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소리 바람소리♣
불일암에서는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살았는데, 새로 옮겨 온 이곳에서는 시냇물 소리를 들어야 한다.
산 위에서는 항시 바람이 지나간다.
그러나 낮은 골짝이에서는 바람 대신 시냇물이 흐른다.
물소리 바람소리가 똑같은 자연소리인데도 받아들리는 느낌은 각기 다르다.
숲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리고 있으면, 때로는 사는 일이 허허롭게 여겨져 훌쩍 어디론지
먼 길을 떠나고 싶은 그런 충동을 느낄때가 있다.
그리고 폭풍이라도 휘몰아치는 날이면 스산하기 그지없어 내 속은 거칠은 들녘이 된다.
그런데 이번에 옮겨 온 집은 시냇가에 자리잡은 곳이라 쉬지 않고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싫으나 좋으나 밤낮으로
듣지 않을 수 없다.
처음 몇칠 동안은 더구나 비가 내린 뒤라 그 소리에 여간 마음이 쓰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무심해져서 별로 거스리지 않는다. 새월이 흐르는 소리라고, 인생이 흘러가는 소리라고 생각하니 도리어 시간에 대한 관념이 새로워진다.
바람소리가 때로는 까칠까칠 메마르고 허전하게 들리는 것과는 달리 ,물소리는 어딘지 촉촉하고,풍성하게 들리는 것 같다.그리고 한 없이 무엇인가를 씻어내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한 때 높은데서 드러나게 살았으니 이제는 낮은데 내려와 은신해서 살고 싶다.
혼자서 유별나게 살아 보았으니 이제는 여럿속에 섞여 그 그늘 아래 묻혀서 살고 싶다.
이 세상을 내 마음대로 바꾸어 놓을 수 없을 바에야, 내 자신의 생활 구조만이라도 개조해 보고 싶은 것이다.
새로운 변화를 통해서 잠재된'나'를 일깨워 보고 싶다.
인생은 어떤 목표나 완성이 아니고 끝없는 실험이요,시도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불일에서는 꼬박 7년 반을 살았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 우선 부처님한데 미안하고 서운한 생각이들었다.
이 부처님은 10여년전 다래헌 시절부터 모셔 온 인연이 있다.
어느날 페사된 절에서 가져와 큰방 탁자위에 모셔 놓은 것을 보자마자 전에 없이 가슴이 설레였다.
첫 눈에 이끌리게 된 것이다.
그것은'만남'이었다.원불로 모시리라고 마음 먹었다.
고불은 아니지만 단아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다래헌에서 불일암으로 옮겨올때 다른짐은 짐칸에 실었어도 이 부처님만은 조심스레 모셔 왔었다.
혼자서 지내다 보면 자칫 게울러지기 쉬운 법인데, 이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덕에 아침저녁으로 게울러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 말원에 귀를 기울여준것도 그 부처님이고,내 못된 성미며 버릇을 너그럽게 받아 준 것도 그 부처님이다.
때로는 볼일로 큰 절에 내려와 있다가 밤이 늦어 자고 가라고 곁에서 만류하는 것도 뿌리치고 그때마다 기를 쓰고
올라간 것은, 부처님 홀로빈 집에 계시게 하기가 안 되어서였다.
이런 부처님을 한동안 하직 하려고 하니 미안하고 서운한 생각이 안들 수 없었다.
그 다음으로 마음에 거리는 이웃으로는 내 손수 심어서 가꾼 나무들이었다.
떠나 오는날 후박나무와 향나무,은행나무들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면서,우리를 두고 가녀느냐고 마냥 서운해
하는것 같았다.
허구헌날 우리는 맑은 햇살을 함께 쪼였고,별과 달도 한께 바라 보았다.
그리고 눈보라와 비바람도 또한 함께 받아 들였다.
가지를 따고 두엄을 묻어준 갚음으로, 그들은 청청한 잎과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여름날의 더위를 식혀 주곤 했었다.
우리는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고 있는 존재로서 살뜰한 정을 주고 받았었다.
나그네길을 떠나기 위해 행장을 챙길때에도 흔히 느끼는 일이지만, 이번에도혼자서 이삿짐을 주섬주섬 싸고 있을때
문득 시장기 같은 것을.허허로운 존재의 본질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살 만큼살다가 자기 차레가 되어 혼자서 이 지상에서 사라져 갈 그 때에도 이런 존재의 허무같은 것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남의 집 셋방 신세를 지면서 여기 저기 이사를 다녀야 하는 사람들의 고달프고 쓸쓸한 심정을 얼마쯤은 이해 할 것도
같았다.
내 자신의 경우는 스스로 선택해서 옮겨가는 것이지만, 자기 집이 없는 사람들은 집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고, 집을 비워 달라는 말 한마디에 기가 죽어 다시 또 이삿짐을 주선주선 꾸릴때,그 막막하고 고달픈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니 내 집 마련을 위해온갖 희생을무릅쓰고 그토록 열신히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몸 담고 살아 갈 주거 공간을 내 식으로 고치느라고 몇칠동안 분주하게 보냈다.
엉성한 전기 배선을 안전하게 다시 하고, 다락도 말끔히 치워 새로 도배를 했다.
후원의 수각에서 파이프를 연결하여마당 한쪽까지 수도를 끌어들리고,개울에서 넓적한
돌을 주워다 빨래터도 하나 만들어 놓았다.더운물을 쓸 수 있도록 군불지피는 아궁이에 솥을 걸었더니 불이 잘 안들였다.
다시 뜯어내어 이맛돌을 낯추어 걸었다.
이제는 활활 잘 들인다. 굴뚝도 그전보다 높였다.
절에서 흔히 말하는 목연탑을 세운것.나무 타는 연기가 나오는 곳이라 해서 장난삼아 그렇게 부른다.
대밭에서 서너 발 되는 장대를 배어다 앞마당에 빨래대로 걸어 두었다.
헛간에서 헌 판자를 주워다가 또딱또딱 손놀림끝에 한자 높이의 보조경상도 하나 만들었다.
방안 벽에 대못을 2개 박아 가사와 장삼을 걸고, 반쯤 꽃이 핀 동백꽃 가지를 꺽어다 백자 지통에 꽂아 놓으니 훵하던
방안에 금새 봄기운이 감도는것 같았다.
그리고 임제선사의 어록중에서 좋아하는 한 구절'즉시 현금 갱무시절' 이라고 쓴 족자를 걸어 놓으니 낮설기만 하던 방이조금은 익숙해졌다.바로 지금이지 다시 시절은 없다는 말. 한번 지나가 버린과거를 가지고 되씹거나 아직 오지 않는 미래에 기대를 두지 말고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최대한으로 살라는 이 법문을 대할 때마다 나는 기운이 솟는다.
우리가 사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다.이 자리에서 순간순간을 자기자신답게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다면,그 어떤 상황 아래서도 우리는 결코후회하지 않을 인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밤이 깊었다. 법당에서 삼경을 친것도 한참이 되었다.다시 들려오는 밤시냇물 소리.
마치 비가 내리는 것 같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시냇물은 흐르고또 흘러서 바다에 이른다.
우리들 목숨의 흐름도 합일의 바다를 향해 그처럼 끝없이 흘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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