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말(淸末) 화가 정문작(鄭文?)의 <송풍구학(松風丘壑)>
일구일학(一丘一壑)
漁釣于一壑 則萬物不好其志
棲遲于一丘 則天下不移其樂
(어조우일학 즉만물불호기지
서지우일구 즉천하불이기악)
골짜기에서 낚싯대 드리우니
만물이 그 뜻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언덕에서 조용히 숨어사니
천하가 그 즐거움을 옮기지 않네
☞ ≪한서(漢書)≫ <서전(敍傳)>
- 棲遲: ①천천히 돌아다니며 마음껏 놂 ②벼슬을 하지 않고 세상을 피하여 시골에서 삶.
<敍傳>의 이 글 이후 일구일학(一丘一壑)은 은서산림(隱棲山林)의 상징어가 되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산 좋아하고 물 좋아하니 고요한 정취를 얻고, 자연속에 숨어사니 그
것이 바로 풍류"(樂山樂水得靜趣 一丘一壑自風流) 라고.
- 漁釣와 栖遲는 속세를 떠나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전자에 대해서는 만물이 그 뜻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천하가
그 즐거움을 옮기지 않는다 하니 왜일까. 골짜기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는 행위는 분명
피세(避世)의 몸짓이다. 하지만 그 뜻은 栖遲와 다르다. 漁釣라면 태공망 여상(呂尙)이
먼저 떠오른다. 그가 위수(渭水)에서 낚시할 때 바늘에 미끼가 달려 있지 않았다. 그 뜻이 물고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륜에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몸은 홍진(紅塵)을 떠났어도 漁釣는 그 속에 "속세로의 복귀" 내지 "세속에 대한 미련"이라는 기심(機心)을 담고 있다. 그러니 栖遲와는 처음부터 지향점이 다르다. 만물이
그 뜻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栖遲라고 해서 늘 완전한 탈속(脫俗)을 전제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런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출세를 위한
방편으로 은둔을 꾀하는 종남첩경(終南捷徑)은 전형적 사례이다.
※ 근현대 중국화가 장대천(張大千)의 <구학도(丘壑圖)> (1961年作)
※ 근현대 중국화가 진청증(秦淸曾)의 <구학운연(丘壑雲烟)>
※ 청말근대 화가 왕곤(汪琨)의 <사시구학(四時丘壑)> 사병(四屛) (1912年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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