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한시 감상

조선의 선비정신 / 南冥과 敬 2.

qhrwk 2025. 11. 6. 07:01

물그릇 받쳐들고 밤을 새워

이제 남명매와 천왕봉을 가슴에 담고 남명의 삶을 찾아가 보자. 남명은 1501년 6월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兎洞) 외가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던 남명은 아버지 조언형(曺彦亨)이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자 한양으로 이사해 아버지에게 문자를 배웠다.

소년 시기에는 후에 영의정으로 활동한 이준경(李浚慶·1499~1572년) 형제 등과
죽마고우로 자라면서 학업을 닦았다. 아버지가 외직(外職)인 단천(端川)군수로
나가자 거기서 함께 지내면서 남아(男兒)가 익혀야 할 지식과 재능을 익혔고,
특히 자신의 정신력을 기르느라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들고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우리네 마음을 다잡는 일은 쟁반 위의 물을 흘리지 않고 받쳐들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혹독한 자기 수양을 하던 남명은 18세에 한양으로 돌아와 

우계 성혼(牛溪 成渾·1535~1598년)의 아버지인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1493~1564년)을 

만나 그의 고결한 인격을 접하였고 그로 인해 인생의 큰 변화를 겪게 됐다.

이후 남명은 보다 높고 깊은 인생의 경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유교(儒敎)경전 외에도 노장학(老莊學)과 불교서적을 섭렵했다. 

남명은 20세에 생원·진사 양시(兩試)에 급제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가 

죽고, 자신의 숙부인 조언경(曺彦卿)이 멸문(滅門)의 화(禍)를 입게 되자 벼슬을 단념한다.

그러던 중 25세에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원(元)나라 허형(許衡·1209~1281)의 

“이윤(伊尹)의 뜻을 두고 안자(顔子)의 학문을 배워, 벼슬길에 나아가면 큰일을 해내고, 

초야(草野)에 숨어 살면 자신을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크게 깨닫는다. 

이를 계기로 뜻은 이윤에게 두고 공부는 안회(顔回)에게 초점을 맞추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윤과 안회를 본받아
남명이 말년을 보내면서 제자들을 길러낸 산천재.

이윤은 누구인가.

이윤은 하(夏)나라를 멸하고 상(商)왕조를
성립할 때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아형(阿衡)으로서 탕왕(湯王)을 보좌해 수백 년 동안

이어지는 상왕조의 기초를 굳힌 인물이다.
탕왕이 죽고 그의 손자 태갑(太甲)이 즉위했는데, 태갑은 방탕한 생활을 해 국정을 어지럽혔다.

그러자 이윤은 태갑을 동(桐) 땅으로 추방했고 섭정으로서 태갑을 대신했다.
동 땅은 탕왕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할아버지 무덤 옆에서 3년을 보낸 태갑은
마침내 회개한다. 이를 확인한 이윤은 그를 다시 왕으로 맞이하고 자신은 신하로
되돌아간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안회는 누구인가.

공자의 제자 안회는 가난하지만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워낙 학문을 좋아하여 나이 29세에

벌써 백발이 되었다. 자공(子貢)이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聞一知十)”며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이 바로 안회이다. 안회는 찢어지게 가난했으나

그 가난은 그의 수행과 학문 연구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었다.
안회는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一簞食一瓢飮)’을 가지고도 즐거움을
잃지 않는, 공자가 가장 사랑한 제자였다.

이후 남명은 이윤의 길과 안회의 길 사이를 줄다리기하는 삶을 살게 된다. 탕임금을
도와 지치(至治)를 이룩한 이윤과 같은 포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포부를 펼 수
없는 세상에서는 안회처럼 도(道)를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30세에 처가가 있는 김해로 이사하여 거기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공부에
전념하였고, 48세에는 다시 고향 합천으로 돌아와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후진을 가르친다.

1555년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났다.

뒤숭숭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 조정에서는 남명을 필요로 했다. 당시의 실권은 문정왕후

(文定王后)와 윤원형(尹元衡)이 쥐고
있었다. 이들은 남명을 단성(丹城)현감에 임명했다. 이때 남명의 반응은 유명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상소에서 남명은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로, 명종(明宗)을 ‘선왕의 고아(孤兒)’로 불러버렸다.
한편 이 시기에 오건(吳建·1521~1574년), 정인홍(鄭仁弘·1535~1623년) 등 많은
제자가 와서 배웠다. 앞에서 본 이윤과 안회의 길을 함께 가겠다는 남명 자신의
 결심을 구현하기 위해서 계부당과 뇌룡정이란 건물을 지은 것이다.

‘계부’란 ‘닭이 알을 품는다’는 의미로 함양(涵養)하는 공부와 후진 양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뇌룡’이란 ‘연못처럼 고요하지만 때로는 용의 꿈틀거림처럼 뇌성(雷聲)을
 발한다’는 뜻이다. 계부당에서 후진을 가르치며 안회를 생각하고, 뇌룡정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리면서 이윤을 떠올렸던 것이다.

 

 

 

敬義劍
뇌룡정.

남명은 회갑이 되는 61세에 또다시 거처를 옮긴다. 크게 버리면 크게 얻는다고 했던가.
남명은 동생 환(桓)에게 고향의 모든 가산(家産)을 물려주고 이곳 덕산 땅에 터를 잡고
산천재를 지었다.
이전에 이미 십여 차례 지리산 이곳저곳을 유람했던 남명이었다. 

오랜 숙고 끝에 선택한 덕산 땅은 마치 산이 마을을 반지처럼  동그랗게 감싸주는 곳이었다.

모든 것을 놓아둔 채 이곳을 선택한 남명은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은 시(詩)로 표현했다.

<봄 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하늘 닿은 천왕봉이 마음에 들어서라네
빈손으로 들어왔으니 무얼 먹고 견뎌낼까?
십리 은하수 같은 물, 먹고도 남으리.>

春山底處無芳草
只愛天王近帝居
白手歸來何物食
銀河十里喫猶餘

그런데 여기서 필자는 갑자기 남명이 계속 거처를 옮긴 이유가 궁금해졌다.
당시에 집을 새로 짓고 새롭게 삶을 시작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은 일이었을 것임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때 필자의 눈에 들어온 물건이 남명기념관에 있는 성성자(惺惺子)

라는 방울과 경의검(敬義劍)으로 불리는 장도(粧刀)였다.

‘성(惺)’이라는 글자는 ‘깨달음’을 뜻한다.
남명은 항상 이 방울을 몸에 지니고 생활하면서 방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을 일깨우고자

하였다.

경의검에는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內明者敬)이고, 밖의 일을 처단하는 것은 의(外斷者義)’라고

새겨져 있었다.

 

성성자와 경의검을 보면서 필자는 추측해 보았다.

남명의 이사(移徙)는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빠지기 쉬운 자신의 나태함을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새로운 정치를 갈망하는 욕구가 강하게 일어났다.
1566년 남명은 자신의 생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임금을 만난다.
그런데 이때 남명은 관복(官服)이 아닌 포의(布衣)를 입은 채로 명종을 독대(獨對)하여

치국(治國)의 방략(方略)과 학문의 요체를 말했다.

하지만 남명은  ‘고아’가 아니기를 바라고 길을 떠나 만난 명종이 ‘고아’라는 사실만을 확인하고

다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