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해동사문 원효 술(海東沙門 元曉 述)
<마음을 내어 수행함을 가르침>
초심(初心)은 보리심을 처음 가진 사람이요, 발심(發心) 수행이란 뜻은 부처 될 마음을 일으켜
행을 닦는다는 것으로, 중생들이 어리석은 마음으로 저지르는 죄업의 생활을 떨쳐 버리고
거룩한 부처가 될 마음을 일으켜 그 행을 닦음을 말한다.
발심을 한 다음에는 닦아나가야 한다.
발심을 떠난 수행이나 수행을 떠난 발심은 조각공부요, 죽은 수도라 하겠다.
알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지혜를 불교에서는 마른 지혜라는 뜻으로 건혜(乾慧)라 한다.
마른 싹은 싹이 바를 수가 없고 이런 싹은 바르게 커나갈 수 없는 것처럼, 커나가지 못하는 싹은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마른 지혜는 곧 지식(知)일뿐 소용이 없고 알면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한다.
발심수행장의 내용은 三대문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은 서론 격으로 애욕을 버리고 고행을 하라는 내용으로 인생의 고해가 어째서 비롯되었으며
이 모든 인생문제를 해탈하는 성인은 어떻게 해서 성취되는 것인가를 밝혔다.
요컨대 명리와 애욕을 버리라 했다.
둘째는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출가해서 수행하는 일에 대한 글이다.
세속 사에 대한 집착을 끊고 계행을 철저히 지키고 조사가 되고 부처가 될 목표를 세워서
정진해야 하며 출가인으로 명예와 재물을 탐하는 것을 힐책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끝으로는 덧없는 세월이 신속함을 들어 부지런히 발심수행하라 한 것이다.
○ 저자 원효대사 (元曉大師)
원효대사의 속성은 설(薛)씨요,
생존년대는 617∼686년으로 신라 통일전인 진평왕부터 통일 신라후인 신문왕까지 六대의
임금을 겪으셨으며 삼국의 통일과 당시 당나라의 세력을 신라로부터 축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므로 불교사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서도 유명한 분이다.
어머님께서 만삭이 되어 친정으로 출산을 하러 가시다 길가의 밤나무 밑에서 밤나무를 잡고
원효스님을 낳으셨다. 15세를 전후하여 출가하시어 당시에 경을 중심으로 하여 궁구하는 풍조라
여러 경을 종합하여 대성하셨으며 또 특별한 스승에게 배운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참구하여 깨치셨다.
의상스님과 중국에 유학을 가다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친 뒤 "일체유심조"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신 역사상 유래없는 대저술가이시다.
저서가 몇 권이라는 정확한 수는 지금 남은 것으로는 알수 없으나 지금까지 찾아진 책이 270여권이나
되며 앞으로 더 발견될 소지가 많으며 일본·중국 등에도 많이 전해져 있다.
[본문번역(本文飜譯)]
무릇 모든 부처님이 적멸궁에 장엄하심은 많은 겁 바다에서 욕심을 버리고 고행한 탓이요,
중생들이 불집 속을 넘나듦은 한량없는 세상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한 때문이다.
[뜻풀이]
무릇 모든 부처님이 번뇌 없는 적멸의 궁궐을 장엄하게 꾸미게 된 것은 여러 겁을 두고 욕심을
버리고 고행했기 때문이며, 중생들이 불타는 집에 돌고 도는 것은 한량없는 세상 속의 탐욕을
버리지 못한 때문이다.
[해설(解說)]
佛은 범어(梵語) Budda의 음역이며 뜻은 각(覺)이라 번역한다.
각이라 하는 것은 우주와 인생의 근본인 곧 마음(本覺)이며, 이 마음을 깨달아서 몸뚱이와 물질이
내가 아니라 자성이 참나임을 알아 모든 미망(迷妄)을 여의고 자기 스스로 법(모든 것)의
진리를 깨달았음(始覺)을 말한다.
따라서 각(本覺)은 곧 佛이요, 이를 깨달으면(始覺) 곧 각인 즉 부처님이 되는(성불) 것이다.
적멸궁은 부처님의 깨달은 해탈의 경계를 말한다.
범어의 열반을 옮긴 말로, 불교의 한 이상으로 모든 번뇌와 망상 즉 마음의 동요가 없어지고
맑은 거울, 잔잔한 물과 같이 담담하고 고요한 상태를 말한다.
모든 괴로움의 원천은 각기 분에 넘치고 이치에 어긋나는 욕심 때문에 자기 마음의 평정(고요함: 定)을
얻지 못하므로, 욕심이 없게 되면 마음의 평정이 오고 마음이 평정해 지면 설사 죽음이
닥쳐온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이 편안하게 된다.
중국의 고승인 조법사(肇法師)라는 스님께서 참수의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오히려
『사대(四大)가 본시 비었고, 오온이 본시 임자가 없는 것이니, 이 목을 칼에 대이나,
오히려 봄바람을 베이는 듯하다』라고 하였는데 이처럼 죽음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담담하고
고요한데, 하물며 그 밖의 세상 모든 일에 어떠한 번민이며 고통스러움이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곧 해탈함을 얻은 것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께서 하루아침에 성불하시게 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두고 모든 욕심을
버리고 수행하신 까닭에 이뤄진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욕(欲)은 욕심, 욕망으로, 대표적인 것 다섯 가지를 오욕(五欲)이라 하여 나눈다.
재욕(財欲), 색욕(色欲), 식욕(食欲), 명리욕(名利欲), 수면욕(睡眠欲)이 그것이다.
이 오욕(五欲)은 중생의 본능으로 인해 슬퍼도 하고 괴로워도 하며 애를 태우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은 간탐과 오욕을 버리고 육바라밀(六姿羅密)인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知慧)를 닦으셨다.
여기서 고행(苦行)이란 인간으로서 본능의 욕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어 내기 어려운
고통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니 그것을 능히 참고 감행한다는 뜻에서 고행이라 하는 것이다.
중생들이 화택문에 윤회한다하는 것은 중생들이 한없는 세세생생을 두고 탐욕, 즉, 오욕의 본능에만
탐하여 헤매느라 무서운 생사고(生死苦)를 벗어남을 모름에 비유한 말이다.
법화경 신해품에 큰 부자집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데 그 집 속에는 철모르는 아이들이 닥쳐오는
위험도 모르고 놀이에만 골몰해 있었다.
밖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아이들을 부르며 나오라고 소리쳐도 들은 체도 하지 않으므로
그 아버지가 꾀를 하나 내었다.
즉 아이들이 평소에 즐겨 타는 수레 등이 문밖에 있으니 어서 나와 마음대로 고르라 하니 그제야
밖으로 나와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모면했다 한다.
그러나 문밖에는 그러한 수레들은 있지 않고 대신 큰 흰 소가 이끄는 수레가 있어 그 수레에
모두 타게 하여 저쪽으로 인도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불타는 집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고통과 번뇌의 이 세상이며 그 속에서 장난에 골몰한
아이들은 오욕낙에 탐착하여 사는 우리 중생이며 문밖에 양수래, 소수레가 있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설하여 가르친 교법인 방편 법문으로 최후의 큰 백우차는 마침내는 일승(一乘)인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저쪽세계 적멸보궁은 깨달음의 세계인 것이며 수레는 불교 아버지는
부처님에 비유한 것으로 삼승은 한 방편이고 오직 대승인 일승만이 진실 된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막힘 없는 저 천당에 가는 사람이 적은 것은 삼독의 번뇌로 자기 집 보물을 삼기 때문이요,
꾀임 없는 저 악도에 가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사(四蛇)와 오욕(五欲)으로 망령되게 보배를 삼는 까닭이다.
[뜻풀이]
막는 사람도 없는 하늘 나라에 가는 이가 적은 것은 세가지 독(탐, 진, 치)의 번뇌로 자기 집의 재산을 삼음이요,
꾀어내는 사람도 없는데 악도에 들어가는 이가 많은 것은 네가지 뱀(지, 수, 화, 풍)과 다섯 가지
욕심(五欲: 재, 명예, 색, 식, 수면욕)으로 망령된 마음의 보배를 삼기 때문이다.
[해설(解說)]
삼독은 탐진치, 곧 애욕(愛欲)·진에(嗔 )·우치(愚痴)를 말하며, 사사(四蛇)는 중생들이
몸뚱이를 애착하여 온갖 죄악(罪惡)이 되는바, 이 몸뚱이를 이루고 있는 요소가 네가지이므로
이것을 뱀이라고 나쁘게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즉 몸은 지, 수, 화, 풍(地·水·火·風)의 四大로 이루어졌는데 부처님께서 이 몸은 四마리(四大)의
독사 뱀을 한 상자 속에 넣고 기르는 것과 같다고 하신 말씀에서 연유되어 나온 말이다.
악도는 우리 중생들이 돌아 다니는 길이 크게 여섯 가지가 있는데 천도(天道), 인도(人道), 아수라(阿修羅)의
세 갈래 길은 비교적 좋은 길이고,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의 세 갈래 길은 악하고 좋지
못한 길이므로 악도라고 이름한다.
다시 말하면 천당은 복 받은 곳으로 오는 사람을 굳이 막는 것도 아닌데 가는 사람이 적은 것은 삼독번뇌를
마치 자기의 재산처럼 살피고 다스림으로서 이고, 그렇다고 지옥에서는 어서 오라고 유혹하는
것도 아닌데 꾸역꾸역 미어지도록 가는 것은 역시 사사와 오욕을 자기의 보배를 아끼듯이
집착한 때문인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누군들 산에 가서 도 닦고자 않으리오만 다만 하지 못하는 것은 애욕 속에 얽매임이요, 고요한 산에
들어가서 용맹수도 못하여도 힘과 형편 닿는 대로 모든 선행(함을 버리지 말라) 지어가라.
[뜻풀이]
수도하는 목표는 생사의 속박을 벗어나 절대의 해탈을 성취하는데 있는 것이니 만큼 누구나
이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애욕에 얽매여 실행에 옮기지 못할 따름이다.
그러나 세속에 몸을 담고서라도 그 형편과 능력을 따라 열 가지 착한 일을 비롯하여 독경, 참선에
이르기까지 불법을 배우는 마음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해설(解說)]
사람이란 누구나 할 수만 있다면 승이 되어 산에 깊이 들어가 도를 닦아 참 나를 찾고 삶의 보람을 갖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저마다 그렇지 못한 것은 다 부모나 처자,
그리고 명예, 지위 등 모든 애욕의 십악에 얽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모두 세상 일을 버리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 도를 닦는 것만으로 능사를 삼는 따위는
결국 인간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니 그것만이 불교의 옳은 길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의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면서도 자기의 힘에 따라 닦으면 되는 것이다.
즉 불법이 산중에 있고 출가인만이 도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선행 정진으로서 자기도
행복하고 사회도 안락할 수 있다면 굳이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산에 들어가 수도만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도가 산 속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본문번역(本文飜譯)]
세상 (스스로)쾌락 버린다면 성인처럼 공경 받고,어려운 일 능히 하면 불타처럼 존중되며,
재물만을 간탐하면 마귀 집안 권속이요,자비로 보시하면 법왕성의 아들일세.
[뜻풀이]
누구에게나 출가 구도에 대한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으므로 향락을 버리고 애정을
끊는 이를 보면 자연 성인처럼 공경하는 마음을 내게 되고, 중생을 위해 하기 어려운 고행을 하고
봉사하는 사람에게는 부처님에게나 다름없이 귀의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인색하고 간탐하여 일가 친척, 이웃이 주려 쓰러지는 것을 보고도 구해줄 줄 모를 뿐 아니라 나아가
남을 희생시키고 자기 욕심만 채우는 것은 곧 마귀요, 어려운 이를 돕고 자비로 구해 주는 사람은
부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해설(解說)]
탁발을 하고 승복을 입고 승체를 들어 내는 것보다 정진과 수행이 절대 필요하며 동시에 인행으로
자제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도덕이 뛰어난 것도 자제의 힘이 강한 때문이고 사물의 이치에 정통할 수 있는 지혜도 삿된
마음이 없는데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기의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이라도 남을 위해 자제할 수 있다면 그로 인하여 남들이
나를 믿고 공경함이 성인 같이 하고 또한 이러한 자제력으로 말미암아 보통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면 부처님같이 존중함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의 자세 중에서 가장 비굴하고 근본적인 문제점이 간탐이다.
인색하다는 것은 소극적이고 탐한다는 것은 적극적인 것으로 모두 다 물욕을 말하는 것이다.
물욕만 떨어지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자기 중심적 집착과 만심을 떠나지 못하고 오직 세상의 명예와 이익이나 존경만을 간탐하게 되면
그는 악마의 권속이 되고 반대로 자비심으로 모든 것을 베풀면 법왕의 아들이 된다.
보시에는 三가지가 있어 재물을 남에게 주는 재시(財施)와 불법을 남에게 가르쳐줌으로서 마음의 광명을
베푸는 것은 법시(法施)며 어려움을 당하여 공포에 떠는 이에게 두려움이 없게 해주는 무외시(無畏施)이다.
또 자비(慈悲)는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자(慈)요,
남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이 비(悲)다.
그러므로 자비의 보시란 이웃, 동포, 인류를 위해 나의 모든 것, 재산, 명예, 권세, 육신까지라도 아무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이 참불자인 보살의 보시 행이다.
법왕자(法王子)라 함은 법왕의 아들이며 제자라는 뜻이다.
부처님은 진리의 왕이시고 마음을 깨닫고 일체의 진리를 깨달아 일체종지(一切種智)·깨달음과 행이
원만한 이(覺行窮滿)·지혜와 복덕이 구족하신 어른(福慧兩足)이므로 일체 진리의 왕이시며
하느님 가운데 하느님이시고 성인 중의 성인이시고 부처는 모든 것의 주인이므로 법왕이라고 하는 것이다.
[본문번역(본문번역)]
높은 산 험한 바위는 슬기 있는 사람의 살 곳이요, 푸른 솔 깊은 골짜기는 수행자가 깃들일 곳이니라.
주리면 나무열매로 주린 창자를 달래고 목마르면 흐르는 물을 마셔 갈증을 풀지니라.
[뜻풀이]
높은 산 바위 밑은 지혜로운 사람이 살 곳이요, 푸른 솔 나무 있는 깊은 산골이야말로 수행하는 이가
깃들일 만한 곳이라(세속 인연에 초연하여 집착을 떨어뜨린 삶) 배가 고프면 나무 열매를 먹고
주린 창자를 위로해 줄 것이며 목마를 때면 흐르는 냇물을 마시어 타는 마음을 쉬게 하라
(의식주에 탐착 하지 않는 삶)
[해설(解說)]
번뇌 망상을 쉬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객관 세계의 자극 인연을 정리해야하므로 깊은 산 속의
맑은 공기 속에서 마음을 가라 앉혀야 할 것이니 우뚝 솟은 바위로 집을 삼고 끝없는 창공을
자재로이 오고가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와 자적의정(自適之情)을 기리고
푸른 솔 우거진 깊은 골짜기 세상사람들이 닿지 않는 곳에서 오직 송풍나월(松風蘿月)과 더불어
벗을 삼아 무아자재의 행을 쌓으면서 주리면 나무 열매를 따먹고 목마르면 흐르는 물을 움켜 마시면서
욕심없이 걸림 없는 생활을 함이 보람 있는 수행의 길이라 하는 것이니 욕심을 버리면 삼천대천
세계가 모두 내 집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잘 먹이어 길러 보아도 (이 몸은) 끝내는 무너지고,비단으로 보호해도 이 목숨 끝이 있네,
울리는 바위굴로 염불 법당 도량 삼고, 슬피 우는 새소리로 즐거운 벗 짝 하여라.
[뜻풀이]
아무리 고량진미와 능라주단으로 이 몸을 아끼고 사랑한다 하더라도 장생불사하지 못하는 몸이므로
마침내 죽어 없어지고 말 헛된 거짓 존재일 뿐이니, 메아리 울리는 바위굴로 염불당을 삼아
수도하고 새소리로 마음을 기쁘게 하는 벗을 삼으라
(덧없는 육신의 종이 되는 욕심 없이 수행하라는 뜻)
[해설(解說)]
모든 괴로움이 근원인 이 몸뚱이의 무상함을 깊이 깨닫고 이 몸과 물질의 집착을 끊고 현상계의
모든 것을 다 헛것(空)으로 보며 오직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마음 법을 깨우치고자 수행하는
불자로서는 육체로 인한 모든 난관을 오직 정신력으로 이겨 나갈 굳은 결의가 필요하다.
배부르고 편안하게 하여 몸뚱이에 얽매인 이로서 큰 도를 성취했다 하는 이가 일찍이 없었으니
이는 육체의 노예가 되면 온갖 좋지 못한 본능이 치성(熾盛)하게 되므로 이것이 본래 마음을 가리어
그 마음바탕이 들어 날 수 없고 지혜 성품이 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메아리 울리는 동굴에 슬피 우는 새로 마음의 벗을 삼는다는 말은 영세적이고 은둔적인 태도를 취하라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자연속에서 있는 그대로를 벗삼아 소요자재 하여 욕심과 집착을 벗어난
걸림 없는 생활을 뜻하는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절하는 무릎이 얼음 같아도 불(火)을 생각지 않으며 주려서 창자가 끊어질 것 같더라도 밥을
구하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백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나 되는데 닦지 않고 놀기만 하겠느냐.
[뜻풀이]
절하는 무릎이 추워서 얼어 붙더라도 따뜻한 불(火) 생각을 마음에 두지 않고 굶어 주린 창자가
끊어질듯 고파 오더라도 먹을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일념으로 정진해야 하는 것이다.
문득(한순간에) 백년이 다가오는데 어찌 배우지 않으며 일생이 얼마나 되기에 닦지
아니하고 안일하게 있겠는가?
[해설(解說)]
메아리 울리는 동굴로 염불 당을 삼는다는 대목부터 이것은 불교의 수행하는 태도와 굳은 각오에
대하여 쓴 글이다.
수행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염불과 예불을 밝혀 놓았다.
염불에는 四가지가 있으니 부처님의 명호를 입으로 부르는 칭명염불(稱名念佛),
부처님의 상호를 마음에 생각하는 관상염불(觀像念佛),
부처님의 미묘한 모습을 관찰 상념 하는 관상염불(觀想念佛),
마음의 진실·자성인 그 진리 즉 법신을 관하는 실상염불(염불선)이 있으나 이 모두가 자성에
귀의하는 것이어야 한다.
부처님께 절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시리더라도 불을 생각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는 것은 얼핏 들으면
무리하게 들릴지 모르나 무슨 일을 하든 전심전력 할 때는 모든 것을 잊어 버리고 삼매에
들게 되는 법인 것이다.
춥고 배고픈 것을 억지로 참으라 해서는 참을 수도 없거니와 또 보람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을 섬기고 마음을 닦는 간절함으로 인해 저절로 춥고, 배고픔을 잊어버리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중새의 삶인 세월이 덧없어 인생이 무상함을 깨달아 방일하여 나태하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마음 속에 애욕을 떠난 이를 사문이라 하고 세상사 그리워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 한다.
수행하는 이가 비단 옷을 입는 것은 개가 코끼리 가죽을 쓴 격이고 도를 닦는 사람이 애정을 품는 것은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간 것과 같다.
[뜻풀이]
착한 법을 닦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애욕에 집착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또 출가란 세속의 번뇌를 떠나 불법을 닦고자 하는 것이니 세상사에 집착하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행자란 불법을 수행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이니 이러한 행자가 몸에 비단을 걸쳐 사치스러운
생활을 탐하는 것은 마치 개에게 코끼리 가죽을 씌운듯 격에 걸맞지 않으며 수행에 이롭지
못하다는 말이고 여기서 도인이란 수도(도를 닦음)하는 분으로 세속적 생활을 그리워한다면 마치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간 듯 해서 길을 잘못 들었다 하는 것이다.
[해설(解說)]
사문(沙門)이란 범어인데 대체로 착한 법을 부지런히 닦고 모든 악법을 쉰다는 뜻으로 출가자(出家者)를
총칭하는 말이다.
입서궁(入鼠宮)은 고슴도치는 몸에 바늘 같은 가시 털이 있어서 쥐구멍에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오기는 어렵다고 하는 뜻이며 따라서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잘못 들어가서 낭패
당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도인(도를 닦은 이)으로서 세속적인 탐애를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은 비단 이성에 대한
애정뿐 만 아니라 부모, 친척, 친구, 물질, 명예에 대한 세속적인 정욕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으면 공부가 안 된다 하는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비록 재주와 슬기가 있다고 하나 마을의 집에 사는 사람은 모든 부처님이 이 사람에게 슬퍼하고 근심하는
마음이 있으나, 설사 도와 행이 없다하더라도 산에 머무는(출가)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 성현들이
이 사람에게 환희심을 내느니라.
[뜻풀이]
아무리 재주와 슬기를 갖고 있어도 세속에 있어 세속 삶에 집착하게 되면 이 사람에 대해 모든
부처님이 슬퍼하고 근심하는 마음을 갖게 되며 산 속이란 조촐하여 욕심을 적게 하고 마음을
맑게 한다는 뜻으로 집착이 없이 조촐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잘못될 일이 적으므로
성현이 이에 안심한다는 뜻이다.
[해설(解說)]
세속 일에 집착하면 환락의 무덤으로 아무리 재주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타락하기 쉽고,
사람들이 수도하는 마음과 그러한 곳은 듣고, 보고, 깨닫는 것이 없어 설사 재주가 없는 자라할
지라도 조촐(맑고 깨끗)하므로 선근과 복덕을 증장시킬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재주와 지혜를 갖고서도 속세에 집착하면 그를 슬퍼하고 걱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환경을
중요시한 말이니, 수행이 쌓이고 자기의 주견이 완전히 선 사람은 마치 연꽃이 더러운 흙탕물에서
났지만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것과 같아서 문제가 되지 않으나 그렇지 못한 초심자로서는
무엇보다 환경의 선택이 필요한 것이다.
나이 어린 청소년에게 술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극장을 출입하는 것을 금하는 까닭은 술, 담배,
극장 그 자체가 죄악이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가져오는 유혹을 능히 이겨낼 의지가
없기 때문인 것과 같이 이 글의 뜻은 세속의 일반 생활 전체가 죄악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세속 일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여서 하는 말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비록 재주와 학문이 있다 해도 계행이 없는 사람은 마치 보배 있는 곳으로 인도하고자 하되 일어나
가지 않는 것과 같으며 비록 부지런히 행함은 있다해도 지혜가 없는 사람은 마치 동쪽으로 향해
가고자 하여도 서쪽으로 향해 가려함과 같으니라.
[뜻풀이]
재주가 있고 배움이 많다 해도 그것을 알기만 할 뿐 지키고 행함이 없으면 보물 있는 곳을 알아도
가지 않는 것과 같이 소용이 없으며, 행함은 있으나 지혜가 없게 되면 동쪽으로 자신이 가려고 하나
서쪽으로 가게 되는 것처럼 자신이 밝지 못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므로, 지혜를 부지런히 닦는
한편 그것을 실행하여야 한다하는 것이다.
[해설(解說)]
배움은 있으나 실행이 없으면 눈 뜬 앉은뱅이요,
행은 있으나 지혜가 없으면 다리 성한 장님과 같아서 다 같은 불구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앎은 눈이요(智目), 행함은 발(行足)이라 하여 지와 행을 가장 중요시하고
또한 이 둘은 반드시 병행을 요하는 것이다.
화엄경에 문수(文殊)는 지(智)를, 보현(普賢)은 행을 대표한 것도 모두 이러한 까닭인 것이다.
특히 요즈음 불교인에게는 따끔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상당한 경학(교법)을 알면서도 행이 없는 사람과 또 행은 하는 척 하는데 진리를 깨우친바 선지가
없는 이들이 있으니 이는 모두 불구자요, 온전한 수도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지혜 있는 사람이 행하는 것은 마치 쌀을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으나 지혜 없는 사람이 행하는
것은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
사람마다 밥을 먹어 주린 창자를 위로할 줄은 알면서도 불법을 배워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은
모르느니라, 행과 지혜가 함께 갖추어지면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저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므로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으니라.
[뜻풀이]
지혜 있는 사람이 행하는 바는 쌀을 쪄서 밥을 짓는 것이며 지혜가 없는 사람의 행함은 모래를 쪄서
밥을 만들려 함과 같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려 하면서도 불법을 배워서 어리석은 마음을 고쳐야 하는 것은 알지
못하니, 부지런히 불법을 닦아 실행과 지혜를 함께 갖추면 차에 두 바퀴와 같이 안전하고
자기도 해탈하고 중생도 교화하는 自利와 利他는 새에게 양쪽 날개가 있는 것과 같다하는 뜻이다.
[해설(解說)]
지혜가 없는 우둔한 이는 바로 모래를 쪄서 밥을 짓고자 함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종종 세상사람들은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한다.
그러므로 행과 지혜가 갖추어지는 것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으로 새의 두 날개와 같다 한 것이다.
한쪽의 수레바퀴 한쪽의 날개 만으로는 도저히 바로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와 행은 다함께 갖추어져야 하지만 그 순서로 보아 가는 것(行) 보다 아는 것(智)이 앞서야 할 것이다.
갈 곳을 똑똑히 안 연후에 걷는 것이 순서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도 믿고(信), 알고(解), 행하고(行), 얻는(證), 네 가지를 차례로 말씀하신 것이다.
불교의 자리(自利)는 스스로 번뇌를 끊고 해탈하는 것이요,이타(利他)는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다.
그런데 먼저 내가 해탈하고 볼일이라고 자리(自利)에 치중하는 것은 소승이요,
남을 구제하는 것이 곧 진정한 자기 해탈이니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이타(利他)를 발원하는 것이 대승이다.
자기해탈이 없이 어떻게 남을 구제하겠는가?
그러므로 먼저 도를 이루어야 하며 그러한 수행 과정에도 남을 돕고 구제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불교의 근본정신으로서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남의 이익을 곧 자기 이익으로 여기는 것이
대승불교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타(利他)를 무시한 자리(自利)만은 생각할 수 없으나 이타에는 자연히 자리가
따라야 하기 마련이다.
세계인이 살수 있으면 나도 살지만 나만 살려하면 나도 세계인도 살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자리와 이타를 겸하게 되면 마치 새의 두 날개가 있는 듯 자유자재로운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죽을 얻어 먹고 축원(염불독경)하되 그 뜻을 알지 못하면 시주한 이에게 부끄럽지 않으며,
밥을 얻어 먹고 염불 범패의 이치를 모른다면 또한 불 보살께 부끄럽지 아니하랴,
사람들이 꼬리 달린 벌레를 더럽게 여기듯 성현들은 사문들이 깨끗하고 더러움을 분별하지
못함을 미워하느니라.
[뜻풀이]
시주를 받고 축원을 하면서 그 참 뜻을 모른다면 공양하는 그 정성에 어찌 아니 부끄러우며 공양을
얻어먹고 염불을 하나 깊은 이치를 못 깨치면 성현 님께 또한 죄스럽지 아니한가?
더럽고 깨끗함을 구별하지 못하는 벌레를 사람들이 싫어하듯, 공부하는 사문으로서 더러움과
깨끗함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성현 님들이 미워한다 하는 것이다.
[해설(解說)]
본시 불가에서는 아침에 죽(粥)을 먹고 오후에는 먹지 않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율문에 보면 죽을 먹게 된 동기로서 난타(難陀)의 어머니가 밥을 짓는데 밥은 비구니에게 드리고
자기는 밥을 푼 뒤의 솥에 물을 부어 눌은밥을 먹었는데 그것이 맛도 있고 먹기도 좋고
소화도 잘 되는지라 다음에는 죽을 쑤어 세존께 드렸더니 잡수시고 매우 좋다고 칭찬하신 뒤에
죽의 열 가지 이로움을 들어 비구니들에게 먹기를 명하셨다고 하는데
그 열 가지 이익이란
① 얼굴 빛이 좋아 지고 ② 기력이 더하고 ③ 수명이 더하고
④ 안락하고 ⑤ 변설(辨說)이 걸림이 없고 ⑥ 풍기(風氣)를 없애고
⑦ 소화가 잘되고 ⑧ 말소리가 맑고 ⑨ 요기(饒飢)가 되고
⑩ 해갈이 된다는 등이 그것이다.
지금도 선가에서는 오후 불식은 안 해도 흔히 아침에 죽을 먹는데 이는 소화가 잘 되고 정신이
맑게 되고 또 경제적인 것이 중요 원인이다.
식사 뿐 아니라 일체의 공양 시주를 축 내는 자로서 공부가 투철하지 못했으면
『그 얼마나 수치스러우며 죄책(罪責)스러운 일이냐?
아무쪼록 용맹 분투하여 마음을 활짝 밝히라』는 뜻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면서 시주한 이에게 부끄러워하고 성현들께 두려워하며
죄시러 할 줄도 모른다면 그리고 막행 막식으로 계를 지킬 줄도 모르게 된다면 성현이
이런 사람을 마치 인간이 구더기 같은 벌레가 더러운 것을 분별할 줄 모르는 것을 보기 싫어하듯이
미워하신다고 하는 것이다.
계에 3가지가 있으니
① 옳지 않는 일을 일체하지 않음을 섭율의계
② 모든 착한 일을 다함을 섭선의계
③ 모든 중생을 유익케 하는 섭중생계가 있다.
[본문번역(本文飜譯)]
세상 소란 저버리고 하늘 세상 가는데는 계 지키는 사다리가 가장 좋은 방편이요,
그러므로 계 지킴을 저버리고 남의 복전 되려함은 날개 상한 병든 새가 거북 업고 날음 같네,
자기 죄를 못 벗으면 남의 죄도 못 풀거니,그러므로 계 지키는 수행 없이 남의 공급 어이 받나.
[뜻풀이]
세간의 어지러움을 버리고 허공을 타고 하늘나라에 오르는 데는 계행이 좋은 사다리가 된다.
그러므로 계행을 깨뜨리고 남의 복밭이 되려는 것은 마치 날개 부러진 새가 거북을 업고 하늘을 오르려 함과 같다.
제 허물도 벗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남의 죄를 풀어 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지계로써 수행을 하지 않고서는 남의 시주를 받아서는 안 된다 하는 것이다 라는 뜻이다.
[해설(解說)]
마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
마음속에 악한 일을 생각하면 그 말과 행동도 또한 그러하여 그 때문에 괴로움을 받게 되고 마음속에
착한 일을 생각하면 그 말과 행동도 또한 그리하여 그 때문에 즐거움이 따라온다.
즐겁고 괴로운 것은 같지 않지만 그것을 일으키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
어리석음을 다스리는데는 지혜보다 나은 게 없고 분노한 마음을 다스리는 더 좋은 약이 따로 없다.
계의 물은 악의 때를 씻고 복밭에 부처님의 종자를 심어 준다.
복밭이라 하면 세인들은 잘 먹고 잘 입은 부귀권세를 누리면서 잘 사는 것만을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참다운 행복을 가져다주는 절대적 복은 되지 못한다.
우바새 경에 三복전을 말씀하셨는데
①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을 섬기면 그 은혜를 갚음이 될 뿐 아니라 따라서 복을 얻게 되는 보은복전과
② 삼보(불·법·승)를 공경·공양하면 비단 무량한 공덕이 생할 뿐 아니라 또 한 복을 얻게 되는 공덕복전과
③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심으로 베풀면 자연히 복을 얻게 되는 빈궁복전이 그것이고
범망경에는 八복전을 설했으니
① 부처님을 섬기고 ② 성인을 섬기고 ③ 스님을 공경하며 ④ 화상(덕이 높은 수계사 스님)을 공경하고
⑤ 아자리야 - (제자의 행위를 바로 잡고 그의 사범이 되는 고승)를 공경하는 아자리전
⑥ 아버지를 효순봉양 하는 부전 ⑦ 어머니를 효순봉양 하는 모전 ⑧ 병든 사람에게 약을 주어
구호해주는 병전 등이 그것이니 이러한 행위들이 다 복을 낳는다 해서 복전이라 한다.
계는 천당에 오르는 좋은 사닥다리가 된다.
그러므로 계를 파하고 남의 복밭이 되려 함은 날개 부러진 새가 거북이를 업고 하늘에 오르려 하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
제 몸도 구하지 못한 주제에 어떻게 남까지 구하겠느냐는 말이다.
내 허물을 벗지 못하면 남의 죄도 풀어 줄 수 없으니 계행을 청정히 닦아 남의 복밭이 될 만 하거든
공양을 받으라 하는 뜻이다.
그러므로 계는 수행(정혜쌍수)의 근본바탕이 되는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수행 없는 헛된 몸은 길러 봐도 이익 없고 덧없는 뜬 목숨은 아껴 봐도 소용없네,
용상의 덕 바라거든 모든 고통 길이 참고 사자 의자 바라거든 탐욕 쾌락 져 버려라,
행자 마음 깨끗하면 모든 하늘 칭찬하고,도인이 색(모든 것)을 연모하면 선신들이 떠나가네.
[뜻풀이]
수행이 없는 빈 몸은 길러야 이익이 없으니 항상 함이 없는 뜬 목숨은 사랑하고 아껴도 보존치 못하리라.
용상(성불)의 덕을 이루기를 바라면 능히 오랜 고통을 참고 수행하고,
사자의 자리인 법상에 올라 법을 설해 중생을 제도함에 앉기를 기원한다면 길이 욕락을 등질지니라,
수행인의 마음이 조촐하면 제천(諸天)이 같이 칭찬하고 도를 구하는 이가 탐욕을 내면 선신(善神)이
버리고 떠난다 하는 뜻이다.
[해설(解說)]
세월이 덧없고 인생은 무상한 것이니 위없는 부처님이 되고자 결심하면 세상의 욕락을 버리고
모든 것을 참아 이기고 닦으라 했다.
사람은 몇 천년이나 영원히 살 듯이 사랑이다 돈이다, 지위다 하여 하루 24시간 1년 365일 편할
날이 없이 악착스럽게 굴지만 결국은 그 욕망을 다 채우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만다.
따지고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그러기에 인생의 참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무상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그 첫 교훈으로 한다.
금강경에는 꿈(夢), 환상(幻), 거품(泡), 그림자(影) 번개(電),이슬(露)의 여섯 가지로 일체 인생의
무상(덧없음)을 비유하였으며 유마경과 능엄경에는 물방울, 거품, 파초(벗겨도 알맹이가 없는 껍질뿐),
그림자, 메아리, 아지랑이, 물에 비친 달, 허수아비, 신기루, 변화되는 것 등등 각기 열 가지씩으로
비유하여 인생의 무상을 말씀하셨다.
용상덕은 덕이 높은 큰스님(깨달은 이: 佛智)을 말하는 것으로 용은 바다의 왕이고 코끼리는 짐승의 왕이다.
용과 코끼리가 모든 축생 가운데 뛰어나듯 모든 사람 가운데 뛰어난 스님 곧 부처님을 용상이라 한다.
사자 좌는 부처님이 앉으시는 좌상, 부처님은 인간 중에 가장 높으신 지위에 있는 분이므로 동물의
왕 사자에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사자후(獅子吼)라 하고 앉으시는 자리를 사자좌라 하며 아무나 앉아 설법할 수
없는 것이니 이렇게 부처님(깨달은 이) 되기 위해서는 괴로움을 참고 욕락을 멀리 하여야 한다 하는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사대의 몸 흩어지고 오래 못 머물며 오늘 벌써 저녁이라, 내일 아침 닥쳐오네,
세간 욕심 뒤 고생을 어찌하여 탐착하며,한번 참는 낙이 긴데 어찌 아니 닦을 손가,
도하는 이 탐을 내면 닦는 이의 큰 창피요, 출가한 이 부자 됨을 군자들이 웃고 보네.
[뜻풀이]
사대가 문득 흩어져서 오래 머무름을 보장할 수 없어 오늘 아침인 듯 벌써 저녁으로 옮겨 가니라.
세상의 즐거움이란 지나고 나면 괴로운 것이거늘 어떻게 탐착만 할 것이며 한번만 참으면 길이
즐거운 것인데 어찌 닦지 않으랴. 도닦는 이가 탐하는 것은 수행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요, 출가해서
부자가 되는 것은 세간에 있는 군자(비록 도를 이루지 못했으나 바른 이)의 웃음거리인 것이다.
[해설(解說)]
현대 과학에서는 인체의 구성을 十八원소로 분리하지만 부처님께서는 地, 水, 火, 風의 크게
四가지로 분리하여 뼈는 地요, 수분은 水요, 체온은 火요, 호흡은 風이라 하여 이 사대(四大)가
잘 조화를 이룰 때는 생명이 유지되지만 그렇지 못하여 숨이 멎어 심장의 고동이 멈출 때면
그 순간 사대는 썩고 각기 분해되기 마련이라고 하셨다.
생각하면 일분 일초 우리가 살아가는 그 자체가 곧 일분 일초 죽어 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능엄경에서 이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에 비유하여 여양인도사 보보추사지
(女羊人屠舍步步趨死地)라 하였다.
이 몸뚱이를 허망한 거짓인 줄 모르고 자기의 참된 생명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생명이란 오래 머묾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일진데 그대로 묵묵히 끌려갈 수는 없는 이상 하물며
생사문제에 맞 부딪혀 판가름을 하겠다는 수행인 이나 도를 닦는 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세속적
향락을 탐착하여서는 말이 아니 된다.
흥이 다하면 슬픔이 오고 낙 뒤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르는 법이니 도를 닦는 이가 탐한다는 것은
수행자로써 부끄러운 일이요, 출가한 사람이 부유한 삶을 바란다는 것은 오히려 세간에 묻혀 사는
자의 웃음거리밖에 안 된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그 행복은 객관적인 물질에 있지 않고 주관적인 마음에 있다.
가령 천 원과 만 원을 가진 두 사람이 있을 경우 객관적으로 볼 때 만원 가진 사람이 천 원 가진
사람보다는 열 배 행복하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천 원 가진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하면 플러스 천 원이요,
만 원가진 사람이 만원을 더 바란다면 마이너스 만원이 되는 것으로 그 마음의 관점에 따라
행복의 가치는 달라지는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막는 말이 많건마는 탐착함을 못 끊으며,이 다음이 한없는데 애착을 못 버리고,
이런 일이 한없거늘 세상일을 못 버리며,꾀하는 일 그지없거늘 끊을 생각 내지 못해,
오늘이 다함 없거늘 날로 악을 많이 짓고,내일이 다함 없거늘 날로 선(善)을 적게 짓고,
금년이 다함 없거늘 번뇌는 한이 없고,오는 해 끝없건만 깨달음에 나아가지 못 하도다.
[뜻풀이]
막는 말이 많건마는 탐착함을 못 끊으며 이 다음이 한이 없는데도 애착을(당장) 버리지 못하네,
이 일(일대사)만 하는 데도 무한한데 세상일을 못 끊으며, 저 많은 꾀함이 끝이 없거늘 끊을 마음 못 내는가,
오늘만 하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날이 다할 날이 없겠거늘,악을 짓고 죄를 행해 날로 더해가며
내일하고 미루는 게 내일내일 다할 날이 없으니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날로 적어지며
금년이란 한해한해 다할 때가 없거늘,번뇌 망상인 생사의 마음 한량없이 계속하고,
내년으로 미루는 마음 그칠줄 몰라, 보리심을 일으켜 정진할 줄 모르도다.
[해설(解說)]
무상은 찰나요, 마음의 번뇌는 끝이 없다.
세월은 물과 같아서 오늘 오늘 속에 인생은 사라져 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오늘도 탐진치를 끊을 마음을 갖지 못한다.
대개 마구니는 『한번만』『남도 하는데』라는 두 가지 말로 우리들을 악으로 유혹한다.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양심은 있는 법이라 처음에는 망설인다.
그럴 때 마구니는 그 사람의 귀에 입을 대고 한번 만 하고 다시는 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속삭인다.
그래서 곧 동조 하지만 그 한번만이 끝이 없다.
또 잘못 저지른 일에 번민을 하면 그 마구니가 이번에는 『남도 다하는 일이다』고 위로해 준다.
그러면 『그렇지 그깟 일로 번민한다면 못난 짓이야』라고 악에 대해 용감해진다.
여기서는 이러한 점들을 들어서 여러 가지로 말씀했다.
막는 말이란 이것만하겠다고 다짐하는 알고 좋은 말이요, 이번만 다음부터는 하고 다짐하지만
그것이 끝이 없다.
옛적 히말라야 산 속에 집이 없이 사는 새가 있었다.
낮에는 따뜻한 볕을 쪼이면서 이 나무 저 가지로 즐겁게 날아다니지만 밤만 되면 집 없이 추위에 떤다.
그래서 날이 새면 집을 지어야지 하고 밤새도록 뇌까리다가 아침이 되어 볕이 나면 그만 밤새
다짐한 결심은 간 곳이 없어지고 다시 또 밤이 되면 똑같은 다짐을 하며 울면서 일생을 살다 죽는다.
중생이 살아가는 것도 꼭 이와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일이란 속세 세간 사요, 저 꾀하는 일이란 출세간 해탈의 길이다.
세상 일은 한이 없는데 버리지 못하고 출세간 일은 갓이 없는데 마음조차 일으키지 않는다.
또 오늘만 하고 내일부터는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해서 해탈해 성불도 하겠다고 하지만
오늘은 날마다 오늘이요, 올해는 해마다 올해인지라 끝이 없다.
보리는 반야지혜인 각(覺)을 말한다.
이 보리는 번뇌를 끊어야 증득하는 중생 각자가 본래 가지고 있는 자기 본성으로부터의 발현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때와 때가 옮기고 옮겨 낮과 밤이 속히 지나가고 날과 날이 옮기고 옮겨 초하루 그믐이 속히
지나가고 다달이 옮겨 문득 해에 이르고 연년이 옮기고 옮겨 잠깐 사이에 죽음의 문턱에 이른다.
부서진 수레는 가지 못하고 늙은 사람은 닦을 수 없다.
누우면 게으름만 생기고 앉으면 생각이 어지러워지니 몇 생을 닦지 않고 헛 세월만 보냈던가,
이 몸이 얼마나 살겠기에 일생을 닦지 않는가,
몸은 반드시 마치고 말 것인데 내 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찌 급하지 아니하며 어찌 급하지 않은가?
[뜻풀이]
시간 시간이 흘러서 낮과 밤이 잠깐 가고 날과 날이 재빨라서 훌쩍 한달 속히 되며 달과 달이 계속하여
문득 일년이 닥쳐 오고 해와 해가 거듭되어 어느새 죽음이 닥쳐온다.
부서진 수레는 움직일 수 없으며 잠깐 사이 늙어지면 수도인들 할 수 있나, 밤낮 없이 드러누워
있으면 게으름만 피우게 되고 힘을 내어 앉아 봐도 어지럽고 정신 없네, 몇몇 생을 닦지 않고
그냥 헛되이 보내어 헛몸 살기 몇 해인데 이 한 생을 닦지 않나 이 몸뚱이 머지 않아 죽을 것이 명백한데
닦지 못한 이 내 몸을 다음 생에 어이할까 생각하면 할수록 급하니 닦아야 한다는 경책이다.
[해설(解說)]
무상은 찰나고 사람의 목숨은 순간에 매여 있다.
공부하는 것도 어물어물 세속일에 집착하다 보면 세월이 지나가고 이미 늦어서 하고 싶어도 되지 않는다.
요컨대 번뇌, 망상의 집착을 끊지 않고서는 안 된다.
이 몸을 금생에 닦지 않으면 백 천 만겁에 불법 만나기가 어려우니 어떻게 귀한 시간 허송세월만 할 수 있겠는가?
일분 일초의 시간을 아끼고 목숨처럼 여겨야 한다.
세월은 흐르는 것, 좋건 싫건, 인류야 복이 되건 화가 되건, 시간만은 끊임없이 그저 조금도 쉬지 않고 흘러간다.
괴로울 때는 더디 간다고 짜증을 내고 기쁠 때는 빨리 간다고 원망을 하지만 시간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흘러가기만 한다.초(秒)가 되고 하루가 옮겨 달(月)이 되고 달이 옮겨 해(年)가 되고 해가 쌓여 잠깐
사이 죽음의 문 앞에 다다름이 중생의 삶이다.
철들자 망녕으로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닦지 못하였음을 뉘우치나 깨진 수레가 갈 수 없듯이
그 때는 벌써 늦게 되는 것이다.
기력이 쇠잔하고 게으름이 생기고 정신이 혼미하여 보는 것 듣는 것이 다
낡았으니 어떻게 닦을쏘냐 그저 남은 것은 서글프고 허무한 마음뿐이게 되는 것이다.
지나간 몇 생도 닦지 않고 헛되이 보냈었고 이제 이 몸도 또한 그대로 보낼 건가,
이 몸도 조만간 반드시 마칠 때가 닥쳐오리니 뒤늦게 후회말고 하루빨리 분, 초를 다투어 닦기에 힘써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발심수행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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