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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아버지

qhrwk 2022. 6. 16. 10:24

인간의 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들은 이 세상에 새로운 손님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 아이에게 잠재성을 부여한다. 

잠재성이 성장하지 못하면, 아이는 불행하게 살아갈 것이다.
자기 자녀가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을 생각하고 싶은 부모는 아무도 없다. 

 

그들은 자녀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들의 생각이 틀린 것이다. 

그들은 자녀가 의사나 교수, 기술자나 과학자가 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모른다! 아이들은 자신이 원해서 운명적으로 되어야 하는 존재가 될 때에만 행복할 수 있다.

아이들은 자신의 내면에 담고 있는 씨앗을 움 틔우는 존재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아이들이 최대한으로 자유와 기회를 갖도록 도와주어라. 

보통은 아이가 엄마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면 엄마는 아이가 요구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그냥 ‘안 돼’라고 말한다. ‘노’는 권위적인 용어이지만, ‘예스’는 그렇지 않다.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권위를 가진 다른 누구도 ‘예스’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일에 대해서도 그렇다.
아이가 집 밖에 나가 놀고 싶어 한다. ‘안 돼!’ 아이가 비가 올 때 밖에 나가 빗속에서 춤을 추고 싶어 한다. 

 

‘안 돼! 감기 걸려.’ 감기가 암은 아니지만, 빗속에서 춤을 추지 못하게 된 아이, 춤출 수 없었던 아이는 대단히 

아름답고 멋진 무언가를 놓치고 만다. 

감기는 앓아도 괜찮을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아이가 반드시 감기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대가 아이를 보호할수록 아이는 더 허약해진다. 

그대가 아이를 더 많이 허락할수록, 아이의 면역력은 더욱 강해진다.


부모는 ‘예스’라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부모가 일반적으로 백 번을 ‘노’라고 말한다면 그 가운데 아흔아홉 번은 단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것뿐이다. 

모두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될 수 없고, 많은 사람들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모두가 남편이 되어 자기 아내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고, 모든 아내가 어머니가 되어 아이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아이가 곰 인형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 

자기 엄마나 아빠에게 하고 싶은 대로 곰 인형을 여기저기 발로 차고, 손바닥으로 때릴 수 있다. 

불쌍한 곰 인형은 화풀이할 상대가 아무도 없다.


이것이 권위적인 사회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자유를 허락하라고 말할 때, ‘노’ 대신에 ‘예스’라고 말하면 권위적인 사회는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아이들은 미래 사회의 주인이 된다. 

어린아이는 인간의 아버지가 된다.

오쇼의 <성공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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