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움이 튼다♣
지난겨울은 우리 모두에게 몹시도 지루하고 답답한 계절이었다.
그토록 끈덕지게 온 대지를 얼어 붙게 하던 추위, 몽고 지방에 뿌리를 두고 계속 위력을 떨치던 그 춥고 매마른
고기압 앞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오늘의 인류 문화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쭐대면서도 이 자연의 위력 앞에서만은무릅을 끓고 만다.
얼마나 다행한 섭리인가.
우리는 풀이 죽어 한쪽에 비켜설게 아니라, 이런 사실을 통해 현대 문명의 한계 같은 걸 직시하고 겸허해질 줄 알아야겠다.
자연의 조건까지도 남의 영양을 받아야 하는우리네 처지다
삼한사온의 전통적인 겨울 날씨도 이제는 망령이 들었는지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솥이 얼어붙고 김치독이 터지고 물이 고체로 변해 버린 썰렁한 부엌바닥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먹이를 챙길때 나는
한 마리 짐승이나 다를게 없었다.
먹는 일도 거를 수 없는 하나의 일과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런 나를 위로 해준 것은 감옥의 독방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동료의 모습이었다.
취위에 얼어 죽지 않으려고 끝없이 움직이고 있을 그 강인한 모습이었다.
한 사람이 겪는, 또는 몇 사람이 겪는 고난의 의미는 우리 모두에게 언제 어디서나 확산되게 마련이다.
살아 남는다는 이 표현에 얼마나 많운 의미를 담아야 할까. 무엇 때문에 우리는 살아 남아야 하는가.
물론 남기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살고 있을 뿐이다.
산다는 것은 고통을 당하는 것이고, 살아남는다는 것은 고통을 당하는 그속에서 의미를 찾는 일이다.
삶에 무슨 이유가 붙을 수 있겠는가.
삶 그 자체가 신성한 목적인데.이렇듯 존엄한 삶을 괴롭히는 일은 악덕이요,죄악이다,
불타 석가모니는 이렇게 말한다.모든 것은 폭력을 두려워 하고 죽음을 두려워 한다.
이 이치를 자기 몸에 견주어 남을 죽이거나 죽게 하지 말라.
모든 생명은 평화를 바라는데폭력으로 이들을 헤치는 자는 자신의 평화를 구 할 지라도그는 끝내 평화를 얻지 못한다.
우리들의 가치 척도가 인간 본위일때 거기에는 독선과 아집과 배타가 도사리고 있다.
자기네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또는 피부 색깔이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고 박해하는사례를 우리는 오늘도 보고 있다.
현대 휴머니즘의 맹점이 이런데 있다.
그러나 그 가치 의식이 인간 본위에서 생명 위주로 전환 될때,거기에는 서로 의지해서 함께 살려는공존의 윤리가 모섹된다.뭐니뭐니 해도 자기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마찬가지로 다른 생명도 저마다 다른 생명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 그러니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남을 괴롭히거나 헤쳐서는 안된다는 생명의 논리다.
그토록 삭막하고 추웠던 지난겨울, 아궁이에 불을 지피듯 나는 내 안에 몇 권의 전기를 지폈다.
우리보다 일생을 살다간 사람들의 자취는, 지금 살고 있고 앞으로 살아 갈 우리에게 적잖은 암시를 던져준다.
그가 인류사에 알려진 위대한 사람이든 아니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자기 앞의 삶을 얼마만큼 참되고 진지하게 살
았는가가 자취를 더듬는 우리의 관심사다.
아시아의 성 프란체스코에게서 철저한 청빈을 배웠고,사하라의 성자 샤를르드 후꼬에게서는 진정한 기도의 의미와 말고 선량한 그 눈을 보았다.
이들의 자취를 따르면서 문득문득 고개를 드는 질문,오늘의 우리는 무엇인가?
오늘의 나는 무엇인가?
부끄럽고 송구 할 다름이었다.
세상에는 그 이름조차 드러나는 것을 부끄러워 하면서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자기 희생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온갖 모순과 갈등과 부조리로 오염된 이 지구가 그래도 유지 되고 있는 것은 그분들의 끝없는 기도와 희생과 봉사가
낳은 공덕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멕시코 혁명의 영웅 판초빌라, 그의 솔직하고 단순한,그러면서도 의리가 있는 사나이다운 기상에 호감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편 못내 언잖았던 것은 지나친 실상을 보고 서였다.
설령 어떤 정의를 위해 불가피하게 자행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킨다는것은 용납 될수 없는 일이다.
영웅이라는 호칭을 듣는 사람들이 대개 그런 부류들인줄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사상이나 힘에 의해서승리한 자들에게
나는 영웅이라는 명칭을 거부한다.오로지 정신에 의해 위대했던 사람들만을 나는 영웅이라고 부른다."
로맹롤랭이<베에토맨>의 생애에서 외친 이말은저 영웅들의 이마에라도 새겨 주어야 할 값 있는 말이다.
판초빌라 전기의 마지막 장에서 그가 옛날의 여자 친구를 만나 그녀로 부터 온화한 미소에 실린 책망을 듣던 장면이,
마치 어떤 필림의 영상처럼 내 기억에 자리하고 있다.
한때는 산적행세를 한 적이 있는 그를 보고, 당신은 살상뿐 아니라 도둑질도 많이 했다고 책망을 하자, 빌라는 이렇게
변명한다.
"부인 나는 훔친적이 없습니다. 너누 많이 갖고 있는 자들한데서 배앗아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있지요. 나 자신은 아주 궁핍한 것을 제외 하고는 다른 사람의 것을 취해 본일이 없어요.배고플 때 먹을 것을 집는 것은
도둑질이 아닙니다.그것은 다만 자신을 살리려는 생존의 본등에 따르는 것입니다.
오히려 훔치는 것은 부자들입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으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의 가엾은 빵까지 배앗고
있으니까요."
도둑에게도 그들 나름의 논리와 의리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용납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 도둑들을 가리켜 가난하고 포악한 정치에 시달린 민중편에서는
의적이라 해서 그 뜻을 기렸다.
동서고금의 인류역사가 남의 것을 탈취하는 도둑을 두고 한결같이 찬양해 마지 않는 것은 오로지 그 의로움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빌라의 경제 윤리같은 것을 이야기 하고 싶다.
마을 사람들이 축제에 들떠 즐기고 있을때, 그는 알바라도라는 지난날의 부호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자기는 돈을 가지고 남한데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에 자위하는 말을 듣고 ,빌라는 말한다.
"참 된 부자는 항상 그들의 의무를 지킬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돈은 부자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국민의 것입니다.
부자들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돈을 쓸 것이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의 궁핍을 덜어주는 일에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알바도라가 돈을 갖게 된 내력을 들어 보자.
"빈부는 운명의 장난인거 같아요.내가 어떤 산에서 노다지를 발견해 큰 부자가 된 것도 운명이요. 곧 광맥이 끊어져
몰락한 것도 운명인것 같습니다.그러니 부를 축적하게 된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땅속에서 나온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는 이런 행운이 나에게 온 것을, 이 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라는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광부들에게 임금을 많이 주었습니다.."
부자의 기쁨은 긁어 모으는 재미보다는 없는 사람들에게 돌려 주는 그 마음에 있을 것이다.
기껏해야 서넛이 살고 있는 집에 에스컬레이터를 장치하고 실내 풀장을 만드는가 하면,지하에 바를 차려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요즘의 졸부들하고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몇칠 동안 비가 내리고 안개가 숲을 가리더니 수목들에 물기가 배였다.
겨울 동안 소식이 묘연했던 다람쥐가 엊그제부터 헌식 돌 곁에 나와 내 공양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늦가을 무렵까지 윤기가 흐르던 털이 겨울을 견디느라 그랬음인지 까칠까칠해졌다.
추위에 짙은 갈색으로 변했던 향나무가 요 몆칠 사이에 싱싱한 초록빛으로 바뀌었다.참나무 숲에서도 가지끝이 촉촉히
뻗어 오른다.겨울동안 들을 수 없었던 산비둘기 소리가 구우구우 들리기 시작했고,밤에는 앞산에서 고라니 우는 소리가
골짝이에 메아리 치고 있다.
나는 한 밤중의 잠에서 자주 깨어난다.
이런 것을 가리켜 사람들은 봄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렇다. 모든 생명이 살아서 수런거리는 이 힘을 우리는 봄이라고 부른다.
이렇듯 장엄한 생명의 용솟음을 누가 무슨 힘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얼었던 대지가 풀리고 마른 나무에 움이 트는 이 일을 누가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은 자기 몫을 위해 신의를 등지고 배반하는 일조차 있지만, 이 존엄한 우주 질서에는 거짓이 없다.
허공에 가지를 둔 나무들을 보라. 얼마나 당당하게 자기 생명을 내 품고 있는가.
그러나 우리들의 가치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돌아보라.
우리가 떳떳한 인간이라고 외칠 수 있는가.
물어보자. 우리의 있음을 어디 한번 큰 소리로 물어보자.
이러고도 오늘의 우리가 인간일 수 있는가를.
봄이 온다고 한다.죽었던 대지에 다시 생명의 봄이 움튼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봄은 주어진 봄이 아니라, 스스로 파서 씨부려 일구는 봄임을 잊지 말자.
침묵의 나무에 움이 트고 있다. 우리들의 가지에도 청청한 움을 틔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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