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거이(白居易)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로 쓰며 시호는 문(文)이다.
그는 당(唐)나라 중기 하남성(河南省) 신정현(新鄭縣) 사람이다.
백거이가 이 시기에 태어난 것은 어찌보면 그로서는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면 과거제도가 널리 활성화되어 실력이 있는 일반 양민들도 응시할 기회가 주어지던 시기에 살았기 때문이다.
백거이는 서기 800년 그의 나이 29세 때 진사에 급제하였고 급제 후 탄탄대로의
출세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좌습유(左拾遺)등 좋은 직위에 발탁되는
행운도 따랐다.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37세 되던 해에 부인 양씨(楊氏)와 늦깍이 결혼을 한다.
그래서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편 시 장한가(長恨歌)에는 부인에 대한
백낙천의 사랑이 잘 반영되있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811년 돌아가신 모친상을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던 그는 3년 후 장안(長安)으로 돌아왔으나,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라는 별 볼 일 없는 한직의 벼슬자리밖에
얻지 못했다. 게다가 그 이듬해에 발생한 재상 무원형(武元衡)의 암살사건에 관하여
직언을 했다가 조정의 분노를 사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는 불운을 맞는다.
사마(司馬)라는 직책은 별로 할 일도 없고 그저 손님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있으나마나한
명분뿐인 직책으로 요즘으로 치면 대기발령과 같이 취급되던 녹봉만 축내는 직책에 불과했다.그 사건은 백거이가 관리에 입명된 이래 처음으로 겪은 뼈저린 좌절이었고
매우 큰 심적 고통이었다.그로인해 그의 시심(詩心)은 유유자적하고 감상(感傷)으로
향하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바로 이 고난의 시기에 백거이 최고의 서정시로
일컬어지는 불후의 명작 비파행(琵琶行)의 詩가 세상에 나온다.

서기 820년 자신을 좌천시켰던 헌종(憲宗)이 죽고 뒤이어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백거이는 중앙으로 복귀 해 낭중(郎中)란 직책을 얻어조칙 제작의 임무를 맡게 되며
국가의 이념을 적립하는데 매진하게 된다.
그 후 쉰살이 넘은 나이에 조정에서 당쟁이 일자 회호리를 피하고자 자진하여
강남으로 내려가 항주자사와 소주자시를 지내기도 했으며 많은 벼슬자리를
옮겨다니기도 했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늘 詩와 함께 살았다. 그가 지은 작품의 수는 대략 3,840편
정도라고 하는데,문학을 하는 작가와 작품 수가 크게 번성한 중당시대(中唐時代)란
걸 감안 하더라도 이같이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는 훌륭한 친구를 많이 사귀었는데 친구들과 서로 주고 받은 시문(詩文)에는
정이 물씬 배어 있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원진(元?)및 유우석(劉禹錫) 사이에 오고 간
글을 모은 (원백창화집 元白唱和集)과 (유백창화집 劉白唱和集)은 중당시대의 문단을
화려하게 장식한 백거이 문학의 우정적 결실이라고 일컬어진다.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는 정치이념을 주장한 것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도
있는데, 모두 평이한 언어로 알기 쉽게 표현되었으며 시에 봉급의 액수까지
언급하는등 생활 자체가 청념했으며 매사에 당당했었다고 전해진다.
백낙천(白樂天)의 시문들이 쉽다보니 문인들 사이에 속되다는 비판을 종종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일반 서민들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은 배려와애민적 식견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는 한 편의 시가 완성될 때 마다 집안에서 일하는 노파에게 읽어주고 어려워하는
곳을 찾아 고치기까지 할 정도로 평이한 문체와 글자를 애용했으며 꼼꼼한 퇴고(推敲)
또한 잊지 않았다고 한다.
이백(李白) 두보(杜甫) 한유(韓愈) 등 백거이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시인들의 작품에는
송대(宋代) 이래 많은 주석서가 나왔는데 반해백거이 문집인 백씨문집(白氏文集)에는
그러한 주석서가 없다.
종래의 주석서는 난해한 말에 관한 출전을 찾아내어 설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백거이의 작품에는 이런 주석서가 필요치 않았던 까닭이다.815년 강주사마로의
좌천과 자신을 총애하던 목종의 죽음은 그에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정치적 입신을 향하던 정관문학으로부터 탈피하여 자연과 인생의 내면을 그려내는
순수문학을 추구하는 계기가 된다.
평생 지은 그의 문집은 합계 75권으로 방대한 양을 자랑하며말년에 정리한 그의
문집 백씨문집(白氏文集)은 여러 절에 분산 봉안 했다.그리하여 그의 수 많은 시들이
오늘날까지 내려올 수가 있었다.백거이는 당시로서는 꽤나 장수한 75세의 나이로
낙양에서 생을 마감할때까지 늘 시와 함께 살았던 진정한 시인 중에 詩人이었다.

琵琶行(비파행): 비파에 대하여
- 주(註) -
중국의 한시(漢詩)를 우리말로 풀어서 옴기기란 쉽잖은 어려움이 있다.
일일이 글자의 뜻을 풀어서 옴기자니 중복되는게 많고 문장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는 단점이 있다. 또 앞 뒤의 문맥이 서로 연결 되지 않는 게 태반이다.
그리고... 아무리 백거이의 시가 평이하다고 하나 당시의 지명과 정치 문화를
어느정도 이해를 하고 있어야 표현하고자 하는 시 본래의 뜻이 온전히
전해질텐데...
그런한 점이 현실에 맞게 우리글로 풀어 옴기기가 특히 어려웠던 부분이다.
한시들은 오언(五言)이나 칠언(七言)으로 정형화 된 글자의 조합을 통해
이루어지다보니 작가가 틀을 맞추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글자를 집어넣었거나
남아서 생략한 글자들이 많아 우리말로 매끄럽게 옴긴다는게 현실적으로 난감한
점이 있다.
따라서 본 비파행도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들은 내 임의로 과감하게 더하고 혹은
일정부분을 생략한 점도 있다는 걸 밝혀두고자 하며 미약한 풀이로 인해 본래의
뜻이 왜곡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되는게 사실이다.
백거이의 비파행이란 시는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고 때론 줄겨 읽는
名詩라서 큰 부담은 없으리라 자위하며 미천하고 두서 없는 식견으로 옴겨 봤으니...
모쪼록 블로그에 들러 읽고 가는 분이 계시다면 너그러이 용서를 구할 뿐이외다.

琵琶行(비파행): 비파에 대하여
?陽江頭夜送客(심양강두야송객)
심양강가에서 밤 늦게 나그네를 전송하려니
楓葉荻花秋瑟瑟(풍엽적화추슬슬)
단풍잎 갈대꽃에 가을이 쓸쓸하구나.
主人下馬客在船(주인하마객재선)
주인은 말에서 내리고 객손도 배 안에 오르고
擧酒欲飮無管絃(거주욕음무관현)
술잔을 들어 마지막 잔을 나누고자 하나 음악이 없구나.
酒不成歡慘將別(주불성환참장별)
술은 취하지 않았는데 서글피 이별하려니
別時茫茫江浸月(별시망망강침월)
이시간 망망한 강물에 달빛만이 젖는구나.
忽聞水上琵琶聲(홀문수상비파성)
그때 어디선가 강물 위로 전해오는 비파소리
主人忘歸客不發(주인망귀객불발)
주인은 돌아갈 생각 잊고 객도 떠나질 못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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