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蘇東坡)
그는 서기 1037년 1월 8일 북송(北宋) 인종(仁宗) 때 쓰촨 성(四川省)
메이산 즉 미산(眉山) 근교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메이산의 도인(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도가(道家) 특히 장자(莊子)의 제물철학(齊物哲學)을 접하게 된다.
서기 1056년 그의 아버지 소순(蘇洵)은 두 아들 소식(蘇軾)과 소철(蘇轍)를 데리고
상경(上京)하여 이들의 詩를 당대의 대 시인이며 고관대작이었던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자 격찬을 받는다.
이들 형제는 그해 가을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는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에도 나란히 합격했지만 때 마침 모친상을 당하자
벼슬자리를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항저우(抗州) 서호변의 소동파 석상)
서기 1060년 상(喪)을 마치고 수도인 카이펑 즉 개봉(開封)으로 돌아온 소동파는
관리임용 특별시험인 제과(制科)에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나란히 합격했으며,
이어 동파는 봉상부(鳳翔府: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의 첨서판관(簽書判官)이 되어
개봉(開封)에 남게 된 동생 소철(蘇轍)과 헤어져 홀로 임지로 떠난다.
봉상부 즉 서안(西安)은 서주(西周:기원전 11세기 경으로 지금부터 3,000년 전의
옛 주왕조를 이른다.)이래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그는 공자묘(孔子墓)의 석고(石鼓:고대문자를 새긴 10개의 북 모양의 돌)와
개원사(開元寺) 동탑(東塔)에 남아 있는 당대 왕유(王維)와 오도현(吳道玄)의 불화(佛畵) 등을
접한 감회를 봉상팔관(鳳翔八觀)이란 책에서 자세히 풀어놓은것으로 보아
고문(古文)과 회화(繪畵)에 대단한 조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봉상부(鳳翔府)에서의 임기가 끝나 상경한 서기 1065년에 부인 왕씨(王氏)가 병 얻어 죽었고.
이듬해 아버지 소순(蘇洵)마저 병으로 죽자, 동파는 아버지의 관을 고향으로
옴겨가 상(喪)을 치렀으며3년상을 탈상(脫喪)하고 상경한다.
그 해에는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로, 참지정사(參知政事)의 고위직에 있던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한 개혁파가 득세하여중앙정부의 물자조달을 합리화하기 위해 균륜법(均輪法)을
만들어 시행했고,가난한 농촌에 저리로 자금을 빌려줘 농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청묘법(靑苗法)등 당시로써는 대단히 파격적 법률인 이른바 신법(新法)을 제정하여
시행하던 시기였다.
신법(新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소동파는 조정의 눈총을 받아 감관고원(監官告院)이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업무만을 담당하는 별 볼 일 없는 직책으로 발령이 나자, 화딱지가 난 그는
지방 근무를 자청하여 절강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자사로 근무할 것을 상주(上奏)
했고,눈에 가시로 여겼던 조정은 흔쾌히 발령을 내려 항주로 그를 내려보낸다.

(항저우(抗州)의 서호(西湖) 풍경, 2년 전에 항주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인데,
지금도 아름다운 서호 풍경이 눈에 선 하다.)
바로 이때 항주의 유명한 호수인 서호(西湖)의 제방을 그의 지시로 새로 쌓았는데,
소동파가 쌓다고 하여 "소제(蘇堤)"라 이름이 붙은 제방이 지금도 소동파의 석상과
함께 명승지로 남아 지난날을 기리고 있다.
이에 자세한 내용은 몇 년 전에 항저우 여행을 하며, 본 블로그에 소개 했던 "항저우...
서시(西施)를 닮은 호수(湖水) 서호(西湖)"에 대충 설명했던 관계로 여기선 생략코자 한다.
이어 그는 밀주(密州), 서주(徐州), 호주(湖州)등지를 돌며 지방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소동파가 쌓다고 하여 "소제(蘇堤)"라 이름이 붙은 제방인데 늘 이렇게 관광객들로 붐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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