도 한 그런 모습이 더욱 내 마음에 벽을 없애 주었다.
일반적으로 스님이든 수녀님이든 승복이나 수녀복을 입고 있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행실이
달라지곤 한다. 물론 그런 것은 불교에서도 위의威儀라고 하여 스님다운 여법한 행실로써
강조되기도 하지만, 때로 그런데 갇히게 되면 자기만의 자신다운 빛을 잃고 자칫 ‘스님다운’
모습에 자신을 맞춰가는 딱딱한 모습이 되기 쉽다.
내 생각에 참된 스님은 ‘스님다운’ 사람이라거나, ‘부처님 같이’ 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 틀에서도 벗어나 온전한 자신으로써의 향기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맑은 수행자에게서는 향기가 난다.
그러나 그 향기는 '수행자'나 ‘구도자’라는 거창한 이름에서 오는 향기가 아닌 그저 한 사람으로써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모습에서 온다.
제 스스로 수행자라고 티를 내거나, 스님의 상에 갇혀 거만하고 우쭐거리지 않고, 자신에 대한
아무런 한정도 짓지 않은 그저 '자기 자신'으로써 만족하는 자유로운 사람, 그런 수더분한
사람에게서 되려 참 수행자의 향기는 풍겨 나오는 것이다.
그저 자기 자신이면 되지 거기에 무슨 무슨 상을 덮씌울 것도 없고, '수행자'라느니,
'스님'이라느니, '선생님'이라느니, ‘사장’이라느니 하고 이름 붙여 놓고 거기에 제 스스로 갇혀
살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런데 요즈음 이따금씩 '수행자' 병에 걸리고, '성직자' 병에, 또 ‘신앙인’ 병에 걸려 있는 어리석은
이들을 본다. 불쑥 불쑥 찾아와서는 자신이 얼마나 수행을 잘 하고 있는지, 절을 참선을 또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를 자기 자랑삼아 늘어놓거나, 혹은 '수행자처럼' '성직자처럼' 또
'기도 잘 하는 신도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을 때때로 보게 된다.
자신 입장에서 보면 수행 안 하는 사람이 참 어리석어 보인다고 하면서, 혹은 타종교를 믿는
사람이 참 안돼 보인다고 하면서 제 수행과 공부 편력을 늘어놓는 사람을 보면서 참 수행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된다.
참 수행자는 '수행자'라는 상으로 부터 자유로운 사람일 것이다.
수행을 하는 사람이 수행 안 하는 사람을 볼 때 우쭐한 마음이 생긴다거나 나 잘난 마음이
올라온다면 나는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상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제 스스로 수행자라는 틀에 얽매여 있는 어리석고도 위험한 사람이다.
세상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학벌이나 직장 좋은 사람이, 혹은 더 많이 배운 지식인이 스스로
우월감을 가진다거나,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향해 비웃거나 얕잡아 본다면 그건 전혀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상을 내는 것이 무서운 줄을 알아야한다.
수행자라는 것도 하나의 분별심일 뿐, 수행자라는 분별이 있으니 수행자 아닌 사람을 얕보는
마음도 생기고, 나는 수행 안 하는 사람하고는 다르다는 차별의 마음도 생기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수행자다운, 성직자다운, 종교인다운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그것이 또 다른 하나의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 그저 평범한 내가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수행자는 이래야 한다는 틀이 정해져 있다면,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수행자답게' 살려고
애쓰고 노력한다면 그 때 우린 참 수행자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구도자답게 사는 것은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일 것이다.
누구처럼도 아니고, 깨달은 사람처럼도 아니며, 누구 눈치를 볼 것도 없고, 어떤 관념의 틀에
사로잡힐 것도 없이 그저 온전한 나 자신이 되는 것 그것이 수행자의 참 모습이 아니겠는가.
나답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수행자다운 삶일 것이다.
어디 수행자 뿐이겠는가.
부모도 부모로써의 권위를 너무 앞세워 ‘어떻게 하면 부모답게 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보다는 나다운 순수한 삶의 철학과 나다운 진실된 모습으로 다가설 때 참된 부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모가 부모라는 권위를 앞세워 자식 앞에 군림하려 하거나, 부모니까 ‘내 자식 내 뜻대로’
하겠다는 생각은 권위적인 사회에서 나온 발상일 뿐, 거기에 끌려 갈 필요는 없다.
그래서 어떤 부모는 좋고 어떤 부모는 나쁘다거나, 어떤 부모님은 100점인데 우리 부모님은
50점도 안 된다거나 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어떤 정형화 된 부모로써의 ‘틀’을 세워 놓으니까 그 틀에 맞춰 더 좋거나 더 나쁜, 그리고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기준이 생겨나지 그 모든 틀을 던져 버리고 오직 ‘나답게’ 자식을 기르고 가르칠 수
있다면 저마다 온전한 100점짜리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겠나.
사장도 회장도 장관도 아무리 높은 사회적 지위라도 그 지위의 틀 속에만 갇혀서 ‘내가 사장인데’
‘내가 지휘관인데’ ‘내가 선생님인데’ 하는 그 한 생각에 얽매여 있다 보면 오히려 그로인해
자유롭지 못한 강박증을 일으키기 쉽다.
나는 나다운 길을 걸을 수 있으면 된다.
어떤 틀에 갇혀 그렇게 되기 위해 애쓰는 길 보다 나다운 모습으로 나답게 일을 해 나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에도 더 조화롭고 진리에도 더 합일하는 것이 아닐까.물론 잘 하는 사람의 장점을
배우려고 할 필요는 있겠지만 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열등과 우월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장도 저마다 성공의 방법이 있는 것이고, 선생님도 저마다의 서로 다른 교수방식이 있는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성공했다고 그 길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며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의 성공방법이 있고 나는 나대로의 방법이 있는 것이다.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은 성공을 하더라도 그 방법이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향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사람의 성공방식을 보고 스스로를 그 틀에 맞추려고 하다보면 성격에
맞지 않는 것을 해야 하다보니 얼마나 괴롭고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답답하겠는가.
그랬을 때 내면에는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등 자기다운 본연의 빛을
잃고 만다.
내향적인 사람은 내향적인 사람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독자적인 길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길일 뿐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서로 다른 그 모든 길은 결국 ‘진리’라는, ‘궁극’이라는 본연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처럼’ ‘누구처럼’ ‘성공한 사람처럼’ ‘위인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고 ‘나 자신처럼’ 자유롭게
사는 것이야말로 그 중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선명한 길이다.
그러니 장점은 배우되 거기에 얽매여 자신을 비하하거나, 그렇지 못한 나를 억누를 이유는 없다.
나는 나답게 나 자신의 장점을 살리고,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창의적인 길을 당당하게 홀로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를 보라. 자연에서야 어디 더 놓고 나쁜 것이 있는가.
소나무가 더 좋고 참나무가 더 나쁘다거나, 바다는 좋고 산은 나쁘다거나, 겨울은 좋고 여름은
나쁘다거나 하는 분별이 없다.
소나무가 참나무처럼 넓은 잎을 피우려고 애쓴다거나, 바다가 산처럼 되려고 애쓰거나, 겨울이
여름처럼 따뜻해지려고 한다면 그건 자연의 조화를 깨는 일이고 자기 자신다운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일 뿐이다.
어떤 것이 좋고 나쁘다고 나누는 것은 사람의 머리에서, 생각에서, 분별에서 나온 것일 뿐이지,
본래는 모든 것이 저마다의 모습으로써 완전한 것이다.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작은 풀꽃은 풀꽃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저마다의 모습으로써
피어올랐을 때만이 온 우주의 조화로움은 활짝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의 모든 것들은 저마다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독자적으로 피어남으로써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사람도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답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신으로써 드러난 진리를
꽃피워내는 일이다. 사람도 자연이며 우주의 조화로운 운행의 한 축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다운 모습으로 피어날 때 비로소 우주와 나 사이에 긴밀하고 조화로운
진리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안에 전우주적인 진리의 소식을 담고 있다.
‘나’라는 이 몸과 마음은 바로 그 본연의 진리가 나로써 활짝 피어난 모습이다.
그렇듯 진리는 저마다의 모습으로 피어난다.
그 본질은 하나일지라도 피어나는 모습은 다 제각각이다.
그렇기에 법계에서 보았을 때 우리 모두의 저마다의 소명은 자신으로써 피어나는 그 진리의
성품을 고스란히 이 세상에 꽃피우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버리고 ‘누구처럼’ 살려고 하고, 지금의 나를 버리고 미래의 또 다른
어떤 나를 꿈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나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하는 것은 겨울이 여름처럼 되고자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야생화가 나무가 되겠다는 것과, 바다가 산이 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지금 이대로의 모습, 이것이 '나'인 것이지 다르게 변한 이후의 모습은 '나'가 아니다.
법계의 인연 법칙은 그대로 작은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바로 그 모습만을 만들어 줄 뿐이다.
그러니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 그대로 정확한 나의 모습이지 또 다른 모습에서 나를 찾아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지금 이 모습 그대로의 나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공부 못하는 나, 운동 못하는 나, 능력 없는 나, 얼굴이 못생긴 나, 늘상 못 한다 안 된다하고 살아
봐야 천상 그것도 다 나의 모습 일 뿐, 지금 이 모습 그대로가 정확히 내 모습이 맞고, 지금의
이 상황 그대로가 나에게 주어진 정확한 내 삶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니 자꾸만 더 좋은 것, 더 잘난 것, 더 많은 것 바랄 것 없이 지금 이 모습 그대로에 스스로
만족하며 지금 이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얼마전까지 TV에서도 신문에서도 서점엘 가도 전신화상을 입고도 아름답게 살고 있는
이지선의 이야기가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었다.
'저는 지금 이 모습이라도 행복하고 기쁩니다. 지금 이 모습의 저도 지선이고 예전의
지선이도 저니까요.'이는 비단 지선이만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그 모습이 어떤 것이든 간에, 지금 이대로의 모습, 이것이 '나'인 것이지 다르게 변한
이후의 모습은 '나'가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나 자신이야말로 진리에서, 법계에서, 신께서 내려주신 정확한 나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법계의 인연 법칙은 그대로 작은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바로 그 모습만을 만들어 줄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대로의 나다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나 자신으로써 나답게 내 길을 걷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진리의 길이 있다. 내게도 나의 길이 있다.
나답게 사는 것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진리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나에게 집착하라거나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라는 말은 아니다.
온전히 나 자신의 모습을, 내 능력이며 외모 성격 재능 학력 등 이 모든 조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나를 이루고 있는 그 밖의 모든 조건이며 인연들에 대해서 어느 하나 미워하거나
싫어하거나 다른 사람의 것들과 비교하여 열등하다
혹은 우등하다고 느낄 것도 없다.
보통 사람들은 이대로의 나 가운데서 좋고 싫은 부분을 나누어 놓고서는 좋은 부분에 대해서는
나 잘난 줄 아는 우월감으로 키워가고, 싫은 부분에 대해서는 못났다는 열등감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모르긴 해도 지금 이대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전부 인정하면서 이 모습 자체로서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사람이 있을까?
잘 없을 것 같다. 우린 누구나 보다 잘나고 싶어 하고, 보다 우월하길 바라고, 보다 더 좋은 것을
끊임없이 바라며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나 자신’에 대해서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못하고, 항상 남과 비교하여
남보다 더 잘나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입을 하곤 하는 것이다.
삶의 목적을 ‘누구처럼 되는 것’에 두지 말고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에 두라.
누구처럼 되고자 한다고 했을 때는 이미 지금의 나는 부족한 상태, 불만의 상태가 되고 말지만,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자 하면 이미 지금 이 순간 완전한 평화가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자꾸만 남처럼 되려고 애쓰지 말고 '나 자신'이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
물론 나 자신이 되는 일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나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나 자신의 모든 부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받아들여 줄 수 있으면 된다.
어느 하나 바꾸지 않고서도, 내일 더 나아질 것을 기약하지도 말고, 누구누구처럼 변하고 난 뒤를
상상할 것도 없이 오직 지금 이 순간 이대로의 모습 자체로써 내적인 충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이대로의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그렇게 찾아오던
'바로 그 순간'임을 알아야 한다.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중에서
출처 :목탁소리(http://www.moktaksori.org) 원문보기▶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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